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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 대한민국(73) |
작성자: 정문 |
조회: 17982 등록일: 2024-0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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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시대를 그 시대는 조국 근대화로 불렀다. 그 시대를 추동한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소원은 굶주리지 않는 가족이었다. 나는 못 배우고 못살지만 내 자식에게는 가난과 못 배운 서러움을 남겨 주지 않겠다는 그 결연한 의지가 산업화시대의 엔진이 되었다. 그 시대를 견인한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한 약소국의 지도자로서 전세기도 타지 못하고 일반 여객기의 일반석 한 켠에 앉아 미국으로 날라갔고 쿠테타 세력이라는 케네디의 비아냥과 냉대의 울분을 삭이며 다시 독일로 돈을 빌리러 갔다. 가족과 자식을 위해 수천미터의 지하 갱도에서 생사를 걸고 돈을 벌고 있는 함보른 탄광의 파독광부와 만났다.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은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 왔던가를 명심하며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이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연설장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곁에 있는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다. 박정희 대통령과 파독 광부의 꿈이 “후손을 위한 번영의 터전”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의 산업화는 닫힌 한반도에서 벗어나 세계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그러나 그시대 서구 세계는 흡사 제2의 볼세비키 혁명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좌경화로 몸살을 앓는 시대였다. 박정희의 5.16혁명 제1공약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는 서구세계의 시류에는 동떨어진 외침이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쓰면서 마지막 문장에 예언이 아닌 자신의 염원을 담았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Proletari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마르크스는 본인이 만든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을 통해 단결 된 노동자는 국가와 민족을 버릴 것으로 생각하고 희망했다. 그러나 1차대전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국가와 가족을 위해 총을 들고 싸웠다. 단결된 노동자는 국가를 소멸을 시킬 것이라 외친 마르크스는 절망했다. 고도로 산업화 된 선진국에서 반드시 공산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 하였지만 가장 뒤쳐진 농업국가 러시아에서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붉은 혁명은 소련 국경을 넘지 못했고, 영국과 프랑스, 미국과 같은 고도로 산업화 된 국가에 붉은 혁명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공산당을 만든 안토니오 그람시는 조국의 노동자들이 뭇솔리니를 환호하는 것에 절망한다. 그리고 공산당을 만든 것이 죄가 되어 뭇솔리니에게 20년형의 감옥형에 처해지게 된다. 감옥에서 안토니오 그람시는 고뇌했다. 공산혁명의 실패 원인을 미친 듯이 찾았다. 감옥에서 10년의 고뇌를 담은 ”옥중수고“를 탈고하며 옥사했다. 도합 3천여페이지의 3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이었다. 산업화 된 선진국은 부르조아가 견고한 시민사회를 구축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일거에 공산혁명으로 국가 질서를 무너뜨릴 수 없다. 러시아 같은 후진국은 일거에 기동전을 통해 공산혁명이 가능하지만 고도로 산업화 된 선진국은 그 사회를 지탱하는 시민사회의 견고한 참호가 있어 기동전으로 뚫고 들어 갈 수 없다. 따라서 기동전이 아닌 서서히 공산화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전으로로 조용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소위 진지전을 주문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진지구축을 위해 문화지배력을 가질 것을 제시한다. 