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일본의 35년 식민지배에 대한 원한을 동력으로 살아 가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반일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일본에서 몇 개의 부품만 들어오지 않으면 스마트폰 생산이 중단 되는 현실은 일본 없이 사는 것도 녹록하지 않다.
일본은 6.25 사변의 군수기지가 되어 막대한 돈을 벌어 부흥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것이 배가 아파 죽는 한국인이 많다. 일본에서 군수물자가 조달이 되지 않았으면 6.25 사변 극복은 불가능 했다, 차라리 일본이 돈을 버는 것보다 북돼지3형제의 폭정에 신음하며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만일, 일본이 군수기지가 되지 않았으면 미군을 비롯한 UN군은 전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미국도 6.25 사변의 장기화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며 대통령까지 낙선 했는데 일본이 군수기지 역할을 하지 않았을 때 초래 될 위기는 생각하지 않고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일본이라면 이부터 갈아 부치는 대단한 애국자들은 6.25 사변을 일으켜 일본 부흥의 발판을 만들어 준 빨갱이 수괴 김일성부터 부관참시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일제시대를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이다. 바른 소리 하면 친일파로 몰리고 거짓말을 하면 역사적 사실을 속이는 양심불량자가 되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를 통해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계산 할 줄 아는 냉정한 이성은 역사의 프리즘을 옳게 바라 보게 만든다..
일제는 북한 압록강에 1937년부터 1944년까지 막대한 투자를 하여 수풍댐을 완공한다. 생산 된 전력을 한반도와 만주국에 공급하여 공업화를 하기 위한 목적이다. 물론 중국 대륙 진출을 위한 군수기지에 공급할 전력의 확보도 있었다.
만주국이 건설 되는 해 착공한 수풍댐은 당시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댐이었고 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패망기 완공 되어 돈만 들이고 아무것도 건진 것 없이 쫒겨 났다. 그 당시 수풍댐의 발전용량은 남북한 전역에 공급하여 사용할 수 있는 막대한 전력량이었다.
재미 있는 것은 그토록 반일에 목숨을 걸고 있는 북한이 일제가 건설한 수풍댐을 국가휘장의 문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풍댐은 6.25 사변 전 북괴의 공업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수풍댐의 전력이 바탕이 된 공업화는 북괴가 자체적으로 다발총을 생산하여 남침에 사용할 정도로 공업화가 심화 되었다. 남한 보다 앞선 공업화는 6.25 남침의 교만도 불러왔다. 6.25 사변을 북괴는 남조선해방전쟁이 부른다. 그 해방을 빙자한 사변을 일으키킬수 있도록 기여 하여 국가휘장의 문향으로 사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도 수풍댐은 북한 전력의 3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일제가 패망한 후 이 땅을 물러가면서 남기고 간 수 많은 기업은 현재 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재벌로 성장했다. 모리나가 식품이 지금의 제일제당으로, 코레카와 제철소가 동국제강으로, 조선유지는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으며 하이트맥주, SK그룹, 해태제과, 동양시멘트, 신세계 백화점, 대한통운, 벽산그룹, 한진그룹 등 그 외 수많은 기업과 재벌이 일제가 남기고 간 산업시설이 모태가 되어 오늘의 재벌이 되었다. 심지어 공기업인 한국주택공사와 한국전력까지 일본이 남긴 유산이다.
산업화를 이끈 이병철과 정주영은 일제시대 장사와 사업을 하며 잔뼈가 굵었고, 일본의 경영방식을 배워 삼성과 현대 같은 굴지의 기업을 일구었다.
잔혹했던 봉건질서를 벗어 나자 마자 조선인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다. 기독교 문명에서 비롯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시스템을 학습할 수 없었다. 따라서 기독교 문명을 기반으로 문명개화를 한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시대를 경험함으로서 제한적이나마 근대국가와 근대사회를 학습하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고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부여한 인권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으며 양도 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천부인권을 가진 개인의 권리를 규정하고,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이 민법이다.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유롭게 계약을 할 수 있는 계약 자유의 원칙, 개인의 사유재산은 국가를 비롯하여 누구라도 침해할 수 없는 사유재산 절대의 원칙, 개인이 저지른 자신의 과실은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는 자기과실 책임의 원칙이 근대사법을 구성하는 3대원칙이다.
