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3대 천재로 일컬어 지는 육당 최남선은 해방 후 친일파가 되었고 반민특위를 통해 기소 된다. 조선 최고의 계몽운동가, 독립투사, 잡지 및 신문 발행인, 톨스토이 번역가, 민족운동가, 만주건국대학교 교수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은 육당 최남선을 그를 단순한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역사의 연장선이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쓰고 시대일보를 창간하여 일제를 매섭게 질타하여 폐간을 당하는 등 그의 저항의 삶은 굵직했었다. 최남선은 1928년 일본의 역사 단체인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입맛에 맞게 역사가 길들여지는 것을 막아 보고자 한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일본 놈들끼리 멋대로 역사를 왜곡하게 놔둘 바에는 그 위원회에 참가하여 정확한 사료라도 확인해 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나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인에게 문호를 활짝 열고 대거 인재를 받아들인 만주국 건국기 조선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새로운 나라 건설에 참여하고 물밀 듯이 만주국으로 밀려갔다. 육당 최남선은 만주건국대학교 교수를 하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군국주의는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만들었다. 천황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영광이었다. 카미카제가 되어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은 신이 되는 길이었다. 그 광란의 시대 조선의 지식인은 징병과 징용, 학도병 모집에 나서야 했다. 천황을 위해 싸우자고 글을 써야 했다.
육당 최남선에게 친일 이유를 물었다. 일본이 그렇게 갑자기 패망할 줄 나는 몰랐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일본에 유학 간 모든 사람은 친일파라는 말을 하여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정작 자신의 아버지는 그시대 일본불교의 절대적 영향력으로 일본불교와 다름없는 왜색 짙은 태고종의 승려였다.
불교는 조선시대 엄청난 핍박을 받았고, 승녀는 8천 중 하나였고 한양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일제 시대 승녀를 한양에 살 수 있게 계급제를 폐지한다. 그런 일제에 불교는 식민지배에 매우 호의 적이었다. 비단 승녀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천대 받고, 매 맞고 수탈 당하는 백성은 일제의 법치주의 일제를 반겼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일본 유학파보다 일제를 반긴 그들도 친일파이다.
육당 최남선은 일제 시대 학도병 참여를 권유하는 글을 썼다. 동시대를 살았던 여운형도 ”반도학도병출진보“를 통해 천황을 위해 총을 들고 나서달라고 글을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노무현 정부에서 독립운동가로 훈장을 받고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지 않고 민족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
집안 대대로 일제 시대 판임관교원(교사)을 지냈고, 자발적으로 일제 학도병으로 지원한 장준하는 최남선이 사망하자 자신이 주필로 있는 사상계에 최남선을 추모하는 글을 올린다.
"육당 선생은 이 민족이 가장 암담한 절망의 골짜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항상 우리와 더불어 있었고, 우리의 가장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었다. 그로 인하여 민족의 생명은 싹을 부지하고, 겨레는 위안을 받고 희망을 갖추어 광복에 이른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한 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좌파들이 주장하는 쌀수탈의 일선에 있었던 농정계장 문재인의 아버지에 대한 친일은 쉬쉬 하면서 만주국 소위였던 박정희는 친일파라고 게거품 물고 떠든다. 저들가치의 기준을 알 수가 없다. 조선시대 완고하고 강퍅한 선비의 주장과 한치의 다름이 없다.
프랑스의 나치 부역 처벌과 독일의 유대인에 대한 사과를 비교하며 친일청산을 주구장천 이야기 한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은 5년간 전쟁 중에 있는 교전국이었고, 독일의 유대인에 대한 사과는 전쟁 중 600만을 가스실에 보낸 것에 대한 사과를 하고 있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가 아닌 것이다. 식민지 경영을 한 독일은 자신의 시민지배국에 대하여 사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죽고 죽여야 하는 전쟁과 식민지배는 다른 것이며 승전국과 패전국의 논리는 다른 것이다. 그런식의 논리라면 저들의 진영에서 전시였던 6.25 사변 때 반역한 무리들에 대한 성토는 있는지 모르겠다.