문화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동의를 받은 지배권력으로서 문화를 장악하는 것을 문화 헤게모니(霸權, Hegemony)라고 했다. 문화는 구성원의 이념과 가치 위에 만들어진다. 따라서 대중의 일상이나 사회 속에 스며 들은 지배계급의 이념체계, 가치체계를 공산혁명을 위한 이념과 가치로 변화 시키라는 것이다. 헤게모니는 헤게몬(hegemon)이란 직위에서 유래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정벌 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모아 코린토스 동맹을 구성한다. 그 동맹 수장의 직위가 헤게몬이다. 즉 권좌, 지배자, 권력 등의 뜻을 가지지만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화 헤게모니는 공산혁명이 가능하게 하는 구성원의 공감력을 가지게 하는 추동력(推動力), 주도권(主導權), 지배권(支配權), 지배력(支配力) 등의 의미를 함의하는 것이다. 문화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대상을 문화지식인과 인텔리를 중심으로 서서히 도덕성을 앞세워 잠식시킬 것을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인공은 제외 된다. 도덕을 앞세운 문화 헤게모니를 평등이라는 하나의 지향점으로 끌고감으로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습득 된 평등을 외치게 되고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자들이 문화 주도권을 쥐게 된다는 것이다. 조용한 혁명은 냄비 속의 개구리가 삶아 지는 것처럼 서서히 문화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방법은 도덕성과 평등이고 그것을 실현할 도구로 가족, 교회, 교육, 사법, 언론, 섹스와 동성애 등을 삼을 것을 주문했다. 1. 지속적 사회변화로 혼란을 조성하라. 2. 학교와 교사의 권위를 약화시켜라. 3. 가족을 해체하라. 4. 어린이들에게 성교육 및 동성애 교육을 실시하라. 5. 교회를 해체하라. 6. 대량이주와 이민으로 민족정체성을 파괴하라. 7. 인종차별을 범죄로 규정하라. 8. 사법시스템을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라. 9. 복지정책을 강화해 국가나 기관보조금에 의존하는 사람이 늘게 하라. 10. 언론을 조종하고 대중매체 수준을 저하시켜라. 11. 과도한 음주를 홍보하라.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화진지전은 목하 대한민국에서도 진행 중이다. 교육계로 침투한 전교조, 수많은 좌익 시민단체, 참여연대, 종교계, 김일성 장학생, 우리법연구회, 언론계, 젠더와 동성애 등 대한민국은 머지 않아 공산화 기동전이 일어날 판이다. 대학가에 펴졌던 현장, 농활, 하방, 위장취업 등은 진지구축이었다. 안토니오 그람시와 비슷한 시대 게오르크 루카치도 공산혁명의 실패를 찾았다. 루카치는 상품화 된 노동자와 노동자의 소외를 앞세운다. 고도로 발달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상품처럼 사고 파는 대상으로 전락하여 소외를 당하게 된다. 소위 물화(物化 Reification, 독)Verdinglichung )로 일컬어진 상품으로 전락한 노동자는 인간의 노동력 또는 다른 능력도 상품화되고 인간관계조차 물건과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가 된고 노동자는 소외 된 계급으로 전락한다. 물화 된 노동자는 삶을 지배하는 일상성을 벗어나 참된 계급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공산혁명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일상성이란 ”나도 돈을 벌고 싶다“ ”나도 차를 사고 싶다“라는 의식에 매몰된 의식을 버리고 계급의식(階級意識)을 가지게 되고 마침내 공산혁명을 일으킨 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에게 공산혁명의 절실함을 심어주어 공산화가 가능하도록하는 의식화를 주문한 것이다. 공산주의 의식화를 통해 가진 신념은 그 어떤 신념보다 무섭다. 이러한 삐뚤어진 신념을 국부 이승만은 공산주의 훈련을 받은 동생은 더 이상 당신의 동생이 아니라고 경고했고,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아버지를 죽여 공산당원의 자질을 입증하는 살부회가 기록 되어 있다. 주체사상이 의식화 된 586 주사파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할 북괴의 비대칭 무기가 되었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1918년 헝가리 문화부장관이 된다. 