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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 대한민국(72) |
작성자: 정문 |
조회: 20224 등록일: 2024-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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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바다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바다로 나가고 들어오는 모든 것은 국가에 대한 도전이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바다로 나아가는 것을 막았고, 바다에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바닷길을 막은 공도정책은 조선건국과 시작을 같이 했고 나라가 망하던 고종 때 사라졌다. 1882년 8월 23일 조선과 청나라는 최악의 불평등 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는다. 조선과 중국 상인의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조약이다. 중국상인들은 배를 타고 넘어와 치외법권까지 보장 받아 온갖 행패를 부렸다. 바다까지 빼앗겨 중국어선은 조선 연안까지 몰려와 물고기를 잡아 갔다. 상권은 왕성방 천하가 되어 돈을 긁어 모았다. 비단장수 왕서방은 우리나라 화교의 1세대가 된다. 조선은 상품을 팔고 싶어도 중국으로 실고 갈 배 한 척이 없었다. 바닷길을 만들 능력은 조선에 없었다. 유럽의 주식은 육식이다. 후추는 고기 냄새를 잡고 풍미를 잡는데 최고의 향신료였다. 후추는 고기의 저장성도 높였다. 겨울철 가축에게 먹일 풀이 사라짐으로서 겨울이 오기 전 돼지를 도축하여 햄과 소시지를 만들어 겨울을 났다. 그러나 소금만 넣어 소시지를 만들면 심한 누린네가 났고 보존성도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후추를 넣으면 누린네를 잡아 주어 풍미와 맛이 월등하게 좋아졌고 게다가 항균효과까지 있어 장기간 보관이 가능했다. 후추는 맛있는 음식을 먹게도 하였지만 보존성을 높여주어 겨울을 이겨내게 하는 생존의 수단이기도 했다.
후추는 유럽에서 생산이 되지 않았다. 대양 멀리 있는 인도에서 후추를 직접 가져올 수 없었다. 인도에서 육로를 타고 중동을 지나 지중해를 통해 수입하고 있어 금값에 거래 되었다. 후추무역을 장악한 베네치아는 번영을 구가 했다. 1453년 5월 29일 술탄 메메드 2세는 첨단무기 대포를 앞세워 천년 요새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다. 천년의 교회 성소피아 성당을 무슬림 모스크로 바뀌었다, 천년제국 비잔틴은 그렇게 멸망했다. 그것은 비단 천년제국의 멸망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의 거대한 변혁을 예고 하고 있었다. 오스만 트루크 군사들은 부유한 자들의 저택을 약탈했고, 약탈과 강간이 거리를 휩쓸었다. 피가 흐르는 거리를 지나 메메드는 900년 된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들어가 알라에게 승리의 기도를 했다. 문명의 변혁도 의미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교역로의 막힘을 의미했다. 육로를 통해 지중해를 통해 들어오던 후추 무역로를 차지한 오스만제국은 후추에 파괴적인 관세를 부과했다. 동방무역을 틀어 쥔 베네치아 상인은 무슬림에게 머리를 숙여야 했다. 돈을 위해서 안토니오의 가슴살 1킬로그램을 도려내려 했던 베네치아 상인 샤일록은 정교분리를 앞세워 무슬림과 무역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후추의 가격은 100배, 1,000배가 뛰었다. 후추는 부의 상징이 되었다. 권력층과 부자는 식탁 위에 후추통을 올려 놓고 부를 과시했다. 모든 서양식 레스토랑에 식탁 위에 후추통이 놓이는 전통은 그렇게 생겨났다. 후추로드를 빼앗긴 유럽은 인도와 직접 무역을 원했다. 같은 무게의 금값에 비견되는 후추를 인도에서 가져올 수 있다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바다는 그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유럽의 변방 가난한 포루투갈은 돈을 벌고 싶었다. 인도로 가기 위하여 엔히크 왕자는 수 없이 배를 띄웠다. 결국 배를 띄운지 80년 만에 바스코 다가마는 희망봉을 발견하고 남인도에 이른다. 그렇게 시작 된 대항해시대는 세계를 바닷길을 통해 촘촘한 네크워크로 묶었다. 