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명세계로 들어가는 햇병아리 수준의 조선이 일제를 상대로 한 무장투쟁의 접근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계란으로 바위 치는 수준으로 일제의 막강한 무력 앞에 과연 무장투쟁이 가능한 방법론이었는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는 무장투쟁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기념비 적인 무장 독립운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청산리. 봉오동 전투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는 알려 하지 않거나 고의적으로 외면하려 한다.
청산리. 봉오동 전투의 휴우증으로 발생한 대표적인 비극적 사건이 간도참변(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이다. 간도참변을 일으킨 일본군은 만주국이 세워지기 한참 전이고,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도 어떻게 타국의 영토인 만주 일대에 주둔하게 되었는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러시아는 내전이 휩싸이게 된다. 공산당을 상징한 붉은깃발을 빗대어 적군 또는 붉은군대, 반혁명파 왕당파를 상징하는 백색을 빗대어 백군이라 불렀다.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된 내전은 국제적인 문제로 확대되면서 1차대전의 연합국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이 왕당파 백군을 지원하며 1918년 연합군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주둔한다. 일본은 연합군의 규모의 절반에 해당하는 8만의 대군을 파병했다.
즉, 러시아 내전으로 만주와 연해주 일대가 어지러울 때 청산리. 봉오동 전투가 일어난 것이다. 전투의 전과는 한국, 일본, 중국 삼국의 기록이 상이한 것이 많아 그 문제는 역사연구가에게 맡길 문제인 것 같다.
일제는 청산리 전투 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주둔한 일본군이 재공격을 받거나 한반도로 무장투쟁이 확대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청산리 전투의 복수와 경고를 하기 위하여 간도참변을 일으킨다. 양민의 대량학살과 삶의 터전인 가옥까지 모두 불태워진다. 때로는 마을전체를 몰살시키고 불태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본측 기록에까지 민가 수색 중 사살한 수백, 수천명의 양민 명단이 남아 있어 작정하고 색출하여 죽이고 불태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30여 호의 마을 전 주민을 몰살 당하고, 불태워지고, 어느 곳에서는 미성년 4형제를 불타는 가옥 속으로 집어 던져 태워 죽이기도 하였다. 얼굴 가죽을 벗기고 두눈을 뽑거나 어린 소녀를 성폭행한 후 죽이는 등 잔혹한 복수가 이어졌다.
현장을 지켜 본 미국인 선교사 마틴(Martin, S.H.)과 푸트(Foote)는 수기를 써서 당시의 참혹함을 남기고 있다.
“피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
소거 작전이 일어난지 27일 만에 확인 된 학살자가 3,469명에 이르고 있다. 4개 월여 계속 된 수색 및 방화, 살인은 계속된 것으로 보아 사상자는 몇 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간도를 벗어나 노령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에게도 똑같은 만행이 자행 되었다. 화룡현 장암동에서는 28명의 기독교인을 세워 과녁으로 만들고 사격연습까지 했다는 현장을 지켜 본 선교사의 증언까지 있다.
청산리 전투의 결과로 일본군은 중국에 압력을 넣어 독립군 토벌을 사주하거나 활동을 압박하였다. 중국의 압박과 일제의 공격에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하여, 때마침 호의를 보인 러시아의 거짓말에 속아 1921년 자유시(스보보드니市)로 이동한 후 도시 급수탑 앞으로 모이게 된다. 결집한 여러 독립군 부대는 적군 빨갱이가 동원한 탱크와 기관총에 2000여명은 무참하게 학살 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포로된 자들 또한 전선으로 끌려가 총알 받이가 되어 대부분 사망한다..
자유시참변 혹은 흑하사변으로 불리는 역사적 참변 이후 독립군의 존재는 사라졌고, 독립군 영웅 김좌진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공산주의 선동에 방해 된다는 이유로 암살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하며 독립군 역사는 막을 내렸다.
수십년 지나 김구는 만주에서 2000Km 떨어진 충칭으로 피신하여 광복군을 준비 했지만 변변한 무장도 하지 못한 300여명의 명색만 군대였다.