헝가리의 공산 혁명이 실패하여 반년 정도 단명 했지만 헝가리를 대상으로 기독교와 서구문화가 노동자계급을 현혹시켜 전통적 막시즘 혁명의 추동력을 얻지 못했다는 반성으로 헝가리 공립학교에서 선정적이고 퇴폐한 성행위를 가르치는 급진적 성교육을 실시했다. 즉 사회의 권위 파괴를 위해 아이들의 성을 도구로 삼았다. 루카치의 이러한 노력은 학부모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사회를 성적으로 타락 시켜 막시즘을 포교하는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는다. 지금 국내에 불고 있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열풍도 막시즘 확산을 위한 진지구축이다. 막시즘의 실패 원인을 극복하려는 네오막시즘의 1세대 안토니오 그람시와 게오르크 루카치는 프랑크 푸르트 학파가 흡수 하여 네오막시즘은 뉴레프트로 다시 태어나며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프랑크프르트 학파를 만든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새로운 시대 공산혁명 전략을 선언한다. “우리는 폭력으로 혁명하지 않는다. 차츰 차츰 세대에서 세대로 바꿔 나간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경제 용어를 문화 용어로 바꾸어 공산혁명을 문화개혁 으로 포장한다. 혁명의 방법으로 비판이론(批判理論, critical theory)이 만들어진다. 기존의 문화와 사회구성요소를 비판하며 개혁주의를 표방하게 됨으로서 진보주의 (進步主義, Progressivism) 탈을 쓰게 된다. 비판을 통해 대중의 불만을 달래주며 현혹했지만 대안 없는 비판만 있었을 뿐이고 포장 된 막시즘의 가치는 그대로 내재 된다. 그들은 비판을 통해 대중의 이목을 받게 되면서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미국에 둥지를 틀고 기독교 문명의 심장인 미국을 비판하며 문화진지전을 시작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서구세계를 미국을 지탱하고 있는 신본주의적 세계관 파괴에 앞장선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앞세웠고 인간 이성을 억압하는 모든 것을 비판했다. 특히 기독교적 질서는 최우선하는 공격 대상이었다. 역사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라고 정의한다. 산업혁명이래 자본화 된 서구문명은 억압의 방법으로 인간의 이성을 도구화 시키면서 근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위기를 가져왔다며 억압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모든 것을 억압과 억압 받는자로 비판의 칼이 세워진다. 비판이론은 사회의 모든 관계를 억압으로 비판했다. 그들에게 남성은 억압 하는 존재로 여성은 억압 받는 존재로 이분화 시켰고 여성은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가정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성적 윤리의 토대가 된 교회는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타도의 대상이 되고, 백인은 흑인을 억압하는 다수가 되었으며, 자본, 인종, 종교, 권력 등 모든 것은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였다. 이들의 활동은 뉴레프트의 토대가 되며 끊임 없이 분화하며 좌익적 세계관을 구축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특히 여성과 남성의 문제의 차별 문제에 집중하면서 성혁명이라는 미명하에 성적타락을 가속화 시켰다. 남녀간의 성문제 뿐만 아니라 동성애, 소아성애 등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 이를 억압하는 것을 비판했다. 6.8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빌헬름 라이히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성적 억압을 비판하며 6.8운동과 글로벌 성혁명을 주도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네오막시즘에 도입하여 성혁명을 부르짖는다. 자신의 가정교사와 불륜을 저지르는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알려 어머니가 자살한 것을 본 빌헬름 라이히는 충격을 받게 된 후 아이들의 성해방 문제에 주목했다. 아이들의 성을 억압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국가 사회를 파시즘적인 시스템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청소년과 어린이들의 자유로운 성관계, 즉 소아때부터 자유로운 성을 즐길 것을 주장하며 나아가 억압의 상징인 가족과 가정은 사유재산을 상속하게 됨으로서 불평등을 지속하게 된 원인이며 이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성혁명을 통한 가정의 해체를 주장한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의 정력을 노동에 필요한 정력으로 바꾸어 착취한다고 했다. 