포루투갈, 스페인은 번갈아 세계의 무역을 호령했고, 식민지를 개척했다. 후추를 구하러 간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다. 서인도로 착각한 콜럼버스는 원주민을 인디안(Indian)이라 불렀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서인도에 후추(peper)는 없었다. 콜럼버스는 고추를 발견했다. 막대한 투자를 받아 서인도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후추 대신 고추를 배에 실어 유럽에 가져왔다. 콜럼버스는 거짓말을 했다. 고추를 레드페퍼(redpeper), 즉 빨간후추라고 속였다. 고추가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있는 작물 중의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척박하고 가난한 땅 네덜란드는 배가 고팠다. 네덜란드 해안으로 몰려드는 청어를 먹고 살았다. 넘쳐나는 청어를 이웃나라에 팔고 싶었으나 운송 도중 썩었다. 그들은 청어를 좀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머리와 내장을 제거하고 염장해서 팔았다. 염장 청어를 더 많이 팔아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염장 청어가 상하기 전에 유럽 각국에 도착 할 수 있는 싸고 가볍고 빠른 배가 필요했다. 그들은 마침내 플루이트선을 개발하여 절반의 비용으로 두배나 빠른 항해를 할 수 있게 된다. 플루이트선으로 대양으로 나온 네덜란드는 1년 걸리는 인도항로를 5~6개월이면 다녀왔고, 바닷길의 패자가 되며 바다의 마부가 된다. 바닷길을 두고 3차례의 전쟁 끝에 네덜란드로부터 해상권을 빼앗은 영국은 바다를 지배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일본의 항공모함에 진주만이 쑥대밭이 된 미국은 일본의 항공모함을 그대로 베꼈다. 마침내 미국은 침몰 시킬 수 없는 항모전단을 만들어 세계의 자유무역과 항행의 자유를 지키며 패권국이 되었다. 바다의 지배력은 곧 그 나라의 국력이며, 바다의 영역은 또 하나의 그 나라 영토가 되었다. 문명은 길을 따라 만들어 지고 문명을 따라 전파된다. 진시황은 만리장성 쌓았다. 같은시대 로마는 도로를 만들었다. 아피아 가도로 시작된 로마의 도로 구축은 지중해 전역을 연결하며 항구와 연결했고 지중해를 지배했다. 그렇게 닦은 도로가 8만km가 넘었다.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로마는 20만 리의 도로를 만들었다. 탄유쿠트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하고, 길을 닦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는 반드시 흥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는 말했다. “로마는 호수와 같다. 로마 이전의 모든 역사는 로마로 흘러 들어 갔고, 또 모든 근대사는 로마라는 호수로부터 흘러나왔다.” 구한말 조선을 여행한 이사벨라 비숖 여사는 조선의 길을 남기고 있다. “서울 근교에 있는 산, 해안선, 무역항 그리고 주요 도로의 황폐함은 조선에 대한 매우 좋지 못한 생각을 갖게 한다. 도로는 매우 열악하며 심지어 도심지의 대로도 승마장의 트랙보다 좋은 것이 없다. 비틀어진 소로의 대부분은 짐 실은 두 마리 소가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으며 한 사람이 짐을 실은 황소를 겨우 끌고 갈 수 있을 정도로 더욱 좁아진다.” 고구려 벽화에는 수레가 그려져 있다. 아득한 옛날인 삼국 시대에도 수레를 사용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는 수레가 사라졌다. 실학자 박제가는 수레 조차 다니지 못하는 조선의 참상을 개탄하고 있다. “조선이란 나라는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지를 못해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진다” 유교 탈레반 조선 개화를 위해 불꽃같이 살다가 김옥균은 수신사 박영효를 수행하며 일본을 둘러보고 문명개화의 방법을 찾는다. 김옥균의 유일한 저서 “치도약론(治道略論)” 이었다. 조선에 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시대는 문명의 길을 놓던 시대였다. 그 길은 세계로 나아가는 바닷길과 연결 되었고 전세계를 항해하는 30만톤급 이상의 화물선 열대중 8대 또는 9대가 메이드인 코리아이다. 지구의 바다 위에 떠있는 화물선의 6~7대는 대한민국이 건조한 화물선이다. 바다에 떠있는 화물선 열 척 중 1척은 대한민국에서 출발하거나 종착지가 대한민국이다. 