봉건질서 착취경제 속에 살아온 조선인은 일제시대를 통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배웠다. 법치를 근간으로 한 자본주의 경제질서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장함으로서 지속될 수 있다. 수탈경제 조선시대 사유재산을 가지고 있음은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다. 구한말 사회가 타성과 게으름, 무능함에 신음하고 범죄가 만연한 것은 노력에 대한 댓가와 사유재산을 보장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가난한 이유이기도 하다.
봉건질서는 양육강식에 의한 힘의 논리가 지배한 사회였다. 즉 권력을 가진자가 가치와 정의를 정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 것과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권리는 국가를 비롯한 누구도 침범할 수 존중 받는 한명의 개인과 천부인권을 탄생시켰다.
종교개혁으로 유럽사회를 지배했던 성직자의 지위와 권위가 흔들렸고 급기야 에라스무스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지 않고 교회활동에 참여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 교황과 주교와 성직자가 있는 수직적 피라미드 계급구조는 타파 되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는 루터에 의해 만인 제사장(萬人祭司長)으로 실체화 되었다. 개인은 카톨릭의 성직자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예배 할 수 있고 기도 할 수 있었던 것을 것을 루터는 모두가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직접 하나님에게 예배와 기도와 소통할 수 있게 하였다. 즉 봉건제의 피라미드 수직적 계급주의를 부정하며, 모든 것의 주체는 개인이며 이러한 개인주의는 종교개혁의 핵심이었다.
1689년 영국의 권리장전, 1776년 미국 버지니아주 헌법의 인권선언, 미국독립선언, 미국 수정헌법 제14조, 우리나라 헌법의 제10조는 천부인권을 토대로 하고 있다. 독일을 대표하는 법학자 옐리네크는 “종교개혁의 순교자들에 의해 헌법으로 자유가 보장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라며 종교개혁이 근대법을 만든 토대임을 설파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종교개혁의 본고장 독일로 유학을 가서 공부 한 후 독일헌법을 토대로 일본 헌법을 제정하였고, 이를 토대로 일본의 모든 근대법을 제정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조선에 민적법을 실시하여 양반, 상놈 가리지 않고 성과 이름을 주어 조선인에게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격을 부여했다.
일제는 조선에 조선민사령을 반포한다, 개인의 모든 권리와 인권을 규정한 조선민사령은 비로서 조선인이 근대 사법질서 아래 살아가게 됨을 의미했다. 개인의 사유재산은 보호 받을 수 있었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해야만 했다. 조선에 국가와 사회, 경제활동의 주체로서 개인이 탄생한 순간 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의 중화질서와 성리학 이외에는 그 어떤 가치도 허락하지 않은 극단적 폐쇄사회였다. 현세의 북괴 같은 사회였다. 국가법령까지 대명률을 따랐다.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는 “한 조각의 널빤지도 바다에 띄우지 마라”라며 해금정책으로 스스로 고립 된 외부와 단절한 폐쇄 국가를 만들었다. 조선은 명나라를 따라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 살았다. 그 시대 일본은 유럽과 무역을 하며 세계와 소통했다.
제물포에서 배를 뛰우면 중국 연안에 단 몇 일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과 조선은 만주를 돌아 한양과 북경에 이르는 육로를 따라 몇 개월을 걸어 다녔다. 그 지독한 해금정책이 풀린 것이 1882년 조선과 청이 체결한 무역 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고 난 후였다.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조선에는 청나라 연안까지 갈 수 있는 배 한 척이 없었다.
일제 시대는 그 지독한 폐쇄사회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일본과 만주, 중국 대륙, 동남아와 남양군도를 오갔다. 해방과 동시 일본과 만주국,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조국으로 가는 귀국선에 250만명이 몸을 실었다. 당시 인구는 2500만 명이었다. 국민 열 명 중 1명은 해외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공부를 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기 위해, 출세를 위해 해외로 나갔다. 비로서 500년 동굴의 우상을 깨고 조선인은 동굴밖으로 나왔다. 이러한 DNA는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해외 무역을 가장 잘 하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고, 서울은 세계화 지수 10위권 도시가 되었고, 대한민국은 인구 대비 가장 많은 해외 활동 인구를 가진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1940년 돈을 벌기 위하여 일본에 광부가 되어 갔던 그들은 조선에 있는 남자 은행원의 2.4배, 면직공의 5.2배의 돈을 벌었다. 일본 대졸 사무직과 순사에 대해 각각 2.2배, 3.7배의 돈을 벌었다. 노동은 계약에 의해 이루어 졌고 사대부의 수탈과 착취는 없었다.