즉 부르조아들은 노동자의 성적 쾌락을 착취하여 자신들의 성적쾌락을 누리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유지에 필요한 정력을 착취당하지 말고 저항하여야 하며 모든 성적 억압에서 벗어나자고 했다. 마르쿠제의 성해방론은 모든 남녀의 프리섹스를 넘어 소아성애 이외에도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런 성적 쾌락을 즐길 것을 주장한다. 즉 도착적 또는 변태적 성행위와 소아성애까지 즐겨야 한다고 했다. 마루쿠제는 소아기적 성을 억압하는 것은 문명 발달을 저해하는 것으로서 소아기의 성까지 해방을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가정부를 겁탈하여 혼외자를 낳은 것을 부인했고, 마르크스의 혁명 동지였던 엥겔스는 사실혼관계의 메리와 메리의 여동생과 동거를 했다. 메리가 죽자 여동생과 연인으로 지냈다. 레닌은 매독으로 죽었고, 스탈린은 14살의 어린소녀를 강간하여 첫부인을 얻었고, 두 번째 부인은 첫 번째 부인 사이에 출산한 친딸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은 부부싸움 중 친딸인 사실을 밝히게 되면서 두 번째 부인은 권총자살을 했다. 볼세비키 혁명에 가담하여 소련의 여성가족부(Zhenotdel) 장관이 된 알렉산더 콜론타이는 “러시아 혁명의 붉은 장미”로 불렸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공산혁명은 국가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해체 됨으로서 진정한 공산혁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혁명은 국가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해체한다. 결혼과 가족관계는 소유권에 바탕을 둔 억압적이고 이기적인 과거의 유물이다” 알렉산드러 콜론타이는 여성의 진정한 계급해방은 결혼, 가사, 육아에서 해방 된 “신여성”이 진정한 여성이며 여성은 목마를 때 물을 마시듯이 성적욕구를 풀기 위하여 언제든지 섹스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물한잔론 (a glass of water theory)” 이었다. 알렉산더 콜론타이는 여성부 장관에 오른 후 수 없는 젊은 청년을 불러다 성적탐닉에 빠져 살며 이혼 간소화, 낙태, 간통, 동성애, 근친상간을 합법화 시켰다. 그결과 소련은 수많은 고아가 양산 되었고, 성병의 만연, 동성애의 창궐로 이어지며 심각한 성적 타락에 빠져 레닌을 긴장시켰다. 견디다 못한 레닌은 알렉산더 콜론타이를 노르웨이 공사로 임명하여 사실상 추방했다. 페미니즘의 교주로 추앙 받는 시몬 느 보브아라는 교사로 근무하며 여제자를 유혹하여 동성애를 즐기고, 동성애를 즐긴 그 제자를 남편인 장 폴 사라트르에게 성상납 한다. 사라트르와 보브아르는 계약결혼을 하고 난잡하고 성생활을 이어갔다. 사라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며 6.25 사변을 북침이라고 기사까지 작성하며 공개적으로 북괴를 지지한 공산주의자였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극성을 부리는 페미니즘은 가정파괴와 가족해체로 연결되고 있다. 페미니즘 역시 막시즘에 토대를 두고 활동하고 있으며 “치마 입은 막시즘”이라고 불린다. 지금 페미니즘의 리더로 불리는 주디스 버틀러는 동성애자이며 자신의 저서 “젠더트러블”을 통해 소아성애와 근친상간까지 옹호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미셸 푸코는 소아성애 성매매, 동성애 등을 즐겼고, 결국 에이즈에 걸려 죽는다. 공산주의자들의 난잡하고 변태적이며 도착적인 성생활은 천편일률 지저분의 극치를 달린다. 더불어 민주당내에서 끊이지 않는 성폭행과 성추문, 5.86 주사파의 집단난교 등의 난잡함은 공산주의 속에 각인된 DNA 이며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자본주의 산업화 시대에 대한 반발을 앞세운 포스트모더니즘은 공허한 언어의 장난에 불과한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해체주의, 페미니즘까지 가세하며 막시즘 옹호에 나선다. 조선시대 형이상학의 정수를 보여 준 주리론과 주기론처럼 온갖 철학적 언어로 도배 하였지만 결론은 막시즘에 대한 향수 또는 옹호였다. 비판이론, 구조주의, 해체주의, 페미니즘 등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을 형성한 철학적 사조의 태생적 한계는 대안 없는 비판이다. 비가 새는 낡은 집을 비판하려면 집을 수리 한다던가 또는 해체 후 재건축 같은 대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은 무조건적인 비판을 통해 결국 집을 해체하게 만들어 집만 사라지는 결과만 가져왔다. 