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 열도를 때린 두방의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팻맨 두방에 일본 천황은 조건 없는 항복을 한다. 그 항복한 날이 광복절이다. 미드웨이 해전으로 오른팔이 꺽였고, 레이테만 해전으로 사실상 일본 해군은 와해 되었다. 광복절이 있기 약 2년 전 2차대전의 승기를 연합국은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하여 이집트 카이로에 미국과 영국, 중국의 각 수반들이 모였다.
전후질서 논의는 첨예한 이해당사자의 의견이 충돌 되고 있었지만 미국의 의지에 따라 결정 될 수 밖에 없었다. 태평양전쟁과 2차대전과 전후 수습은 미국의 기여가 9할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영국도 그저 체면이나 차리는 수준이었고 중국은 일본에 연전연패 하며 자국의 영토 방위도 못해 내륙으로 도망가 무기 등 미국의 지원에 의존하여 근근이 버티는 수준에 불과했다.
장제스의 운명은 비참했다. 자국의 영토는 고사하고 자신의 힘에 한줌도 되지 못하는 모택동에게 패하여 대만으로 도망 가야 하는 비참한 운명을 생각 조차 못하고 있었다.
영국의 처칠 또한, 전후 파괴 된 영국을 재건 하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처지였고, 아니 유럽 전체가 그러했다. 잿더미가 된 유럽은 전세계 GDP 54%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의 도움 없이는 회생이 불가능했다.
세계가 미국에 의존하여 생존을 도모하여야 하는 그 시대 전후 질서는 곧 미국의 의지였다.
태평양 전쟁의 종전을 앞둔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북부에 위치한 자그마한 휴양도시 브레턴우즈에 서방진영의 44개국가의 경제를 대표하는 730명이 모였다. 그 자리에는 당대를 아우르는 경제학의 최고 석학 케인즈도 영국의 대표단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는 전비 조달로 미국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고, 미국은 전세계의 금70%를 보유했으며, 세계 총생산량의 54%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후 복구 비용이 절실한 그들은 미국이 선도할 전후질서에 거수기로서 브레턴우즈에 모여 황제의 대관식을 축하 하는 하객이 되었다. .
그들은 기꺼이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결정했다. 달러가 기축통화가 됨은 잿더미가 된 나라에서 금본위제 유지를 위해 은행에 금을 쌓아 두지 않아도 되었고, 미국의 달러에 화폐를 연동시켜 자국의 화폐가치를 정하면 되었다. 세계의 모든 금 70를 가진 미국은. 누구라도 미중앙은행에 35달러를 가져오면 금1온스를 받을 수 있는 금태환제가 출범했다. 영국의 2.8파운드, 독일의 4.2 마르크, 일본의 360엔, 이탈리아의 625리라는 미국의 1달러와 가치가 동일했고 언제든지 달러를 바꾸어 미중앙은행에 가면 화폐에 상당하는 금을 받을 수 있었다.
잿더미가 된 유럽에 달러를 뿌리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을 만들었고 유럽의 복구와 부흥을 지켜 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을 창설했다. 미국은 마셜플랜을 가동하여 유럽 17개국에 180조원을 풀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의 종전으로 미국은 명실공히 경제, 외교, 국방, 사회 모든 방면에서 세계를 주도하는 패권국가가 되었고, 미국의 모든 것은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
그리고 문명을 선도하며 지배했다. 전기, 전자, 자동차, 전화, 컴퓨터, 이동통신,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현대문명을 대표하는 모든 이기가 미국에 의해 만들어 졌고, 미국의 문화는 세계를 열광시켰으며, 도덕과 가치도 미국이 주도했다.
대부분의 나라가 식민지배 또는 영향력 하에 있을 그 때, 전후질서 논의를 위해 모인 카이로선언문에 느닷없는 단 한나라만 꼬집어 한국독립을 선언한다.
“위의 3대국은 한국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하였다(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영국이 참여한 회담에서 어느 특정 국가를 독립시키겠다는 선언문을 쓰는 것은 영국의 심기를 박박 긁어 놓는 것이었다.