박정희는 우리가 살길을 찾고자 한반도 질곡의 역사에서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 주류문명의 중심에 서고자 했다. 그래서 대양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닷길과 연결 될 육로가 없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 하려는 이유였다. 1967년 4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은 제6대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했다. 그러자 모든 야당 정치인들은 일제히 격하게 반대를 외쳤다. 외환위기나 만든 김영삼, 빨치산 박현채의 대중경제론을 훔쳐다 읊조린 김대중의 서푼어치도 되지 못하는 지적능력으로 고속도로가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고속도로 공사현장에 드러 누웠다. “고속도로 만들어봐야 달릴 차가 없다. 부유층을 위한 호화시설이 될 뿐이다, 우량농지 훼손이 웬 말이냐, 쌀도 모자라는데 웬 고속도로냐, 부유층 전유물 고속도로 건설 끝까지 결사반대한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알량한 지력(知力)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의 경제학자들 조차 경부고속도로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모든 경제학자들은 일제히 반대 했다. 서울대 상대 교수 전원이 반대성명을 냈다. 변형윤 교수는 무식의 사자후를 토했다. “자가용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농토를 가로질러 길을 낸단 말인가. 기어이 길을 닦아놓으면 소수의 부자가 그들의 젊은 처첩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을 놀러 다니는 유람로가 되지 않겠는가.” 문명의 길 경부고속도로를 첩과 같이 드라이브 하는 길로 인식한 그 당시의 학자 나부랭이와 정치판의 멍청이들은 박정희를 이해할 능력이나 지적수준이 되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참고 참으며 갈 길을 갔다. "반드시 경부고속도로 양 옆으로 50m는 남겨두라 건물 신축을 금지해라 미래엔 더 확장을 해야 할 것이다." 4차선 경부고속도로는 10차선 경부고속도로가 된 지금에도 여전히 그 당시의 수준의 무식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여전히 암흑시대 조선과 같이 길을 틀어 막고 “우리민족끼리”를 뇌까리며 국제무역이라는 의미 조차 이해 하지 못한다. 일제 시대 일본에 고가의 쌀을 수출하고 만주로부터 싼 잡곡을 싸게 수입하여 먹었다. 일제 시대 쌀은 부유층만 먹을 수 있는 고가품이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쌀을 먹게 된 것이 1970년대 이다. 일제 시대 쌀과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쌀을 생산하여 고가에 일본으로 수출한 후 만주에서 값싼 잡곡을 들여다 먹었다. 역사 이래 가장 많이 인구가 증가한 시대가 일제 시대 이다.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조생종 벼를 개량종으로 바꾸게 하고, 저수지와 수로 등을 정비하여 만성적인 쌀부족을 해결하고자 했다. 우리나라 농업용 저수지 중 상당수가 일제 강점기 만들어졌다. 쌀 생산량은 급격하게 늘었다. 조선쌀이 일본으로 수출 되면서 일본의 쌀값이 떨어져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쌀수입 반대에 나섰고, 만주에서 조선으로 들여오는 잡곡에 관세를 붙이라고 난리를 쳤다. 그 시대 쌀집 배달부 정주영은 훗날 자동차를 만들었고, 쌀장사를 했던 이병철은 반도체를 만들었다. 무역은 단순한 것이다. 내가 잘 만들고 많은 것 가져다 팔아 못 만드는 것 부족한 것을 사오는 것이다. 쌀 한 되를 팔아 잡곡 한 말을 사다 배고픔을 채우는 것 그것이 무역이다. 일본 쌀수출의 전진기지였던 군산항은 그 당시 쌀수출로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부자가 된 그 때 그 사람의 후손들이 난리 친다. 쌀 수출항 군산항은 “쌀 수탈의 전진기지”가 된다. 과거를 잊지 말자며 역사를 왜곡하며 역사 유적지로 기리겠다며 난리다. 저들의 논리라면 좋은차 가지지 못한 국민을 위하여 당장 현대 자동차의 수출을 막아야 할 판이다. 쌀수출을 쌀수탈로 이해하는 무식이 지배하는 시대 박정희는 친일파의 오명을 쓰고 무식한 군인이라는 멍에를 썼다. 