언젠가 전교조 조합원과 논쟁을 할 때 저들이 내세우는 논리 중 귀에 딱지가 않게 들었던 것이 “발전적 해체”였다. 교육현안에 대한 비판을 하고 기존 제도를 해체하려면 해체 후 대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대안은 없었다. 막시즘을 대안으로 삼으려는데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유학은 춘추전국시대 인간관계와 처세술을 가르치기 탄생한 학문일 뿐 세상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저 체세술에 불과한 유학을 조선은 세상의 이치를 가져다 붙이고 조상을 모셔와 신성(神性)을 부여하고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싸웠다. 따라서 주기론과 주리론은 유학의 관점에서 둘다 틀린 것이며 전통사회의 문제를 풀어 낼 수 있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 자본주의 근대에서 탈근대하겠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를 대신할 대안 세계를 제시하여야 했다. 그 대안을 찾지 못하자 결국 막시즘과 손을 잡았다. 또는 출발부터 막심즘을 내면화 시켰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막시즘을 감추기 위한 방법으로 진지전을 제시했고, 루카치는 계급의식을 제시했지만 막시즘은 대안이 될 수 없음은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유교가 세상이치를 규명하려 하고, 조상에게 신성(神性)을 부여 성리학을 만들었듯이 포스트모더니즘도 막시즘에 성리학처럼 무엇인가 가져다 붙여야 했다. 민족과 국가는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타도 되어 소멸의 대상이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막시즘에 국가와 민족, 여성과 섹스를 가져다 붙였다. 페미니즘과 정치적올바름(PC)이 만들어지고 해방신학과 종속이론이 나오고 주체사상과 마오이즘이 탄생했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변 되는 막시즘을 내면화한 시대적 사조는 유대기독교 문명에 도전했다. 유대기독교에 기초한 전통적 질서와 윤리는 굳건한 가족제도는 공산혁명을 막아내는 성벽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성혁명과 섹스, 쾌락을 가져다 윤리와 가족을 흔들어 버린다. 성해방과 섹스, 마약과 쾌락은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는 도구였다. 가족을 파괴는 폴리아모리와 같은 일처다부제, 일부다처제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성적타락은 곧 기독교 문명의 해체였다. 마오쩌둥의 주치의였던 리즈수이가 쓴 "마오의 사생활"에는 마오쩌둥이 단 한번도 자신의 성기가 씻지 않은 것이 나온다. 리즈수이는 위생 문제로 성기를 씻을 것을 권했다. 마오쩌둥은 말했다. "나는 여자의 몸 안에서 씻고 있다!" 리즈수이는 여자를 끼고 놀면서 희롱하는 것이 마오쩌둥의 유일한 취미였다고 할 정도로 밤마다 여자를 바꿔가며 난잡한 성생활을 즐겼다. 마오쩌둥은 성병의 일종인 '트리코모나스 질염' 을 앓았다. 마오쩌둥과 성관계를 맺은 여자들은 모두 성병에 걸렸다. 참 유별나게 성기를 씻은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은 늙어 어린 미소년까지 침실로 불러들였다. 동성애까지 즐겼던 것 같다. 1960년대초 기근이 중공을 뒤 덮으며 군중은 굶주림 앞에 한탄했다. "중국은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으로 빚을 많이 졌고, 소련이 빚독촉을 해서 굶게 되었다.“ 중공은 6.25 사변에 불법 참전하며 소련으로부터 대량으로 무기를 구매하였으나 재정적 곤란을 격어 갚지 못하면서 막대한 외채를 지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낙후 된 봉건세상을 벗어나기 위하여 사회간접시설 건설을 하며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도입했다. 소련의 원조와 차관 없이는 국가 운영이 어려웠다.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잡은 후르시초프와 대립각을 세운 마오쩌둥은 급기야 후르시초프를 무시한다. 소련의 원조로 근근이 국가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마오쩌둥을 괘씸하게 여긴 후르시초프는 채무상환을 요구하며 중공경제를 압박했다.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는 기술원조와 중공에 파견한 전문가를 철수 시킨다. 후르시초프의 압박에 마오쩌둥은 빚을 갚겠다며 객기를 부렸다. “함께 국난을 극복하자.