간도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통해 일제에 몰살 당한 간도 양민과 적국도 아닌 제3국의 손에 몰상 당한 독립군으로부터 당시의 우리 실력을 냉정하게 돌아 보아야 한다.
끔찍한 간도참변이 일어나 무고한 양민이 학살을 당하고 있음에도 같은 만주에 주둔한 독립군은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던 처지도, 조선인 양민 희생자 수가 독립군 수 보다 몇 배에 이르고 있음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간도참변은 일본군 무력이 직접 개입 되었지만 자유시 참변은 일본군의 총알 한방도 동원 되지 않은 외교력으로만 일어난 참사였다.
러시아 내전으로 연합군이 시베리아에 진주 한 후 1920년 연합군은 철군을 했으나 일본군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계속해서 주둔 하며 러시아를 압박, 자극했다.
철군 문제를 두고 일본과 러시아는 대련에서 만난다. 볼세비키 혁명 후 러시아 내정을 안정시켜야 하는 공산세력에 일본군 주둔은 껄끄러운 문제였고, 청산리, 봉오동 전투로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의 재공격과 무력활동이 한반도 내륙으로 확대 되는 것이 껄끄러운 일본이었다.
일본측 자료는 당사자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일러 의정서에 의해 과격파 군대가 일본군 주둔 지역 내에 침입할 수 없게 되었고, 불령선인 부대(한인독립군)도 궁벽한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중략) 이것은 일본군을 철병시켜 적백내전을 끝내기 위해 극동공화국의 배후 세력인 소련정부의 파격적 양보 덕택이다“
나의 독립군이라는 가려운 것을 긁어주면 나도 너가 가려워 하는 철군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거래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또 다른 곳에서도 드러난다. 같은 해 일본과 소련은 북경에서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에 관한 회의를 열어 어업조약을 체결한다. 이 때 일본 측은 소련영토 내에 일본에 유해한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있다며 조약불체결을 담보로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다.
홍범도 문제가 요즘 한창 시끄럽다. 그러나 홍범도는 첫째, 레닌으로부터 공적을 인정 받아 돈과 하사품을 받은 것 둘째, 자유시참변 한인포로 재판에 한인으로 참여 한 것 셋째, 소련군 대위가 되어 레닌과 빨갱이에게 충성한 것 넷째, 자유시 참변에서 살아남은 사할린부대 출신 김창수·김오남이 복수를 위해 배신자 홍범도를 살해를 하려 한것, 또 그들을 레닌으로부터 하사 받은 권총으로 사살한 것 다섯째, 레닌이 써준 증명서로 김창수 김오남을 사살하는 살인을 저질렀어도 방면 된 것, 여섯째, 레닌과 공산당의 도움으로 복지혜택을 받으며 호의호식한 것 등을 미루어 보면 홍범도는 러시아 빨갱이에게 협조하며 반역한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 된다.
자유시참변 이후 1920년대부터 조선은 만주, 연해주에서 조차 일본의 무력에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 없었으며 국내 무장투쟁은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1931년 만주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장학량(張學良,장쉐량)의 봉천군벌이었다. 장학량은 30만의 정규군과 18만명의 비정규군, 중국내 최대 규모의 함대와 300대에 달하는 전투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체적으로 병기창을 가지고 150문의 대포, 20만발의 포탄, 1천정의 기관총, 6만 자루의 소총, 1억발의 탄환을 생산했다. 그런 봉천군벌을 상대로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봉천군벌의 50분의 1에 불과한 1만 5천명의 관동군 병력으로 봉천군벌을 쓸어버리고 만주땅을 차지 한 후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군의 전투력은 세계 최강이었으며, 패권국과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군사강국이었다.
당시 일본의 경제력, 군사력 등 국제적 위상과 외교력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움직여 총알 한방 쏘지 않고,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독립군을 자유시로 결집시켰고, 몰살 시켰다. 일본의 국력은 조선이 범접할 수준이 아니었다.
냉혹한 국제질서 속에 혈혈단신 외롭게 투쟁한 이승만의 외교력에 나라를 되찾는 계기가 된 것은 하나님이 돌보신 기적일뿐이다.