육당 최남선이 일본이 그렇게 빨리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일제 시대 일본의 국력과 실력 앞에 조선은 자력으로 독립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할 당시 일본과 조선의 국력은 12대 1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은 한일합방 후 1차대전을 맞이하고 급격한 경제성장을 하게 된다. 일본의 면직물이 유럽을 장악하다시피 돈을 벌어 들였고, 연합국으로 참전한 일본은 1차 대전의 피해를 거의 보지 않았다. 전쟁으로 선박이 파괴된 유럽을 대신하여 해운업 또한 급격하게 성장하여 바다를 지배했다. 1930~1940년대 조선과 일본의 국력의 격차는 수십배로 벌어졌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국력은 미국의 30분의 1에 불과한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국력 차이는 이보다 더 했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 식민지 시대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의 쟁취는 불가능했다.
솔로몬 이 후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 포로의 힘이 조선의 힘이었을 것이다. 국가를 찾는 유대인의 노력은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하여 유프라테스 강가에삼삼오오 모여 시온을 땅을 위해 슬픈노래를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선지자 느헤미야는 시온의 백성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짓고 나라를 되찾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즉, 오로지 고레스에 기름 부은 은혜로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독립의 섭리를 통찰하고 있었던 사람은 국부 이승만이었다. 태평양 전쟁을 예견한 후 전쟁이 끝나면 조선은 독립을 맞이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한 선지자 느헤미야였다.
만주와 중국에 흩어져 독립운동을 했던 김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안창호와 서재필은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국부 이승만은 독립이 되는데 국적을 왜 취득하냐고 반문했다. 조선은 사라진 나라였고 무국적자 망명객으로 온갖 고난과 불편함을 감수하며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어느날 한성감옥의 어둠 속에서 성령의 은혜로 회심한 이승만은 동굴 속에서 나와 세계를 바라 보았다. 세계를 한눈에 펼쳐 놓고 바라 보는 지혜의 은혜를 받았다.
국부 이승만을 공부하며 과거시험 공부한, 완고한 약관의 선비 이승만이 어떻게 그 처참한 감옥 속에서, 모든 것이 단절 된 감옥 안에서 독립정신을 썼을까를 수백번 반추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될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승만 그의 삶 전부는 조선의 우상을 타파하려는, 동굴 속에 갇혀 그림자만 보고 있는 조선인을 동굴 밖의 태양으로 인도하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조선은 단순하게 일본에 경제력과 생산성의 차이에서 가져오는 격차만으로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세계관 속에 갇힌 지독한 폐쇄성이 조선을 식민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성리학 하나 만으로 바라 본 세상이 조선이었다.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대역죄와 같은 사문난적으로 죽음을 당해야 했다. 삼국시대 신라의 교역은 중동까지 이른다. 고려시대는 국제도시 벽란도를 통해 세계와 교류하던 시대였다. 조선은 역사 발전의 진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암흑의 시대였다. 조선은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을 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보다 더 지독한 성리학 원리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도쿠가와 시대부터 일본은 유학을 발전시켜 많은 성과를 이룬다. 우리는 항상 일제 시대 이전에 일본보다 문화와 학문이 앞섰다고 자위한다. 그러나 일본은 14세기부터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국가적 실력을 쌓았고 발전을 거듭했다.
그 일례가 서양에서 받아들인 조총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전쟁 발발 전 대마도주가 선조에게 진상한 조총 두자루를 보고 쏘면 쏘는데로 명중하냐며 타박 했고 의정부 창고에 처박았다. 이순신 장군은 노획한 조총을 리버싱하여 조총을 연구했고, 훗날 조선에서 만들어진 조총은 나선정벌의 조총부대를 무장시켰다.
일본은 에도시대 이미 서구세계보다 문맹율이 낮았던 문명국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신문사가 에도시대 만들어진 요미우리 신문이다. 에도시대 대중이 신문을 읽을 정도로 문화를 향유한 문화대국 이었다.
