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성리학에서 파생 된 미토학은 현인신 천황이 다스리는 국가의 모든 것 즉, 일본제국주의를 국체(國体)로 정의하고 헌법에 국체를 넣어 정식화 한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일본에 군림하고, 천황의 군덕(君徳)이 천양무궁(天壌無窮)히 사해(四海)를 덮고, 신민도 천황의 사업을 협찬하여, 의(義)는 군신과 같고 정(情)은 부모자식같이 하여, 충효일치에 의해 국가의 진운을 부지(扶持)하는, 일본 독자의 사실(事実)”
일제는 “국체의 본의"를 간행하여 전국민에게 배포하고 천황에 대한 절대복종을 명한다. 일제는 이를 법제화 하여 1925년에 치안유지법을 만들고 천황을 부정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며 천황제 군국주의를 완성시킨다.
그리고 치안유지법은 군국주의 통치를 위한 통제의 모든 것이 된다. 천황과 군국주의에 대한 부정은 “국체변혁죄"로 규정했고 이를 추가하여 사형까지 할 수 있게 했다. 신사참배의 거부는 생명을 담보로 하여야 했다.
현실에서 일제시대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에 비판을 자주한다. 특히 좌익진영은 자주 정치적인 문제로 정쟁거리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 당시 조선인은 누구나 신사참배를 했었다.비판하는 자들의 할아버지 아버지도 신사참배를 했다.
그 많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신사참배에 저항하여 투쟁하다 옥고를 치루었다는 기록을 본적이 없다. 신사참배의 거부는 천황에 대한 불복종이고 그 불복종은 일제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죽음을 면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반대가 없었던 것은 당시의 정서도 한몫 했을 것이다. 조선 백성은 봉건제 절대권위의 군주시대에서 천황제 일제시대로 바뀌며, 봉건적 관습과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백성이 군주에 대하여 예를 표하는 것이 어쩌면 익숙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국내에서, 국외에서 활동한 수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지만 그들이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처벌을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는 기록을 찾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신사참배는 일상의 하나였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로 연결 되어 신앙적인 문제 때문에 거부운동이 일어난다. 개신교가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중심에 선다.
개혁교회의 상징 중 하나인 칼빈주의 신앙을 대표하고 있는 장로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주축이 되어 이 땅의 선교역사와 같이 한다. 국부 이승만이 다니기도 했던 프린스턴 신학대는 미국 장로교단이 세운 학교로서 조선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낸 곳이다. 그 외 장로교 신학대인 맥코믹 대학, 파크대학, 리치몬드 유니언신학교 출신의 많은 선교사가 조선으로 건너 왔다.
프린스턴 신학 대학교는 19세기 미국의 보수적 칼빈주의 신학을 대표하고 있었다.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초기 사역자를 배출한 이땅에 최초로 세워진 신학교인 평양신학교 교장을 오랫동안 지킨 로버츠(S. L. Roberts) 선교사가 프린스턴 신학대 출신이다. 평양신학교는 조선의 개혁교회 보수주의 신앙의 중심이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전국의 교회를 타고 번지게 된다. 정체성을 부정 받게 되는 일제는 강력한 탄압으로 맞서게 된다.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 투옥으로 이어졌다. 당시 미북장로회 선교보고서는 이를 기록하고 있다.
“어떤 기독교 단체도 한국의 기독교회보다 어려운 전시에 시련을 당했 는지는 의심스럽다. 순결, 자립, 성서 사랑, 그리고 선교일로 전 세계에 알 려진 한국교회는 일본통치 35년 동안 끊임없이 계속된 저항운동의 핵심이 기독교라고 믿었던 일본 통치자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체포된 약 5,000명의 교인 중 1,200명이 투옥되었고 그 중 많은 사람이 순교 당했다. 2,000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투옥 당했으며, 적어도 그중에 50명이 목숨 을 잃었다.
개혁교회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유럽에서 수만, 수십만이 학살 당하며 지켜온 신앙이었다. 개신교측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신앙의 파괴로 받아들였다. 신앙을 지키려는 양심은 순교정신으로 이어져 죽음도 불사하게 된다.
일제도 입장이 난처했다.
조선의 복음은 서구세계의 각별한 관심 속에 성장하고 있었다. 평양대부흥 같은 세계적인 영적각성운동을 지켜 보며 그들도 영적충만의 은혜를 받았다.
더욱이 105인 사건으로 일제는 국제기독교계로부터 그리스도인 탄압국 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어 서구 종교계에 대하여 각별한 눈치를 보아야 했다. 일제는 조선복음을 지켜보는 국제적인 여론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신사참배 보급에 나섰다.
조선 총독부는 처음부터 강압적인 신사참배 정책을 강행하지는 않았다.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며 국민의 애국적인 의례라고 세계에 선전했다. 교회를 찾아 다니며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며 국민 의례에 불과하다며 선전했다.
그러나 현인신 천황을 위해 신도를 짓고 신도에 제례를 하는 것은 신에 대한 예로서 우상숭배였다. 신사참배 거부는 확고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강력한 군국주의가 대두 되고, 전쟁 총동원의 충성심을 위해 신사참배는 정치적문제가 된다.