이승만과 박정희 수준의 지적능력과 혜안을 갖춘 역대 대통령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솔직하게 비교조차 되지 않는 돌대가리 수준들이었다. 하나님은 한반도에 박정희를 예비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여호수아 1장5절)” 5.16혁명 당시 장교들은 대학을 졸업했고 유학을 갔다 온 인재들이었다. 군인은 그 시대 충분히 대한민국을 선도할 엘리트 그룹이었다. 박정희는 탁월했다. 남덕우 총리는 서강대학교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엄청난 비판을 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남덕우 총리를 재무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임명장을 받고 나오는 남덕우 장관을 향해 박정희 대통령은 농담을 던진다.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 지력(知力)이 없다면 자신감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농담이었다. 당대의 엘리트 남덕우 장관에게 그가 날세워 비판했던 문제들 “나도 다 알고 있는 문제야”라고 한마디 한 것이다. 어느날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러 울산에 조선소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정주영은 사색이 되어 대답했다. “조선소가 단순히 소형 고깃배도 아니고 수십만톤이나 되는 유조선 등을 만들어야 하는 조선소 건립은 불가능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즉석에서 정주영을 혼냈다. “요즘 국내 내노라 하는 기업들이 마치 자신들이 노력해서 그렇게 된 줄 알고 착각하고 국아와 민족의 장래는 생각지 않고 자신들의 배만 채우려 하는 경향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있소” 정주영 회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차관도입에 대한 보증은 국가가 해줄 것이며, 목숨을 걸고 조선소를 건립을 지시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을 만나기 전 조선산업의 성공 가능성을 미리부터 내다 보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조선산업에 대한 밑그림은 1961년 혁명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케네디를 만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미한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선박검사관으로 근무하며 미국에 체류 중인 신동식 박사를 불렀다. “임자! 조국의 조선업 발전을 위해 나 하고 함께 일해 봅시다. 한국으로 갑시다”
신동식 박사가 김포공항에 내리자 비서실에서 나와 청와대로 끌고 갔다. 신동식 박사는 박정희 경제사단의 초대 경제수석비서관이 되어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입안에 참여하고, 옥포조선소 건립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조선업 발전을 견인했다. 신동식 박사가 옥포조선소 건립 후 가동에 들어가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을 불러 조선소 건립을 명령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때를 만들고 있었고 무르익자 정주영에게 조선소 건립을 주문한 것이다. 국부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독립정신을 저술하고 6대 실천강령을 제시한다. 그 첫 번째 실천강령이 각국과 통상 즉. 무역의 진흥이었다. “천하 만국에 통하지 않는 나라는 없으며 만국 만민에 깨이지 못할 자는 없다. 통상하는 것이 피차에 이익됨을 깨달아야 한다. 이웃의 범위가 넓을 수록 내가 쓸 수 있는 물건들은 더욱 정교해지고 풍족해지며, 내가 만든 물건들도 귀해지고 널리 쓰이게 될 것이고 사람들의 견문과 지식도 더욱 넓어질 것이다. 통상하는 것이 지금 세상에선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근본이다. 외국인이 오는 것은 본래 나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고 피차에 다 이롭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외국인을 원수같이 여기는 것이 제일 위태한 것이니 이는 어두운 백성들이 항상 까닭 없이 남을 미워하는 폐단이다” 이승만은 통상은 단순한 물품거래를 의미하지 않았다. 