삼일운동과 청산리 전투 등의 저항에 직면한 일제는 문화통치, 유화정책을 통한 식민지 경영에 나선다. 내선일체, 동화정책, 조선인 차별 완화 정책 등의 유화책으로 일제의 투자가 이어지고, 경제활성, 문화의 발전 등으로 이어져 한반도의 문명적 진보를 한 것도 사실이다.
유화정책의 이면에는 무장투쟁에 대한 조선의 실력을 외교회담 정도만으로 무력투쟁을 형애화 시켰다는 자신감과 군대와 돈을 들이지 않고서도 통치가 충분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사실상 무장투쟁은 자유시 참변 이 후 자취를 감춘 것도 사실이다.
유화책의 일환으로 문화, 경제 정책이 시행 되면서 동시에 황국식민화, 신사참배, 내선일체, 창씨개명, 식민화 교육 등 동화정책이 실천적 방법이 된다..
일제의 천황제도의 완성은 주자성리학, 민간신앙, 불교 등에서 취사선택 된 교리와 논리가 편집 되어 천황이 살아있는 신으로 군림하게 된다. 즉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인격(人格)에서 신격(神格)으로 올라서며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드는 어버이 수령 동지와 같은 권위가 주어진 것이다.
현인신(現人神) 천황의 권위를 위해 국가는 일개의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이 되었고, 국가신도(國家神道)의 부속물이 되었다. 천황은 국가 위에 군림하는 이슬람의 코란, 국가 위에 군림하는 공산당과 같은 존재가 되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이듬해 일제는 천황숭배를 위한 신사 보급에 나선다. 현재 안중근 의사 기념공원이 있는 자리에 조선신궁을 세운다. 여의도 면적 2배에 달하는 터를 잡아 1920년부터 공사비 156만 엔을 들여 남산에 총면적 12만 7900여 평(약 42헥타르), 경내 면적 7천평(약 2.3헥타르)의 당시로서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조선신궁은 훗날 1일 평균 5,000명~7,000명이 찾는 거대한 신사로 발전한다. 그리고이어 전국적으로 일본신사가 세워진다. 일성이와 정일이의 사회적, 철학적 영생을 기원하는 영생탑이 북녘땅을 지배하듯 일본신도의 신사가 조선을 지배하려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총독부령 제82호로 ”신사사원규칙“을 제정했고, 전국적으로 신사건립에 나선다. 1936년에는 ”개정신사규칙“을 공포했는데, ‘1면 1신사주의’에 따라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신사를 세웠다. 조선의 세워진 신사는 총 1,602사에 이른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황조신 아마테라스을 모신 최고의 신도사원에서 매년 일종의 부적인 신찰을 배포하여 신앙심 함양 및 종교적 결속을 다져왔다. 일제는 천황 숭배의 방법으로 미신에 불과한 부적배포를 확대하여 법률까지 제정하여 학교, 관공서, 상업시설, 가정에 배포 했다.
일본 신도는 힌두교에 버금갈 정도로 오만 잡신을 숭배한다. 우물신을 비롯한 각각의 생활에 관련 된 각각의 주관신이 있고, 정상에는 태양신 하마테라스가 있다. 그 태양신이 현인신은 천황이 된 것이다.
무협지에서나 나올법한 신궁대마(神宮大麻)로 이름 된 부적의 배포는 국가차원의 사업으로 시행 되었고 식민지에까지 확대한다. 식민지에 천황의 상징인 부적을 조선인 가정과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 붙여 놓고 현인신 천황에 대한 참배, 제사, 기도를 하게 하여 식민지 국민의 교화를 통해 만세일계의 황국식민으로 거듭나게 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우상화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인의 반자이 돌격, 카미카제 특공대, 1억옥쇄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에는 조선에 신궁대마를 배포한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중 일부만 보아도 일제가 천황 우상화를 위한 국가적 동원과 통제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6.05.16. ”영월군내 10여개소 부서공회당의 한쪽에 하마테라스, 공자, 석가, 예수, 신농씨 위폐 또는 사진을 봉안 매월 1일과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 부락적으로 경조사가 있을 때 개인적으로 경조사가 있을 때 공회당에서 제회합이 있을 때 참배 또는 기도를 할 것“
1938.12.11. ”여주 관내 9천대의 승입기를 총동원하여 그 노력에 의한 수익금으로 1만2천호 대마를 봉대시키고 가미다나(제단, 제구)를 봉안 여주신사 앞에서 재단법인 광제회지부 발회식을 거행“
1939.02.01. ”부산부 각 소학교 아동을 통해 각 가정에 가미다나(제단, 제구) 보급을 행하게 되어 30일 현재 2,028개를 배부“
1942.08.16. ”강원도 108만 도민에게 가미다나 봉제 보급실시“
매일신보의 기사는 사람이 있는 어느 곳이면 어디에나 신궁대마 부적판을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를 살았던 조선의 모든 사람은 어디에나 걸려 있는 신궁대마 앞에서 현인신 일본천황을 숭배, 참배 하여야만 했다.