조선 통신사가 에도를 방문하고 북경의 영화가 에도에 진다 라고 한탄하고 있으며, 에도에 있는 거대한 서점과 골목 골목에 들어서 있는 수 많은 서점은 장관이었다고 감탄하고 있다.
일본은 학문을 받아 들임에 있어 냉정했고, 개방성과 다양성으로 포용했다. 유학은 일본에서 국학(国学, こくがく)으로 이름을 바꾸고 진보했다. 일본의 국학자 야마자키 안사이가 공맹의 도를 설하고 있다.
”지금 저나라(중국)가 공자를 대장으로 삼고 맹자를 부방으로 삼아 수 만의 기병을 이끌고 와서 우리나라를 공격한다면 공맹의 도를 배우는 우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묻고 대답이 없자 “불행하게도 만약 이러한 재액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들은 몸에 견고한 갑옷을 걸치고, 손에 예리한 병기를 잡고, 그들과 일전을 수행하며 공맹을 잡아 국근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맹의 도다”
조선시대 저런 주장은 가문의 멸문을 피하지 못할 사문난적이 된다. 일본의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유교 경전과 중국 성현의 위선과 한계를 꼬집고 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싶고, 큰집에서 살고 싶고, 돈을 손에 넣고 싶고, 사람에게 존경 받고 싶고,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가 인간의 본래적인 마음이다. 그런데도 이를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면서, 오히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태도를 대단하게 생각하여 마치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듯한 척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것은 저 중국풍의 시끄러운 위선과 허위에 다름이 없다“
도덕성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는 유학의 위선을 통렬하게 꼬집고 있다. 안빈낙도라는 허울 좋은 사대부의 명분은 위선의 정점이다. 생산성이 전혀 없는 일하지 않는 사대부의 안빈낙도는 누군가의 땀으로, 착취와 수탈로 만들어진다. 그 시대 그런 위선의 사대부가 도덕이라는 잣대로 인간을 판단 했다.
일본은 유교의 본질에 집중했다. 조선의 성리학은 유학의 본질은 사라졌고 중화주의에 매물 된 노예근성이 본질이 되었다. 대국에 대한 복종과 사대주의가 정의가 되었다. 본질이 사라진 껍데기에 불과한 성리학이 500년간 조선을 지탱한 것은 기적이었다.
중국이 공자학원으로 중화주의를 설명하고 있지만 유학은 중화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학문이다. 청동기 시대 공자가 태어 났을 때 중국 대륙은 수십개의 국가로 분열하여 끊임 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나라를 시작하여 15여년이 넘게 주변국을 설파하고 다녔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고, 진시황은 공자의 현학적 주장에 질려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유학서적을 불태워 버렸다.
오죽하면 당시 공자를 상가집을 기웃 거리는 초라한 개에 비유하여 상가집개(상가지구:喪家之狗)라고 불렸다. 따라서 유학은 중화주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학문 또는 하나의 철학 사조에 불과했다. 이런 유학이 본말전도(本末顚倒)되어 국가통치의 이념이 되어 그 끔찍하고 잔혹한 조선시대를 구한말까지 이어가게 했다. 북괴의 주체사상과 다를 것이 있을까 싶다.
일본은 학문과 문화를 받아들임에 있어 조선과는 다른 탁월함으로 개방적이었고 본질에 충실하며 포용적이었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우리나라 경부선과 경인선을 건설한 사람이다. 고종이 개인적인 치부를 위하여 철도부설권을 미국의 제임스 모스에게 팔았다. 시부사와 에이치는 그 철도부설권을 다시 사들여 경인선과 경부선을 놓아준 사람이다.
그는 일본은행의 초대총재를 역임했고, 중도에 퇴직한 후 증권, 건설, 맥주, 방적, 제당 등 분야를 망론하여 500여개의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근대 일본경제의 토대를 놓았다. 일본은 그를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렀다.