통상은 곧 문명과의 교류임을 가르쳤다. 대한민국은 가난했다. 인력도 수출품이 되었다. 광부는 독일의 지하갱도에서 목숨을 걸었고, 갱도사고로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시체를 딱은 간호사, 40도가 넘는 열사의 땅 아라비아 반도에서 땀을 흘렸다. 그들이 바다를 건넌 것은 낡은 유교질서와 싸움이었고 가난의 남루한 때와 투쟁이었다. 가난한 나라 대통령 박정희는 독일에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다짐하며 광부와 함께 울었다. 1964년 2월 10일 일본 도쿄 항구에서 홍콩국적의 일본계 화물선 룽화(龍華)호가 출항했다. 화물선은 당장 폐선을 시켜야 할 수준이었다. 녹이 슬다 못해 선체는 곳곳에 구멍이 났고 바닷물로부터 녹을 막을 페인트는 다 벗겨져 있었다. 너무 낡아 일본인 선원 누구도 승선을 하지 않았다. 화물을 실은 유령선은 출항했다. 선장 김기현과 기관장 이상래를 비롯해 선원 28명은 전원 한국인이었다. 출항하는 화물선을 바라보며 선박회사 직원은 중얼 거렸다. "못 돌아올지도 몰라." 두 달 후 도쿄항에 룽화호가 귀항 하고 있다는 무전이 왔다. 폐선직전의 룽화호를 보낸 항만관계자는 깜짝 놀랐다. 선원들은 화물 운송을 하며 바다 위에서 배를 수리했다. 거친 파도 위에서 배에 로프를 걸고 죽음과 싸우며 망치로 녹을 떨어내고 페인트를 칠하며 부서진 배의 구멍을 막았으며, 선실은 말끔하게 수리하였다. 회항을 장담하지 못하던 유령선을 부활 시켰다. 그들은 유령선을 보물선으로 만든 절박한 사정을 이야기 했다. "우리가 잘한다는 걸 보여줘야 또 취직할 수 있었으니까. 목숨을 걸고 배를 지켜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달러를 벌고 싶었다. 그러나 자존심도 지키고 싶었다. 일거리를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승선을 하지 않는 폐선을 운항하며 목숨을 걸고 배를 수리한 것은 자존심이었다. 가나한 나라 가나한 국민이지만 우리는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자존심이었다. 그 자존심으로 일군 산업화 이다. 바다에 목숨을 걸고서 달러를 벌어온 사내들, 우리는 이들을 '송출선원(送出船員)'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외국 상선의 선원으로 달러를 벌어들였다. 일본선박의 항해사로 일하다 어엿한 해운사의 사장이 된 이경재 사장은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외국회사들이 여러 나라 선원들에게 똑같은 배를 주고 경쟁을 시켜서 일주일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낮은 수심 지역을 통과하면서 얼마나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는지가 가장 큰 경쟁포인트였다. 악으로 일한 한국 선원들이 대부분 1위를 했다” 화물선을 집어 삼킬듯한 태풍과 싸우며, 45도를 넘나드는 기관실에서 옷을 벗어 몇 번씩 땀을 짜냈던 한국인 선원은 대양을 누볐다. 한국인 선원의 근면함과 성실함, 오기와 자존심은 대양을 누비며 달러를 벌었다. 송출선원들이 벌어들인 돈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 보다 몇배에 이르는 달러를 벌어들였다. 송출선원은 한 때 4만 5천명에 이르렀고 그들은 세계와 대한민국을 연결하고 호홉하며 대한민국의 변혁을 일구었다. 한반도 문명사의 대전환은 그들의 땀방울 위에 건설 되었다. 그들은 또다시 바다로 나아가 원양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아 대한민국을 10대 원양어업 국가로 만들었다. 치열하게 개척 된 산업화의 길이었다, 혈혈단신 몸뚱이 하나로 세계로 나아간 광부와 간호사, 중동 근로자, 송출선원, 원양어업어부들 그들은 세계와 체감하며 산업화의 길을 놓은 진정한 영웅들이었다. 대한민국은 인구대비 가장 많은 국민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나라가 되었고 가장 많은 사람이 무역을 위하여 세계를 누비고 있다. 박정희는 길에 미쳤다. 직접 작사 작곡한 새마을 노래 시작이 “마을 길도 넓히고”였다. 대양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야 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는 부산으로 이어졌고 비로서 대한민국은 대양으로 나아갈 바닷길을 얻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출 밖에는 길이 없었다. 