새로운 문명을 공부하기 위하여 수 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공부했고, 새로운 문명을 경험했다. 그들의 지식은 조선의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였다. 새로운 학문, 새로운 기술, 새로온 과학, 새로운 문화는 빠르게 조선인을 개화 시켰고 생활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된 조선인도 많았다. 경제는 성장하고 인구는 식민기간 동안 2배나 늘었고 단군 이래 처음으로 중국보다 국민소득이 2배가 많아졌다.
만주국이 건국 되면서 조선인은 만주로 몰려갔다. 새롭게 건국한 만주국은 많은 두뇌와 인력이 필요했다. 5개 민족이 모인 다민족 국가 만주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조선시대 오랑캐라고 능멸하던 말과 음식이 다른 이민족과 국가를 이루며 살며 조선인은 다양성, 포용성을 배웠다.
만주국의 발전은 경이로웠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중국에 반환 된 만주는 당시 중국 전체 공업생산의 90%를 차지했다.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 된 1946년 모택동과 장개석은 만주를 두고 혈투를 벌렸다. 누가 만주의 공업시설과 중공업을 선점하느냐에 따라 제2차 국공내전의 승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 장군이 만주 원폭 투하를 요구한 것은 중공군의 모든 군수물자가 만주에서 생산하여 보급 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주국에는 은행이 설립 되어 자본이 유통 되었고, 자동차공장을 비롯하여 무기공장, 기관차공장, 비행기공장, 공작기계 공장 같은 중공업 공장은 바쁘게 가동 되었다. 가장 먼저 세워진 제철 공장은 선철 300만톤, 강철 100만톤 이상이 생산되었고, 알미늄, 몰리브텐, 크롬, 마그네슘 등 특수 금속도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만주국 전성기 전력생산량은 120억킬로와트에 이르고 있었다. 같은 시대 4억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인도의 발전량은 40억킬로와트였다.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만주국 신징(新京·현재의 창춘)은 도로와 시가지, 상·하수도와 수세식 화장실이 완비 되었다. 만주국 신징에서 남만주 철도를 타고 유럽까지 14일이면 갈 수 있었다. 유럽에서 유입되는 선진문화는 훌륭한 자극제가 되었고 경제, 산업, 건축, 도시계획, 영화, 음악, 체육 등 문화도 꽃을 피웠다.
한국 영화의 아버지 나운규, 윤봉춘도 만주에서 예술혼을 피웠고 만주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며 유치환, 이태준, 한설야, 강경애, 백석, 김팔봉ㆍ민태원 등의 문학가들이 활약했다. 부산 ~ 만주 ~ 베이징을 잇는 기차 안에는 대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일본 엔카는 조선으로 만주로 퍼져 유행했고, 국민가요 눈물젖은 두만강의 무대가 만주국 두만강 유역이었다.
만주국이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큰 유산은 인재였다. 조국 근대화의 상징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했고, 만주군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만주국을 몸소 체득한 청년 박정희의 경험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시작이 되었다.
정일권 국무총리, 만주건국대 교수 최남선, 최규하 국무총리, 강영훈 국무총리, 동국대 총장 이선근, 김일환 내무부 장관, 이한림 건설부 장관, 황종률 재무부 장관, 오정수 상공부 장관, 고재필 보건사회부 장관, 서범석, 박창해, 강문봉,강필선 국회의원, 이주일 감사원장, 이인기 숙명여대 총장, 이민재 강원대 총장, 신기석 영남대 총장, 송석하 민속박물관장, 원용덕 헌병사령관, 조권순 유한양행 사장, 배응도 신동아상사 사장, 백선엽 참모총장, 김백일 일군단장,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 김석범 해병대 사령관 김일환 상공부 장관, 만화가 고우영 등 산업화 시대를 이끌었던 인재들은 만주국에서 건국대학교, 대동학원, 신경군관학교, 봉천군관학교 공부했고, 네이션빌딩을 몸으로 체득한 인재들이었다. 만주국 의사 13%는 조선인이었고, 3천명의 교수와 교사가 활약했다.
만주국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패망 한 일본경제 재건의 설계도가 되었다. 만주국 산업부 장관 기시 노부스께와 그의 오른팔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만주국 건설의 설계자와 실행자였다. 훗날 그들은 일본 수상과 외교부장관이 되어 일본재건을 이끌었다.