인도는 여전히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싱가폴이 1967년에 독립하였으며 대부분의 영국 아프리키 식민지가 독립한 것이 50년대와 60년대였다. 영국은 전후 질서를 규정하게 될 중요한 국제회담에서 특정국가를 지목하여 독립을 시킨다는 것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중국은 청일전쟁때부터 일본에 빼앗긴 대만, 만주, 팽호를 반환받는 다는 보장을 받아냈다. 그러나 영국이 있는 자리에서 홍콩이과 마카오는 영국으로부터 반환해 달라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중국은 한심했다. 카이로 회담을 통해 찾은 만주와 팽호를 모택동에게 진상한 꼴이 되었고 그나마 찾은 대만은 장제스가 도망갈 곳이 되었으니 위안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모택동에게 패하여 대만으로 도망가 망명정부를 세워야 하는 내전으로 몸살을 앓는 중국이 타국의 독립문제에 드러내놓고 관여한다는 것도 우스꽝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당초 카이로 회담은 미국과 영국, 소련, 중국이 만나 전 후 질서를 논의 하기로 예정 된 회담이었다. 그러나 모택동과 싸우는 장제스는 소련의 참가를 거부하였다. 때마침 스탈린이 불참의사를 밝힘에 따라 카이로 회담이 성사 된 것이었다. 그리고 11월에 이란의 테헤란에서 장제스를 뺀 루즈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다시 회의를 가지기로 합의한다.
카이로 회담 다음날 미국과 중국은 별도의 회담을 하였다. 그 회담이 기록 된 극비문서가 비밀해제 됨으로서 응큼한 장제스의 속내가 드러난다, 비밀해제 되어 공개 된 미국무부 극비문서(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에 장제스의 속내를 적고 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장제스와 회담을 가졌는데 토의 내용에 매우 만족한 것으로 말했다. 중국은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한 광범한 야욕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It seemed that the Generalissimo had been well satisfied with the discussion held the previous day. There was no doubt that China had wide aspirations which included the re-occupation of Manchuria and Korea)
(미국무성 비밀해제극비문서: The First Cairo Conference)
장제스는 유교의 종주국으로서 조선을 그 미개한 유교문명으로 회귀 시키려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번영은 기독교 문명 때문에 가능했다. 그 지긋지긋한 유교 탈레반 사회에서 벗어 남으로서 오늘의 번영을 일구었다. 국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삶은 유교문명과의 투쟁이었다. 미개하며, 타락했고, 썩어서 구역질 나는 냄새나는 유교문명을 걷어내면서 대한민국이 건설 된 것이다. 만일 장제스가 군대를 이끌고 한반도에 진주했을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할 따름이다. 다시 미개한 유교적 봉건질서 속에 신음해야 하고, 모택동의 공산당이 지배하는 세상이 올 수 있었다.
장제스가 모택동에게 몇백배의 화력과 인력, 돈을 가지고 있음에도 너무나 부패고 썩어 냄새나는 유교폐습으로 한줌도 못되는 공산세력에게 쫒겨나 대만으로 갔다. 그 미개한 문명으로 감히 조선을 유교탈레반 사회로 회귀 시키려는 꿈을 가졌다는 것이 가소로울 뿐이다.
당시 장제스 군대가 얼마나 한심한 수준이었는지 잠을 자고 나면 모택동에게 장제스의 군단이나 사단이 통째로 항복하는 일이 다반사처럼 일어났다. 우리는 6.25때 부대단위 전체가 항복한 일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그 당시 유교폐습의 썩은 냄새 풀풀 풍기는 장제스 군대의 한심함의 이유를 들면 밤을 세울 지경일 것이다.
가끔은 김구를 추종하는 좌파세력은 코웃음 치게 만드는 주장을 한다. 김구가 장제스에게 부탁하여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독립 선언”을 하게 한 것이라고 날조하곤 한다.
김구가 자신과 임정간부들이 카이로 선언이 있는 해 7월26일 장제스를 만나 “임정을 승인해주고 독립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장제스가 넉달 뒤 11월 카이로회담에 가서 반영해주었다는 주장을 한다.