신앙생활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으로서 국가, 사회가 강제 할 수 없는 것은 종교개혁의 산물로서 기독교 문명을 그대로 흡수한 일제가 종교의 영역만 흡수하지 못한 반문명적 아둔한 짓을 한 것이다.
천부인권을 가진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영역을 강제한 법을 제정하는 어리석음도 마다치 않았다.
1871년 ”신궁대궁사로 하여금 신궁대마를 반포시키는 건(神宮大宮司をして神宮大麻を頒布せしむる件)“을 제정했고, 1890년에는 칙령(勅令)을 내려 ”신궁서관제(神宮署官制)“를 공포·시행하였으며, 이를 조선과 대만, 남양군도 등 식민지로 확대한다. 반문명적 난동의 극치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탈레반이 저질렀던 폭력, 현세의 코란에 근거한 무슬림의 자살특공테러와 다를 것이 없다.
지금 세상에도 우리는 북괴의 주체사상교를 통한 잔인함과 무슬림의 지하드와 무자헤딘의 폭력성을 보며 종교적 독선에 근거한 이데올로기가 가져다 주는 잔혹함과 폭력에 치를 떨고 있다. 현인신 천황, 국가신도의 그 때의 멍청한 이데올로기는 앞으로도 일본이 문명국가로서 기억해야 할 반문명적 치욕으로 남아있다. 또한, 그 멍청한 이데올로기는 그 시대 스스로를 죽이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같은 민족으로서 북괴의 주체사상 멍에를 떠안아야 하듯이 말이다.
신사참배와 신궁대마는 먼저 종교적인 이유로 마찰을 일으킨다.
신사참배 문제는 많은 것이 내포된다. 종교인에게는 이방신을 강요하는 종교와 종교의 갈등이 되며, 일본인의 토테미즘 토속신앙이 강요 되면서 민족적인 문제가 되고, 지배자가 피지재배자의 사고와 생각을 억압한 자유와 양심에 대한 문제이며, 문명국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살아있는 신은 문명 충돌로 이어진다.
신사참배가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충돌은 재미삼아 미아리 점집을 찾아 죽은 귀신에게 점을 치는 행위 정도로 가볍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신도의 강제는 우선 각 종교와 교교(敎敎)간의 갈등을 낳는다. 결국 갈등은 훗날 기독교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이어져 민족과 독립이라는 문제로 확대 된다.
당시 조선 종교계에서는 기독교를 제외 하고는 특별한 신사참배 거부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석가가 깨달음을 남긴 불교는 시간이 가면서 인도 바라문교(힌두교)와 동화되고 변질 되면서 대승불교로 이어져 한국, 중국, 일본에 뿌리를 내린다. 힌두교는 사람보다 많은 숫자의 신을 모시는 다신교이다. 그들의 주신인 비슈누와 시바신 옆에 천황신상 하나 더 놓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종교이다.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많이 불교는 비교적 이방신에 대하여 관대했다. 대웅전에 앉아 있는 부처가 있는 반면 티벳에 가면 티벳부처가 있고, 태국에 가면 태국 부처가 있으며, 일본에 가면 일본 부처가 있어 각자의 대웅전을 지킨다.