외무부 장관이 된 시이나 에스사부로는 한일국교 정상화를 이끌어 냈고, 기시 노부스께의 만주산업개발5개년계획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경제개발5개년게획이 되었으며, 기시노부스케는 대한민국 산업화 시대 멘토가 되어 박정희를 도왔다. 일제는 일본예산 3년치를 만주국 건설에 쏟아 부었고 패전으로 모든 것을 잃고 퇴각했다. 그러나 만주국의 경험은 세계 최고의 산업국가 일본을 건설하는 설계도를 주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회상록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이야기 하고 있다.
“내가 박정희 씨와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아직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박정희씨의 얘기는 이런 거였어요. ‘우리 젊은 육군 군인들이 군사혁명에 나선 것은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
일제 시대는 우리에게 군대와 안보를 가르쳐 주었다.
“국화와 칼”은 일본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국화는 평화를 상징하고 칼은 전쟁을 상징한다. 일본 문화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다도이다. 차한잔에도 도(道)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한편, 칼을 쓰는 것이 평생 직업인 사무라이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대비한 일본의 양면성을 분석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산다. 어느 나라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영국신사”와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는 극단적 양면성을 보여준다. 고급진 모자와 신사복 그리고 지팡이로 상징되는 품격있는 영국신사는 산업혁명으로 폭발적으로 생산량이 늘어난 자국의 면직물을 인도에 팔기 위하여 수작업으로 면직물을 생산하는 인도의 면직물 고급 기술자를 색출하여 수천명의 팔과 손가락을 잘랐다. 품격과 돈독의 양면성이다.
개인적으로 조선의 양면성을 든다면 안빈낙도와 착취이다. 선비의 이상향은 속세를 떠나 가난을 벗삼는 군자의 삶이다, 쌀 한 톨 생산할 능력이 없고 물 한모금 스스로 떠먹지 못하는 무위도식의 선비가 군자가 되기 위해 학문을 연마하고 인성을 도야 시키는 비용, 생존비용, 공부비용. 책값, 수업료, 시간 등 모든 비용은 누군가를 착취하여야 한다.
이러한 선비의 양면성은 국방과 전쟁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시대 양반은 군역을 면제 받았다. 무관이 아니면 전쟁에 나서지 않았고, 국방세도 내지 않았다. 이런 선비가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忠)을 헤게모니로 장악했다. 이보다 더한 위선은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치욕스러움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절대 항복할 수 없다고 버티던 김상헌 같은 사대부는 전란 중 여자에게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요구했고, 포로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간 여인이 돌아오자 더럽혀진 여자의 굴레를 씌워 환향녀라 조롱하며 자결을 명하여 많은 여인들이 자결했다. 병자호란 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여인이 자결하였지만 나라 잃은 책임을 지고 자결한 선비는 단 한명도 없었다. 정작 주전파의 거두 김상현은 80살까지 권력을 쥐고 존경 받으며 호의호식하다 자연사 했다.
무위도식하는 쓸모없는 양반이 지배한 조선시대는 뇌물경제였다. 조선시대 대사성과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유희춘은 “미암일기”라는 뇌물일기를 남겼다. 66개월간 총 2,796회의 뇌물을 받아 한 달에 평균 42회의 뇌물을 받았고 품목도 면포, 부채, 종이, 붓, 먹과 같은 문방구, 꿩, 생선, 전복, 소금, 감, 유자, 감자, 생강, 마늘, 인삼, 꿀, 과일, 약재는 물론이고 장작과 숯과 같은 땔감까지도 뇌물로 받아 수탈과 착취 경제의 전형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성리학의 이상향 안빈낙도는 착취를 정당화 한 논리일 뿐이다. 즉, 지위에 맞는 권리만 있고 의무가 없는 사회의 전형을 조선이 투영하고 있다.
중고등 과정의 도덕 교과서 수준의 윤리서인 성리학은 같은 양반이라도 무인을 천시했다. 국방부장관 병조판서와 군최고사령 도원수를 비롯한 군부 주요 요직은 모두 문관들이 차지했다. 권리와 의무가 가장 중요한 집단이 군대이다.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병약한 조선군대의 한심함은 혀를 차게 만든다.
