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로 들어오라”- 우당 도서관
제주시내 동쪽 언저리에 바다를 접해 사라봉과 별도봉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여기 남쪽 기슭으로 우당 도서관이 있다. 우당도서관의 남쪽에는 국립제주박물관이, 동쪽에는 제주교육대학이, 서쪽에는 의병항쟁기념탑이 있는 모충사가 우당도서관을 호위하듯 둘러서 있다.
우당 도서관의 정문 담벼락에는 담쟁이가 덮여 있었다. 담쟁이는 연초록을 띄다가 가을이 되면 빨갛게 물들어 도서관 전체를 고풍스런 분위기로 덮게 될 것이다. 푸르고 무성한 담쟁이가 빨갛게 물드는 것은 뜨거운 학구열을 받아서일 것이니, 빨갛게 물드는 담쟁이야말로 우당도서관의 상징일 것이다.
우당 도서관의 ‘우당’은 김용하(金容河) 선생의 아호인 우당(愚堂)에서 따온 이름이다. 우당 김용하는 제주가 낳은 위대한 선각자이다. 제4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스승이기도 했다.
우당 선생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선친으로 1896년 애월읍 하귀리에서 태어났다. 평양보고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에 2년 동안 유학했다가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 법문학부를 졸업했고, 졸업 후에는 교사로 재직하였다. 대구사범학교 재직 시에는 교장을 지내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자로 만나게 된다.
우당 선생은 교육계에 몸담고 있다가 1949년 4월에 4대 제주도지사로 부임하게 된다. 제주도지사로 많은 노력을 쏟았으나 불미스런 사건으로 취임 8개월 만에 지사직을 퇴임 당하게 되고, 우당 선생은 명예회복을 위하여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리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가 6.25가 터졌고, 6.25 난리 통에 선생은 북으로 납북되었다. 당시 선생의 나이 54살이었고 슬하에 5남 1녀가 있었다.
1981년 6남매 중 셋째인 김덕중 박사가 제주에 휴가차 내려왔다가 지역 유지들과 기관장들의 모임에서 제주의 숙원인 도서관 건립 얘기를 듣게 되었다. 김덕중 박사는 서울로 돌아가 형제들에게 이 얘기를 꺼내고 형제들기리 기꺼이 의견일치를 보게 된다. 우당 도서관은 태동하는 계기였다.
도서관 건축공사는 당시 제주에서 항만사업을 하고 있던 둘째인 대창기업 김관중 회장에게 일임되었다. 김관중은 김우중과 공사비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면서 이런 발언을 했다.
“금액 정해놓고 지으려고? 그러면 흡족한 도서관 못 올리지. 더구나 영원히 남는 걸 짓자면서? 그럼 그건 돈으로 계산이 안 되는 건데 그보다 더 좋은 장사가 어딨어? 막 집어넣자!”
우당 도서관은 설계 당시에 추정 공사비가 17억 원이었다가 완공 시에는 도서와 부대시설을 제외하고도 28억 원이라는 공사비가 소요되었다. 그야말로 아낌없이 ‘막 집어넣은’ 결과였다. 우당 선생의 자식들은 잃어버린 아버지를 기리고,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도를 위해서 우당 도서관 건립에 아낌없이 자금을 쏟아부었다.
우당 도서관은 1984년 2월에 개관되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의 결과로 우당 도서관은 오늘날까지 장서 규모나 좌석 수에서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도서관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도서관이 세워진 지 40여 년이 흘렀지만 최근에 건축된 건물처럼 도서관의 외관은 심플하고 도서관 장서는 42만 권에 육박하고 있다. 물 속 말고는 놀러 갈 데가 없었던 제주의 청소년들에게 “저기로 가라”고 가리킬 곳이 필요했다는 지역 유지들의 바램, 그리고 아버지를 그리는 자식들의 애틋한 마음, 이런 것들이 합쳐져 우당 도서관은 탄생했다.
도서관 로비에는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달려야 한다’ 라는 액자가 걸려있다. 우당 선생은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도서관 로비 비문에 새겨진 ‘弘益人間(홍익인간)’은 우당 선생의 서체이다. 1989년에는 우당 선생의 흉상이 제막되었다. 우당 선생의 흉상은 도서관 입구에 배치되어 도서관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당도서관에서 공부에 지쳐 도서관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나, 마음이 바람 같아 좀처럼 공부에 열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우당 도서관에 가서 서보면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이 소리는 후대들을 생각했던 제주 선대들의 목소리다.
“샛길로 빠지지 말고 여기로 들어오라”
비바람
* 사진 일부는 네이버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