1876년 부산에 거류하는 일본인을 위하여 일본불교의 최대 종파인 동본원사의 정토진종 승녀 오쿠무라 엔신에 의해 포교소가 세워진다. 어느날 조선인 승녀 이동인은 오쿠무라 엔신을 찾아 온다. 문명개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동인은 오쿠무라 엔신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본의 문명개화의 천지개벽을 보고 개화의 뜻을 두게 된다. 이동인은 일본을 찾은 김옥균 등의 개화파들을 만나 많은 영향을 주어 개화파의 문명개화 열정을 심어주었다. 이동인은 실종 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지만 고종을 만난 후 위정척사 열혈분자에게 암살 당한 것으로 추정 된다. 고종이 교사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일제를 통해 일본불교 사찰이 한반도 곳곳에 세워진다. 부산에 처음으로 들어 온 일본 정토진종의 포교소를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43곳의 대형사찰이 조선 전역에 세워져 일제의 문화통치에 협조하며 조선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일본불교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생활불교의 상징은 대처승이다. 해방 당시 사찰의 90%가 대처승(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승녀)일 정도로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불교가 남긴 영향력은 태고종과 조계종의 세대를 잇는 해묵은 갈등거리 이기도 하다.
일본불교는 일본신도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하며 참 많은 잡신이 일본불교를 지탱하고 있어 이방신, 미신에 대한 배타성이 크지 않았다 그러한 영향탓인지 조선불교계의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은 눈에 뜨이는 것이 없다.
유학은 유교로 불리기도 하지만 내세에 대한 관념이 없어 굳이 종교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사 등의 제식행위는 있지만 유학에 제사가 덧씌워 진 것은 공자 사후 1,500년이 지나 송나라에서 도교 제례를 가져다 조상숭배를 하면서 변질 되어 생겨난 것이다. 종교성에 있어서도 조상에게 기복을 구하는 정도이지 내세에 대한 개념은 없는 편이다. 또한 새로운 문명이 펼쳐지면서 일제 시대 유림과 유학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며 형애화 되어 있어 조직적인 저항은 불가능하기도 했다.
그 외 민족종교를 표방한 천도교, 대종교 등의 신사참배 관련 기록을 찾아 보았으나 남아 있는 기록이나 연구 논문 한편 찾을 수가 없었다. 이는 신사참배를 거부감 없이 받아 들였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천주교 또한 신사참배가 시작 된 후 어느정도 반발 했으나 천주교와 일제의 충돌로 빚어질 문제를 걱정하여 비오 11세 교황은 신덕의 문제(종교문제)가 아니라며 신사참배를 허용했다
.
천황은 일제의 상징이며 휴전선 너머 존재하던 어버이 수령과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천황숭배를 위한 신사참배는 일제가 식민지 경영에 있어, 일제의 정체성과 직결 된 정신적, 문화적, 종교적인 문제로 삼았다.
1920년 이후 한반도 전역에 일제신사가 세워졌다. 심지어 소록도에까지 일제신사가 세워져 조선인은 어느 곳에 있듯 신사참배에 동원 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법률까지 만들어 강제화 하였다. 신궁대마는 조선인 가정에까지 보급했고 사람이 모이는 장소라면 어김 없이 현인신 천황을 숭배할 수 있도록 제단을 쌓았다.
따라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일제의 모든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가장 큰 처벌을 받는 범죄였다. 신사참배 거부자는 치안유지법ㆍ보안법ㆍ불경죄 등 모든 법률을 동원하여 탄압했다.
1920년 이 후 일제는 유화책으로 한반도에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를 도입하였지만 경찰 인원을 4배가량 증원하였다. 이렇게 증원 된 경찰은 식민지 국민을 일제에 동화 될 수 있도록 한반도를 촘촘하게 감시하며 천황숭배 및 신사참배를 하게 했다.
그런 시대 조선에 살면서 무장투쟁은 상상할 수도 없었으며 제도권 안에서 일제의 정책을 벗어나는 계몽활동이나 집회를 하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엄혹한 시대였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슬픈 자화상이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은 즉, 독립운동으러 타격을 줄 수 있는 만큼 실력이 되지 못했고, 조선시대 보다는 진보된 세상이라 믿는 대중도 많았다 것을 인정하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바른 자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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