병자호란의 쌍령전투에서 300명의 청나라 기마병에게 조선군 4만명이 몰살을 당했고, 임진왜란 용인전투에서는 8만의 대군이 왜군 1,600명에게 처참하게 패했다. 임진왜란에서 가장 많은 왜군을 죽인 것은 이순신장군의 함대였고, 그다음은 6~8만을 동사시킨 동장군(冬將軍)이었다. 이러한 수치스런 패전은 세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치욕스런 패전으로 기록 될 것이다. 조선시대 내내 두만강과 압록강 국경선을 넘나드는 불과 몇십명 몇백명에 불과한 만주족 야인 민병대 막기에 급급한 정규군이 조선 국방력의 실상이었다.
삼권과 예산권, 국방권까지 모두 가지고 건국한 고종의 대한제국 병력이 고작 8,700명이었다. 녹슨 칼 몇자루 외에는 병장기가 없는 군수창고를 보고 조롱하는 어느 외국공사관이 기록을 남기고 있다. 병사들의 월급을 1년동안 주지 못하여 정권의 안위까지 걱정하는 임오군란을 겪었던 것이 조선이다. 고려시대 요나라 몇십만 대군을 막아낸 기상은 성리학에 무너져 내렸다.
그런 병약한 조선에 국방의 기초를 만들어 준 것이 일본이었다. 중일전쟁 시기 조선인 육군특별 지원병 모집에 조선인이 몰려들어 50~60대 1의 치열한 경쟁을 했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17,000명의 전쟁경험은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가 되었다.
300명에 불과했던 광복군도 창군에 참여하여 20여명 정도가 군장성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병약한 조선군대의 DNA를 가지고 있었고 6.25 사변에서 이러다 할 활약을 보이지도 못했으며 때론, 광복군 출신 군장성이 변절하여 북한으로 넘어가 대남 선전선동 요원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장교는 양반출신만 해야 한다는 몽니를 부린 사람도 있었다. 무장도 하지 못하고, 지휘관도 없었던 비루한 군대 300여명의 광복군 인재풀로 창군에 참여하고 20여명이 군장성이 되었으면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이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 장군은 만주 봉천관학교 출신이다. 다부동 전투가 없었다면 UN군은 부산에 상륙하지 못했다. 백선엽 장군은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쏘라며 직접 총을 들고 병사와 같이 전진을 향해 돌격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다부동전투 만큼 6.25 사변에 있어 중요한 전투가 김종오 대령의 춘천전투이다. 김종오 대령은 일본군 학사장교로 소위로 임관한다. 소련의 전통적 전술인 포위 섬멸 전술을 김일성은 그대로 가져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두갈래로 남침하여 서울을 포위 섬멸하려는 작전을 김종오 장군이 동부선선에서 좌절 시켰다. 가장 중요한 전략이 좌절 되자 김일성은 북괴의 2군단장 김광일을 바로 숙청했다. 김종오 대령은 백마고지 전투에서도 부대를 지휘하며 승전을 거두었고 훗날 참모총장에 오른다.
6.25 사변에서 지휘한 정일권, 이종찬, 채병덕, 김석원, 김백일, 유재흥, 장도영 등 6.25 사변을 지휘한 장성들 대부분은 모두 일본육사 또는 만주에 소재산 사관학교 출신들이며 한 두명을 제외하고 모두 개신교인이었다. 대부분 친일파로 매도 당하고 있으나 기준도 없는 친일논란은 차치하고 저들의 군사적 능력이 없었다면 민족 초유의 변란인 6.25 사변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영주 간의 전쟁은 사무라이만 했다. 끊임없는 전쟁 속에 있었던 일본의 역사지만 사무라이가 농민을 수탈하는 경우는 없었으며, 적의 농민이라도 보호의 대상이었다. 훗날 근대화의 길을 걸으며 사무라이는 초라하게 몰락했지만 굶어 죽어도 수탈이나 횡포를 부리지 않았다. 패망으로 간 망령 된 일제의 군국주의였지만 전쟁에서 도망가고 국방세 조차 내지 않는 양반의 나라에서 근대국가의 국방과 군대, 국가와 안보를 배웠다.
식민지가 된 일제 시대를 반가워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도 우리의 역사이며. 봉건질서의 폐습에서 벗어나 근대사회로 진보하는 역사진화의 과정이었다. 친일을 문제 삼는 사람들의 기준으로 놓고 볼 때 그 사람들의 부모나 조상이 친일기준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한세대를 넘어가는 긴 시간 동안 독립운동만 하면 아마도 국가와 가문은 멸족 되었을 것이다.