새롭게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미나미 지로는 제국회의에 참석하여 조선통치는 원활하게 잘 되어 가느냐? 라는 질문에 “조선에는 죽음을 두려 워하지 않는 40만의 군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교도들입니다”라는 답변을 했다. 그만큼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은 거세지기만 했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학교 및 학생에게 집단 신사참배를 강화한다. 일본인 도지사가 교장회의를 소집하여 신사참배를 요구하자 숭실전문학교 교장 매쿤 선교사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일제는 그를 교장직에서 해임시키며 추방까지 시켰다. 그리고 학교까지 폐쇄시키며 본격적인 탄압에 돌입한다.
학교에 이어 종교단체를 탄압했다. 전주교, 개신교 각 교단을 상대로 신사참배 강압에 나섰다. 마지막까지 심사참배를 거부한 장로교는 일본경찰이 총으로 무장하고 회의를 소집시켰다. 총회장에 입장하는 모든 사람을 검문 검색을 하여 들여 보냈고, 총회장은 총을 찬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신사참배는 교단 차원에서 수용하게 된다.
이러한 교단의 결정에 불복하며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지도자들은 이기선, 한상동, 채정민, 이주원, 주기철, 박관준, 최봉석, 박의흠, 서정영, 주남선, 방제선, 이인재, 김인희, 송명복, 손양원 등이었다. 선교사들 가운데 반신사참배 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 몇 사람을 든다면 죠지 맥큔(George McCune), 함 일돈(F. E. Hamilton), 말스베리(D. R. Malsbury), 그리고 부르스 헌트 (Bruce F. Hunt) 등이 참여한다.
반대운동이 거세지자 일제는 일본 기독교연합회장 도미다까지 동원하여 신사참배를 설득하고 다녔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나선 손양원 목사의 재판기록에는 신사참배를 거부 이유가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절대 불멸의 신성(神性)을 구유(具有)한 절대 최고로 유일하고 전지전능한 신인 고로, 일본의 원조(元祖) 천조대신(天照大神)도 그리스도의 피조물이며 우상이지 기독교가 예배할 신이 아니다”
손양원 목사는 두아들을 여수. 순천 반란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한다.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붙잡혔을 때 용서를 구하며 안재선을 아들로 입양을 했다. 결국, 손양원 목사는 6.25 사변 때 북한 괴로군에게 총살을 당한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깊어지며 천황에게 국체의 모든 것이 복종, 장악 되어야 하는 즉,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종교까지 한명의 개인에 불과한 천황의 발 아래 두어야 했다.
천황제 제국주의는 신사참배 거부를 단순한 치안유지법 위반이나, 불경죄 정도로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천황과 국체 즉,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신사참배 거부는 대역죄, 사상범의 멍에를 씌웠다.
일제는 사상범에 대하여 잔인하고 옺갖 야비한 방법을 동원하여 고문하며 탄압했다.
못판을 깔아 주기철 목사를 걷게 했다. 안락한 인생을 보장하며 미혹했다. 목회자 가족의 양식이 떨어지게 하여 외부와 접촉을 끊어놓고 감옥에 있는 사상범을 귀가시켜 굶어 죽어가는 가족을 보게 했다. 가족을 잡아다 사상범 앞에서 두들겨 팼다. 그 혹독한 탄압 속에 50여명이 순교자의 길을 택한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나서기 전 자신의 설교에서 순교자의 길을 선포한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내가 그 칼날을 향해서 나아가리다. 내 앞에는 오직 ‘일사각오(一死覺悟)’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옥고를 치루는 주기철 목사를 찾은 부인 오정모 사모님은 말을 남긴다.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일제는 주기철 목사를 구속하고 풀어주기를 반복하며 기독교계에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경고를 끊임없이 했다. 주기철 목사를 대리하여 수요예배를 진행하는 장로를 잡아다 주기철 목사 앞에서 죽도록 구타를 했다.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교회는 주기철 목사를 파면 시켰다.
전국적으로 번진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50여명의 목회자가 순교를 했고, 2000여명이 목회자가 투옥 되었으며 200여개의 교회가 폐쇄 되었다.
삼일운동 후 교회가 폐쇄 된 것은 12개에 불과했으나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폐쇄된 교회가 200여개가 되어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개신교 만이 유일하게 신사참배에 대하여 모진 핍박을 받았다. 그 어떤 종교도 신사참배 문제로 핍박을 받거나 교단 내부의 갈등을 겪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모든 종교, 민족종교를 표방한 천도교와 동학, 대종교에 이르기까지 신사참배에 순응했다는 방증이다.
좌파들은 죽어라 친일문제로 기독교를 물고 늘어진다. 만일 당신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면 증거해 보라. 그 시대 조선인 모두가 신사참배를 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를 거치지 않고 문명개화, 근대국가를 출범시켰다.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미국과 유럽제국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식민지를 거치지 않고 근대화 된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그러나 영리한 일본은 기독교 문명의 중심에 섰지만 문명만 취했을 뿐 문명을 만든 정신과 가치를 배우지 못했다.그 어리석음의 결과는 전쟁으로 자국민 수백만의 군인과 수백만의 양민이 죽어야 하는 태평양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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