세계 6대 무역대국 대한민국의 시작은 초라했다. 팔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팔았다. 어느 해에는 애완용 다람쥐가 10대 수출품이었고, 오줌을 받아 팔았으며,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다. 그 처절한 수출의 역사를 경부고속도로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본인 스스로가 지독한 가난과 배고품에 시달리며 식민지에서 살아야 했던 박정희는 진정한 주권을 국민에게 주고 싶었다. “한나라의 주권과 그 나라 국민의 인권은 빈곤의 탈피로부터 시작된다” 굶주림을 벗어나는 길은 산업화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부자나라가 민주화를 성취한 경우는 있어도 가난한 나라가 민주화를 이룬 역사는 인류사에 한번도 없었다. 세계로 이어진 산업화의 길 그것은 단순한 가난과 굶주림의 탈피가 아니었다. 로마의 정복 전쟁은 20만리 길을 만들었다. 바울의 아시아 전도를 막고 마케도니아로 보낸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도 바울을 20만리의 로마길을 따라 따라 복음을 전했다. 황금에 대한 탐욕은 대항해시대를 낳았고 대항해시대는 세계를 바닷길로 연결시켰다. 그길을 따라 다시 복음이 전해졌다. 제국주의를 낳은 대항해시대의 끝은 개신교의 나라 자유민주의 나라 미국의 건국이었다. 대한민국 복음화 중심에 선 미국은 마침내 한반도에 기독교 문명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는 한반도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육로와 바닷길을 개척했다. 한국인은 그 길을 땀방울로 포장했다. 산업화는 대한민국의 복음화를 가속시켰고 복음화는 산업화의 추진력이 되었다. 빌리그레이엄 목사는 3일동안 여의도 5.16 광장에 350만명을 불러 모았다. 그 다음해 김준곤 목사는 산업화의 불길을 부여잡고 외쳤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산업화의 불길과 복음이 폭발했다. 김준곤 목사의 외침은 또 다시 여의도 5.16광장에 650만명을 불러 들었다. 10만의 선교사를 세계로 보낼 것을 결의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 쑥섬에서 순교의 피를 뿌린 100년 후 산업화의 길을 따라 세계 복음화의 소명을 받은 선교사들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되어 세계로 나갔다.
기독교 문명을 전파하는 대한민국은 기독교 문명의 중심에 있음을 산업화 시대에 선언했다. 미국에 이은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대국이 되었고 인구대비 선교사는 미국을 압도한다. 세계 3대 칼빈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는 1898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칼빈의 근본사상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식되어, 우리의 발전을 자꾸 서쪽으로 옮겼고, 이제 태평양 해변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곳으로 가려고 경건히 기다리고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하나님 뜻을 프린스턴에서 선포한지 10년 후 1908년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에 도착했다. 그렇게 시작 된 한반도의 새로운 문명 도래는 세계 5대 해양대국, 세계 5대 공업국가, 세계 1위의 조선대국, 세계 6대 무역대국, 세계 10대 원양어업국이 되었고 그것은 산업화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건설 되고 세계복음화도 달렸다.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유일한 국가, 유사 이래 가장 빠른 경제성장과 복음화 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국부 이승만께서 서거할 때 100만의 그리스도인은 산업화 시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1,000만이 되어 10배 성장을 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장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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