일제 시대 보다 지독하고 치욕스런 고려의 원나라 지배기, 조선 500년의 중국 속국으로 지낸 것을 먼저 돌아보고 일제 시대를 논하는 것이 옳은 역사인식 방법일 것이다. 국제질서는 냉혹한 것이다. 지킬 힘이 없으면 평회를 외치고, 힘이 넘치면 침략하는 것이 인류의 공통된 역사였다. 성경 속 그 수많은 정복전쟁은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한민족은 평화를 사랑하여 남의 나라를 처들어 간 적 없다는 논리가 과연 옳을까?
울륭도 우산국, 제주도 탐라국을 정복한 것은 다른 나라 처들어 간 것이 아니며, 복속한 탐라국이 반란을 일으켜 고려 시대 최영 장군이 가서 진압한 적도 있다. 삼국시대 영토와 군주, 주권이 다른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죽이려고 피터지게 싸운 것도 국가와 국가의 정복전쟁 이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정복전쟁을 칭송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대마도 정벌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말이다. 한반도를 넘어 바다 건너 일본을 정복할 힘이 없었던 것이고 더욱이 만주를 넘어 중화대륙을 도모하지 못한 것은 약한 국력 탓이지 평화를 사랑했음은 아니다.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제국주의 시대 서구 국가의 식민지가 되어 착취를 당했다면 과연 개혁교회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 들였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동남아 각국이 개신교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것은 서구세계의 식민지배에 대한 아픔과 증오 때문일 것이다. 영국은 세계를 지배하며 엄청난 복음의 씨앗을 뿌렸음에도 복음은 실패했다. 세계 선교를 지배하는 미국의 복음이 괄목한 것은 다른나라 식민지배를 하지 않아 거부감이 없기 때문이다.
서구세계의 식민경험이 없는 우리는 지금도 개혁교회 기독교가 제국주의 앞잡이 였다고 좌파진영에서 게거품 물고 욕을 한다. 가장 앞선 선각자 이승만도 배재학당을 다니며 개혁교회 기독교는 제국주의 앞잡이라고 생각하고, 경계하며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았고, 졸업 후 한성교회에서 극적으로 복음을 받아 들였다.
더욱이 서구세계의 식민지 경영은 가장 적은 투자를 통해 혹독한 착취를 하여 이윤을 남기는 지배방식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반도를 병합하여 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죽어라 투자만 하고 만성적 적자에 시달리다 패망하여 쫒겨났다.
물질적인 것을 물질문명이라 한다면 그 토대의 가치와 정신까지 포함한 개념을 문화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이 땅에 온 선교사가 기독교 문명의 물질문명까지 전해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선교사는 기독교 문명의 가치와 정신을 전해 주었고, 일본은 기독교 물질문명을 전해주어 대한민국은 비로서 기독교 문화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오늘의 번영을 일구었다.
따라서 일제 시대를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시대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역사진보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일제 시대를 맞이한 것은 우리가 부패하고, 무능하며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보다 문명적이었고, 삶의 질이 수직 상승했던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일제 시대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2배가 넘게 성장 한 것은 우리 삶의 진보였다.
구한말 우리는 일본처럼 서구문명을 받아 들인 능력이 없었다. 전국을 색출하여 천주교인 8,000명을 주살하는 반문명적 행태가 있었다. 상투 대신 목을 치라고 했다. 그 완고한 성리학 질서는 내부 각성을 통해 혁파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한말 선교사와 일제 시대를 통해 기독교 문명, 가치와 정신을 주어 기독교 문화의 중심에 서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사랑하사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신음 하는 백성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값 없는 선물을 주신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에 복음이 폭발 한 곳은 한반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타콤 같은 참변을 겪지 않았고, 중국과 일본처럼 수 많은 순교가 있었음에도 복음실패도 없었으며, 유럽처럼 카톨릭과 개혁교회 간 30년 전쟁도 없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유일하게 식민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은혜를 주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남쪽에 가장 은혜 받은 기독교 문명이 서게 했고, 북쪽은 세계 최고 기독교 박해지수 1위의 지상의 지옥을 서게 했다. 그 가혹한 북녘에 일만개가 넘는 지하교회가 있다. 그 뜻은 대한민국의 남북통일은 복음통일의 의미일지 모르겠다. 이제는 일제 시대를 역사의 한페이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여유 정도는 가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 남은 공산세력과 전쟁터, 휴전선을 두고 천국과 지옥을 만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날이 통일의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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