제코가 석자인 장제스에게 부탁한 무용담을 이야기 한 김구의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 인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김구는 장제스가 던져주는 얼마간의 돈으로 임시정부를 꾸렸다. 광복군도 장제스가 반대하여 지휘관은 모두 중국인이 임명되었으며, 최고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이 장교 밑의 준위 장준하 정도였다. 더욱이 김구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상황을 판단할 지력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건국기 김구의 어리석은 행보를 유추하면 쉽게 짐작이 될 것이다.
당시 국제 정세와 질서는 미국이 주도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모여 살려 달라고 아우성 칠 때였다. 제발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자고 매달릴 때였다. 일본에게 끊임없이 패하여 내륙으로 도망가 간신히 체면이나 차리는 장제스의 주제에 감히 중국 따위가 미국의 의지를 벗어나 카이로 선언문을 작성하거나 고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간단할 것이다.
그리고 장제스는 끝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사람이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15일, 김구는 장제스에게 쫒아가 “이제라도 임정을 승인해 달라”고 간청하였음에도 장제스는 이를 거절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주재 미국 대사 고스(Clarence E. Gauss)가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을 만난 비밀전문도 공개가 되어 있다(FRUS 1942.2.12.).
“나 (고스 대사)는 임시정부 외교부장(조소항)의 요청으로 비공식적으로 그(를 만나 물어 보았다 중국 정부가 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귀엣말로 나에게 말했다. 일본 패전 후 한국을 중국의 종주권(宗主權·Suzerainty) 아래 두려는 중국의 욕망(desire)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만 지목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 또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시킨다(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는 선언이 채택된 과정을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1943년 카이로회담이 열리기 9개월 전 루즈벨트는 2월23일 전국 중계 라디오 연선을 통하여 한국을 지목하여 “일본의 가혹한 압제에 한국 국민이 당하는 노예상태”에 대한 동정을 표하며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2차대전과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전후 구상을 발표했다.
이 연설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의 노예상태(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가 등장했다. 이 말은 카이로 선언문에 그대로 인용되었다. 즉 전 후 구상을 밝히는 연설에서 한국 독립을 피력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루즈벨트의 전 후 구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2차대전 이전은 대공황 등을 거치면서 세계경제는 영국, 프랑스 등 식민지배국이 주축이 되어 블록경제를 만들었다. 피식민국과 식민국 간에 배타적인 무역특혜를 주어 수직적 블록화 경제가 지배했다. 파운드 블록, 달러 블록, 마르크 블록, 프랑 블록 등 블록 간 폐쇄 된 특혜무역으로 금본위제가 무너지고 자국 산업 보호에 치중하면서 세계무역은 삼분의 일로 급격하게 축소 되었다.
블록화 된 경제로 인해 상대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탈리아, 독일,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등 깊어진 갈등은 2차대전으로 이어졌다. 특히 태평양 전쟁은 블록경제 하에서 미국이 한순간 일본에 대한 석유와 석탄 수출을 동결 시킴으로서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2차대전을 거치면서 독보적인 패권국으로 올라선 미국은 이러한 블록경제를 타파하고 세계의 자유무역을 통한 번영이었다. 이러한 루즈벨트의 구상은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관세 무역 일반 협정(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을 채택함으로서 세계는 자유무역시대를 열어간다. 미국은 패권국으로서 세계의 모든 바다에 해군력을 투사함으로서 자유무역의 바닷길 치안과 안전을 지켜주는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를 보장하는 것이다. 중국의 남지나해 난동에 미국이 해군력을 투사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항행의 자유이다.
대한민국의 번영은 무역이 가져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세계질서를 간파하고 전 후 새롭게 재편 된 GATT 질서와 체제에 편입하여 "무조건 최혜국대우 공여원칙"에 따라 무역에 있어 열등한 후진국의 열세를 극복하고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의 돈 중 80%는 수출과 수입에 의해 창출 되는 돈이다. 이러함에도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면서 아프리카 후진국 만도 못한 북한을 추종하는 그 자들의 어리석음과 무식함에 고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국부 이승만 또한 이러한 루즈벨트의 속내를 간파하고 있었다. Japan Inside Out 으로 미국 주류사회와 워싱턴 정가에 영향력을 가진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 몇일 후 한인대회에서 감사함을 표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오랫동안 미국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한미협회 이사장 해리스 목사, 변호사 스태거스, 언론인 윌리암스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장문의 친서를 보내며 한국 독립과 관련된 조치들, 임정승인과 무기대여법에 따른 한인부대 창설문제를 요구하여 왔었다.