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내자 (공부국난 유전출전 유력출력(有錢出錢 共赴國難 有力出力)" 마오쩌둥은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후르시초프의 한마디에 자극을 받는다. ”우린 소비에트적 속도로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다!“ 후르시초프를 넘어 공산세계의 리더를 꿈꾼 마오쩌둥은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니키타 흐루쇼프 동지는 '소련이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15년 안으로 우리 또한 영국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시작 된 대약진운동은 홈메이드제철소로 대표되는 토법고로와 마오쩌둥 농법을 대표하는 참새 잡이는 6천만명을 굶겨 죽이고 잡아다 죽였다.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실패한 경제정책으로 남는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사회혼란과 불만을 가중시켰고 권력증 조차 등을 돌리자 권좌에서 사퇴한다. 마오쩌둥은 권력을 되찾을 묘책으로 홍위병을 동원한다. "부르주아와 자본주의 세력들이 다시 사회로 침투하고 있는데, 이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청년들이 바로잡아야 한다." 베이징에 모인 1100만의 홍위병들은 마오쩌둥 어록이 적힌 빨간색 수첩을 들고 봉기했다 “혁명에는 죄 없고, 반란에는 이유 있다(命無罪、造反有理)” 자신의 어록이 정리 된 홍위병의 소홍서(小紅書)에 마오쩌둥은 혁명교리(革命敎理)도 적어 주었다.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枪杆子里面出政权)”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통해 세계 공산화가 완성 될 때까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계속 되어야 함을 설파했다. 마오쩌둥은 잊혀진 영구혁명론을 예리한 칼로 다듬에 홍위병 한 손에 쥐어 주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타도되었지만, 이들은 아직도 다른 계급을 착취하던 낡은 이념, 문화, 풍속, 관습을 이용하여 대중을 타락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이것의 반대로 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이념면에서 당면의 모든 부르주아 계급의 도전에 응전해야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이념, 문화, 관습, 습관을 이용하여 모든 사회의 정신적 시야를 바꾸어야 한다” 홍위병은 피로서 마오쩌둥에 보답할 것을 다짐한다. “신선한 피와 생명으로 마오쩌둥 주석을 보위하자!” 1,100만명의 홍위병이 몰린 베이징부터 피의 지옥이 되었다. 홍위병에게는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오쩌둥을 위협할 그 어떤 잠재적 요인을 용서하지 않았다. "경직된 관료", "주자파", "숨어있는 우파", "장제스의 똘마니" “이기주의자” 등 온갖 인민재판법이 만들어졌다. 선혈 낭자한 베이징의 공안 책임자는 두려움에 떨었다. “누가 맞아서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혁명동지 팽덕화와 류사오치, 등소평, 임표, 시진핑의 아버지가 숙청 당했고 2,000만이 죽어 나갔다. 문화재와 무형문화재, 전통은 반혁명성, 상인(商人)성의 죄명이 붙어 파괴 되었다. 고급 만연필을 가졌던 어느 학교 교장은 부르조아 잔재가 남아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교사와 교수는 학생들에게 타파 되어야 할 낡은 것이 되어 구타를 당하고 처형 되었으며 살아남았어도 체포되고 구금되었으며 공개적으로 끌려 다니며 수모를 당해야 했다. 증오가 국가 동력이 그 시대 공개 가해와 집단린치가 일상이었고 토막난 시체가 거리에 굴러 다녔다. 참수, 집단구타 살해, 생매장, 돌로찍어 죽이기, 폭탄으로 폭파까지 시키는 등 온갖 다양한 살인방법이 동원 되었다. 강물에 시체가 떠다녔고 인육까지 먹는 동족포식까지 벌어졌다. 광기의 살육을 두고 마오쩌둥은 말했다.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문화대혁명 철저하게 가족과 가정은 파괴 되었다.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형제가 형제를 고발하며 부모와 자식은 서로 믿을 수 없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손자가 할아버지를 고발해 처형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세뇌당한 아디들은 집에 와서 “지식인들이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기 때문에 타도해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떠들었고 부모는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배척을 당했다. 