Kant와 종교다원주의
기독교회의 신앙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사조 중 하나는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인데 이는 종교간의 대화하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데서 시작해 기독교회 밖 다른 종교에도 구원과 계시가 있다고 하다가 마침내 모든 종교는 근본에서 하나인데 이름만 다를 뿐이라며 종교통합을 주장하는 이데오로기이다. 세상사람이 볼 때는 아주 그럴듯하고 신사 같으며 시원하게 느낀다. 이런 주장이 세상사람들이나 종교학이란 것을 공부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교회의 신학과 목회적 현장에까지 퍼지고 있으며 (말로 하진 않아도) 자유주의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 영혼에 많이 박혀버리고 있는 추세이다. 기독교회의 성경과 역사적 모든 교리체계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인데 종말적 배교의 물결을 타고 교계를 넘나들고 있다.
우리는 임마누엘 칸트(Kant1724-1804)에게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적 요소를 찾아내 대처할 필요가 있다. 칸트는 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그의 종교관을 보이고 있는데 한마디로 이성종교요 도덕종교가 그의 종교관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절정인 철학 아니랄까봐 철저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논한다. 그는 계시를 대하는 태도 또한 철저 이성주의다.
그가 한 말을 보면 “하늘로부터의 영향을 자기 안에서 지각하려는 것은 일종의 미친 짓이다 그러한 내적 계시라는 것(영적 은혜 체험)은 항상 해로운 자기기만일 뿐이다.” 라고 하면서 이런 영적 체험이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이념과 연결될 때에만 유의미 하고 우리의 도덕적 노력의 불완전성을 보충하기 위해서만 은총을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신옥희 역, p.226) 말하자면 “도덕적이고 이성에 부합할 경우만 계시나 은총을 말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은혜 체험 같은 것도 미신으로 처리하거나 버려야 한다”는 얘기다. 그에게서는 “광신적인 종교적 망상은 도덕적 이성의 죽음”인 것이고 “종교체험이란 착한 행실을 하도록 원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어야만 가치를 지닌다.(위의 책,p.227)
칸트에게서 神의 존재는 인식 불가능한 대상이다.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의 대상일 수 없다. 이렇게 칸트식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맺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경건한 어머니의 기도 속에서 자란 칸트이지만 교회 신앙에 회의懷疑를 심어준 인물이었다. 이런 칸트에 있어서 신의 존재는 단지 인간과 그의 도덕적 이념과의 관계를 맺어주기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하게 된다.그에게서 그리스도의 계시는 단지 우리 안에 있는 善 또는 도덕적 인격의 이념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도구일 따름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도덕적 모범이고 우리의 도덕성을 일깨우는 모범적 표본뿐인 셈이다.(p.288) 도덕으로 종교를 흡수해버린 격이다.
이런 칸트의 이성종교 도덕종교는 계몽주의 산물로써 교회 신학이나 신앙에서 용납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체계에서 이성은 계시에 복종해야 하고 도덕은 신앙의 열매중 하나일 수는 있으나 종교나 신앙의 본질일 수는 없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세계창조자와의 관계 맺음이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야말로 구원의 은혜인 것이다. 칸트에게서 그리스도는 도덕을 가르치는 훌륭한 스승이고 그에게서 참된 종교란 도덕신앙 이성신앙이기 때문에 교회신앙과 공존 불가의 사변이다. 칸트가 평생 연구한 그대로 이성은 전능자가 아니고 한계를 지닌 존재이며 신학적으로 말하면 죄성罪性을 내포한 유한자이다. 그러므로 교회 신앙은 계시에 이성이 복종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칸트는 그의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제3권 제1편의 “지상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기초 위에서 가능한 선한 원리의 승리에 대한 철학적 표상”에서 하나의 참된 종교론을 말하고 있다.
“오직 하나의 종교가 존재할 뿐이다 ......
그러므로 이사람 또는 저런(유태교적, 마호멧교적, 기독교적, 가톨릭적,루터교적)
신앙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라고 하여 오직 하나의 종 교만이 있다고 주장한다.(신옥희 역,p.139)
여기에서 칸트가 말하는 ‘하나의 참된 종교’eine wahre Rrligion는 철저한 이성종교인 것이다. 기독교회의 지배하에 있던 시대의 유럽에서 칸트의 이와 같은 발언은 가히 급진적이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이런 발언을 통해 진정한 종교의 존립 근거가 도덕주의에 있으며 이 이성 본위의 도덕주의에 근거한 세계종교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찍부터 철학에 또아리 틀고 있는 혼합종교의 싹인 다원주의를 보게 된다. 칸트식으로 하자면 이성에 부합한 도덕적 결실이라면 아무 종교나 상관없다는 극단적 주장을 만들게 된다.
울산대학교의 김진 교수에 의하면 칸트의 이러한 구상이 신칸트학파인 알프레이트 리츨Rischl,(1822-1889)에게 갔고 트뢸치Troeltsch,(1865-1923)와 빌헤름 헤르만Hermann,(1846-1922) 을 거쳐 헤르만 문하에서 칼 바르트Barth,(1886-1968)와 루돌프 불트만Bultmann,(1884-1976)이 배출되었고 트뢸치의 문하에서 폴 틸리히Tillich,(1866-1965)가 나왔다.
트뢸치는 기독교를 위시한 모든 역사적 종교들은 진화의 발전 단계에서 절대자를 지향하는 상대적인 종교문화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고 말하는 김진 교수는 칸트가 다양한 교회신앙의 체계들이 도덕신앙이라는 하나의 참된 종교 신앙으로 통일을 지향한다며 모든 종교들을 통합하는 하나의 단일한 신앙체계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김진, 『칸트와 종교』 p.653,654)
칸트의 이러한 견해는 세상사람들이나 구원 받지 못한 자유주의 신학도들에겐 호소력을 지닌다. 하지만 교회신앙에서 용납할 수 없는 사조이며 계시록17장의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로 상징된 글로벌 혼합종교를 만들어낼 거짓선지자의 이론이다. 그리스도교회의 신학에서는 모든 세상의 종교들은 땅의 소산에서 만들어진 인간의 작품이고 그 인간들이 구도과정에서 영향을 행사한 사탄과의 협업체이다.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유일하신 3위일체이시며 홀로 영광과 경배받으실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땅에서 생산된 종교들과 동거하거나 교류 또는 협업할 수가 없다. 물론 3.1운동 때처럼 사회활동상 어쩌다 교류할 수는 있으나 그건 세상일을 위한 일순간 행사일 뿐 교리나 본질에서의 터치는 불가능이요 접촉할 수 없다. 성경은 유일하게 창조주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절대권위이기 때문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사귀며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가 믿지 않는자와
어찌 상관하리요 하셨다 (고후6:14,15)
세상의 학문은 아무리 거창해도 유한하고 罪性의 지배를 받는 이성의 산물일 뿐이다. 칸트도 이성의 한계를 벗지 못한다. 철학 등의 세상학문의 한계를 성경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8)
고 말씀하신다.
안티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