때로는 이승만은 루즈벨트에게 보낸 서한을 자신의 비서 임병직에게 시켜 백악관을 방문하여 루즈벨트의 비서 홉킨스에게 직접 전달하기도 하였다.
카이로 회담이 있는해 5월에는 백악관으로부터 답신을 받기도 하였다.
”친애하는 이 박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나는 귀하의 서한을 잘 접수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귀하의 서한이 ’섬세한 주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표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카이로 선언문 기초 팀도 없이 미국에서 루즈벨트의 지시를 받은 비서실장 해리 홉킨스에 의해 작성 되었다. 영국은 첨예한 자국의 식민지 문제가 걸려있었고, 장제스는 혼란스러운 내정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 없었으며 국제 정세를 심도 있게 논의할 수 있는 역량도 되지 못했다.
“We are mindful of the treacherous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by Japan, and are determinde that that country,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 shall become a free and independent country”
일본에 의한 배신적 노예상태란 표현(the treacherous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by Japan)과 일본 패망 후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 한국을 독립시키는 것으로 홉킨스가 작성한 초안은 루즈벨트의 생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끊임없이 백악관과 미국 주류사회와 미국의 교회를 통하여 조선의 상황과 시급한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승만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 된 것이기도 했다. 미국의 여론을 형성하는 가장 큰 세력인 교회를 통한 압박은 루즈벨트에 적잖은 부담이었다.
초안을 숙고한 루즈벨트는 영국의 저항을 고려하여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를 “at the proper moment”로 수정하였다. “가장 빠른 시기”가 “적당한 시기’로 바꾸었다.
루즈벨트가 예상한 것처럼 인도 등 여전히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영국은 즉시 반발했다. 영국은 ”한국 독립관련 조항 전체를 아예 삭제하자“고 했다. 영국식민지들에 미칠 영향 때문에 ‘독립’이란 단어조차 없애자는 것이다.
루즈벨트의 의지를 꺽을 수 없는 것을 알게 된 처칠은 “at the proper moment”를 “in due course”로 변경하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독립이라는 문구 조차 넣지 말자는 처칠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적당한 절차” 또는 “적당한 시기”의 의미인 “in due course”가 되어 카이로 선언문이 작성 되었다. 처칠의 의견을 받아들인 카이로 선언문은 11월 이란의 테헤란에서 다시 만나 스탈린의 동의를 받고 확정 된다.
당초 작성 된 독립의 때가 가장 빠른시기(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에서 적당한 절차(in due course)를 거쳐로 변경 된 것을 알게 된 국부 이승만은 분노했다. 적당한 절차(in due course)라는 문구는 신탁통치를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한인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을 당부했다.
”우리 삼천만 동포에게 나 이승만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기쁜 소식은 카이로회담의 결과입니다. 대한의 완전 독립을 주장한다 하였으니 이는 3천만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 선언은 다만 우리의 길을 열었으니 앞길은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개척이 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해방 후 전국민의 80%가 공산주의를 원하고 있을 때 미군정은 자유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 활로를 만들어 주는 기회였다. 조선시대 그 끔찍한 봉건세상에서 벗어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가는 길을 스스로 걸어 갈 수 있었는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다.
해방 후 혼란기에 미군정이 실시 됨으로서 최소한 한반도 전역이 공산화 되는 민족 최악의 불운은 피할 수 있었다.
좌파들은 항상 미군정을 비판한다. 러시아 빨갱이가 북녘을 지배하고 러시아의 충직한 개가 된 김일성이 어떠한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 주었는지 한마디 비판도 못한다. 역사를 바라 볼 자격 조차 갖추지 못한 청맹과니들이다. 반성 없는 역사속에 불행을 반복하려는 멍청이들의 지즐거림 정도로 받아 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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