중국의 전통적 가족은 해체 되었고 마오쩌둥에게 중국인민의 부모와 가족 보다 높은 신성(神性)이 부여 되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 시대 1960년대와 70년대 서구사회는 유대기독교문명에 바탕을 둔 전통질서와 가족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심각한 공격을 받고 무너지고 있었다. 가정의 파괴는 다음 세대를 이어갈 동력원의 상실을 의미했다. 따라서 미래를 보고 달려야 할 박정희 대통령은 서구세계에 불어닥친 미래를 지우고 현세적 쾌락이 우선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이 한반도에 유입 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숙제도 부여 받았다. 1967년 제2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며 박정희 대통령은 식량 자급화와 산림 녹화, 화학·철강·기계공업의 건설에 의한 산업의 고도화, 10억 달러의 수출 달성 등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의 박차를 가하며 다음세대를 위한 산업화임을 선언한다.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 함보른 광산에서 파독광부와 다짐한 후손을 위한 번영의 터전이 곧 산업화 입을 선언한 것이다. 산업화 시대 그 시대를 헤치며 살아 온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꿈은 가난의 대물림, 무지의 대물림을 끊어내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또한 그가 일군 모든 것은 결단코 박정희 살아 생전 누릴 수 없는 미래 번영을 위한 투쟁이었다. 새마을운동, 산림녹화, 중화학공업, 교육개혁, 사회간접자본 투자, 산업기술투자, 치산치수, 국방사업투자 등 온통 돈이 되지 않는 사업들 뿐이었다. 후손을 위한 번영의 터전을 만들겠다는 뜻과 의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며 그 시대를 국민과 같이 호홉했다.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흘려 이룩하는 모든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내일의 세대 앞에 물려주어 길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고자 함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극성으로 세계가 몸살을 앓았고, 좌경화의 길이 가속 되며 가족의 해체로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고, 가진자에 대한 증오가 넘쳤다. 세계에 독버섯처럼 퍼진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늘만 살겠다는 퇴폐주의 물결로 이었졌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의 잠을 깨워 노동으로 싸우게 했다. “시대와 환경의 변천에 관계 없이 노동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생활 무기이다” 6.25 사변의 전쟁의 포화가 멈춘지 불과 몇 년 후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위해 북으로 가자는 국민이 넘처날 때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한심한 민도를 끌어 안고 달려야만 했다. 붓잡이의 게으른 나라에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일하는 민족으로 탈바꿈했다. 산업화 시대는 가족을 위한 자식을 위한 투쟁의 시대였다. “내 자식만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라는 가족에 대한 가치는 산업화를 견인하는 가장 큰 추동력이었다. 밤을 세워 일을 하면서 가족의 내일을 생각하며 행복하였던 시대였다. 막시즘은 얼굴을 바꾸고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서구세계를 좌경화로 몰아 넣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시대는 내 자식은 굶주리지 않게 하겠다는 국민의 그 결기를 하나로 모았던 시대였다.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언 24장33절~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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