그는 어려서부터 논어에 심취해 평생 논어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한손에 논어를 들고 경제를 일으킨 사람이다. 그의 저서 “논어와 주판”에 자신의 경제관을 밝히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치에 맞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그러나 그 이치에 맞게 하면 국가사회의 이익이 될까를 생각하여 더욱 나아가면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해 봤을 때 만일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국가사회에 이익하는 것이라면, 단연 자기를 버리고 도리 있는 곳에 따를 것이다”
같은 논어를 읽고 같은 맹자를 공부하였음에도 20세기 초 조선과 일본의 국가적 운명을 달리하게 만들었다. 시부사와 에이치는 논어를 일고 도덕 국가경제로 일본의 방직물이 유럽을 장악하며 세계적 부국의 반열에 오르게 했고 고종은 그 돈에 취해 그 돈을 받고 나라를 팔았다. 포용성의 차이가 조선과 일본은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가 백자 기술을 전수한 이삼평을 일본은 신사를 만들어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삼평의 신사에 “아리타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켜 일본을 아시아 경제 강국으로 만든 이삼평의 업적을 기리고, 번영을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로 신사가 설립됐다” 라고 쓰여져 있다. 조선의 도공은 극한 차별과 굶주림으로 죽어갈 때 일본은 이삼평을 신으로 모셨다. 이삼평의 백자기술은 일본의 채색도기로 진보하며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을 장악하며 벌어들인 돈은 일본 근대화의 돈줄이 되었다ㅣ
일본 근대화의 또 다른 돈줄이 된 것은 은의 수출이었다. 은본위제가 실시 되던 그 시대 은의 보유는 국력의 척도였다. 일본은 이와미 광산에서 캐낸 은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 들였고, 그 돈은 고스란히 일본 근대화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와미 광산에서 원석에서 은을 분리하는 기술을 배운 것은 조선 연산군 때 연은분리법을 개발한 김갑불과 김검동으로부터 였다. 이 기술은 당시 은 생산을 두배로 늘리는 최첨단의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쫒아낸 중종은 연산군 때의 사치풍조 척결과 왜인들이 은을 가지고 와서 무역을 하여 나라에서 쓸 은이 충분하며 단천 은광을 폐쇄시킨다. 최첨단 기술 연은분리법은 그렇게 사장 되었다.
당시 세계 최대의 은광산 중 하나인 이와미 광산을 발견한 것은 가미야 주테이라는 상인이다. 가미야 주테이는 조선의 경수와 종단이라는 기술자를 초빙하여 연은분리법을 배웠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즉, 연산군 때 연은분리법을 개발한 조선인은 중종이 은채광을 중지시킴으로서 일본에 기술을 전수해준 것이다.
청나라를 건국한 청태조 누루하치는 백두산 일대에서 산삼을 캐서 명나라에 팔던 심마니였다. 중국에 산삼을 팔고, 홍삼을 만드는 법을 개발하여 막대한 돈을 명나라로부터 벌어였고, 그 자금으로 명나라를 무너트리고 청나라를 세웠다. 고려 인삼의 명성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물불 가리지 않고 사야 하는 월드 베스트 상품이었다. 베트남 왕은 통치를 위해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으로 쓰여졌다. 조선의 인삼은 왕과 양반의 배를 채워주는 돈벌이에 불과했지만 누루하치에게는 천하를 얻는 무기가 되었다.
성리학은 개방성과 다양성을 사문난적으로 규정했다. 그런 폐쇄성으로 인해 조선은 무너질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어쩌면 역사의 순리였다. 광기의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영국을 비롯한 서구세계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
국부 이승만은 자신의 저서 독립정신을 통해 부국강병의 첫 번째 방법으로 세계와의 통상을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는 수출을 통한 세계와의 통상으로 가능했다.
기독교 문명이 한반도에 들어 온 것은 세계와 호홉하는 포용성을 주었다. 수천년 폐쇄된 반도국가를 수출품을 실고 대양을 항해하는 화물선의 60%를 메이드인 코리아가 되게 하였고, 열척 중 한척은 메이드인 코리아 상품이 실려있는 통상의 나라, 개방의 나라가 되게 했다.
성리학의 조선은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지수 1위 주체사상의 북괴를 바라보게 한다. 틀린 것을 찾을 수 없는 조선과 북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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