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석달 전 겨울 인촌 김성수는 국부 이승만으로부터 한 통의 밀서를 받았음을 자서전에서 회고하고 있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
국부 이승만의 밀서를 받은 김성수는, 송진우, 현상윤과 당시 최대 조직이었던 천도교를 동원하기로 작정하고 손병희의 오른팔 보성학교 교장 최린을 설득하였고 결국 국부 이승만이 보낸 밀서가 도화선이 되어 3.1운동이 일어난다.
3.1운동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그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선택하는 것이지 다른 민족이 결정할 수 없다는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일어 났음은 학교 교과서에서도 가르친다.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한 윌슨은 이승만이 박사과정을 밟은 프린스턴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이승만의 스승이었다. 이승만의 인물 됨을 알아본 윌슨은 이승만을 특별하게 아꼈다. 이승만은 윌슨의 집으로 초청받아 여러번 식사를 하였고, 윌슨의 둘째 딸 제시 윌슨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프린스턴 대학 시절에 이승만은 제시 윌슨과 연애 감정에 빠진 일이 있을 만큼 각별했고 그녀는 한국으로 가서 YWCA 봉사를 생각할 정도로 이승만과 한국을 좋아했다.
러일전쟁 결과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강화 되면서 고종은 미국에 손을 벌린다. 그러나 미국으로 갈 마땅한 영어를 구사 하는 인재가 없었다. 결국 이승만을 주목하게 되고, 선교사들의 꾸준한 구명활동이 이어지면서 5년 7개월만에 출옥한다.
고종은 출옥한 이승만을 만나고자 했으나 격변하는 세계질서 속에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 쫓는 고종이 고와 보일리 없었고 이승만은 고종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죄수복을 벗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명색이 황제인데 만남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국부 이승만의 배포를 갈음할 수 있다.
고종의 밀서와 이승만을 돌봐 준 선교사들이 써준 추천장 십여장을 가지고 배에 오른 이승만은 씨어도르 루스벨트를 만났으나 아무런 성과를 낼 수 없었다. 냉혹한 국제질서 속의 제국주의 시대 미국이 조선을 지켜 주어야 할 아무런 실익도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이승만의 도미 목적은 유학이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배재대) 2년 수학을 인정 받아 조지 워싱턴대 문리대 3학년으로 입학한 후 하버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과정까지 5년만에 끝낸다. 이러한 단기간에 미국 최고 명문대를 섭렵한 기록이 또 있을까 싶다. 6세에 한시를 지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목 받은 이승만의 천재성과 한성감옥에서의 살인적인 수학과 독서가 밑바탕이 되었다.
이승만은 가난한 고학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7대 외아들 태산군까지 데리고 가난한 고학생으로 살아야 했던 이승만은 학업 중 틈틈이 강연회 등을 다니며 받는 몇푼 되지 않는 강연료로는 학비와 아들 양육에 턱없이 부족했다. 학업을 포기할 수도 자식을 버릴 수도 없었던 이승만은 지역신문에 아들을 양육하여 줄 독지가를 찾기에 이른다. 어렵게 양육자가 찾아 아들을 맡겼으나 1년 후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어렵게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이승만은 박사과정을 밟을 경제적 여력이 없어 많은 고민에 쌓이게 된다. 조선에서 알고 지낸 미 장로교 선교부의 어니스트 홀 목사를 만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 하게 된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어니스트 홀 목사는 모교의 인맥을 동원하여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교 입학을 주선했다. 그리고 가난한 고학생이 숙식할 수 있는 프린스턴 신학대 기숙사인 캘빈클럽에서 무료로 숙식하며 지낼 수 있게 주선하여 준다.
프린스턴 대학은 미 장로교가 세운 가장 정통한 칼빈주의 대학이다. 하버드 대학은 회중교회(침례교계열)에서 세웠으며, 대다수 아이비리그 명문 대학은 물론이고 미국에서 명문대로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대학은 개신교 교단이 신학연구와 인재육성을 위해 설립 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을 다니며 프린스턴 신학대에 가서 청강하는 등 칼빈주의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다.
캘빈클럽에서 무료 숙식을 하게 된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 시절이 가장 편한 시기였다. 학비와 숙식 걱정 없이 궁핍에 쫓기지 않아도 되어 공부 외에는 신경 쓸 것이 없었던 때이다. 프린스턴 대학원 앤드류 웨스트 원장은 이승만을 각별하게 돌보아 준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생활을 가장 즐거운 학창시절로 기억 했으며 그의 스승 어드먼 박사가 박사과정을 수료할 수 있게 베풀어준 호의는 평생 잊을 수 없다고 술회하고 있다.
무섭도록 공부한 이승만은 1910년 6월 14일 프린스턴 대학 졸업식날 이승만은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동양인 최초 미국 명문대학교 프린스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기쁜날 이승만은 졸업식 날 주체할 수 없는 우울함과 슬픔을 참아야 했다. 졸업식에서 그는 되뇌였다.
“나의 준비기간은 끝났는데 나는 깊은 슬픔을 느낀다. 내가 가서 일해야 할 한국은 이제 나의 나라가 아닌 것을...”
미 해군은 미국 국방비 절반을 쓰고 있으며 300만톤이 군함을 가지고 있으며 전세계 항공모함 3분의 2를 가지고 있으며, 항공모함 한 대만 있으면 북한의 모든 화력을 지워 버릴 수 있다. 미 해군의 공군력은 러시아를 압도적으로 능가하며 세계 2위이다. 1위는 미 공군이다. 그런데 미해군의 최대 임무가 세계 상거래 질서를 유지를 위하여 즉 장사꾼들의 비즈니스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세계의 무역물동량의 90% 이상 바닷길에 의존하고 있다. 식량자급율이 20% 중반대에 불과한 우리나라는 국내에서 생산된 식량은 1월부터 3월까지 먹고 살면 그 다음부터는 수입하여 들어오는 식량에 의존하여야 한다. 우리나라 바닷길 막히면 인구 중 75%는 당장 굶어 죽는 생지옥이 될 것이다.
세계의 바닷길은 안전하다. 소말리아 해적 몇 명 빼고는 상선과 군함, 여객선 등 공해(公海)상 항행은 그 어떤 제약을 받지 않는다. 세계는 국제법상 선박의 항행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
공해를 자기 바다라고 우기며 남중국해에서 시장 난전에서 구역 싸움 하는 왈패처럼 가끔 중국이 몽니를 부린다. 중국 같이 머리가 부족한 열등 국가 빼면 바닷길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중국이 자해하며 남중국해에서 어쩌다 한번 난동을 부려도 세계의 바닷길은 청정하다. 덕분에 세계는 자유무역을 통한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GDP대비 무역비중이 84.8%에 이르고 있어 시중에서 유통되는 돈의 100원 중 85원은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고 나간 돈이다. 세계에서 바닷길 항행의 자유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는 국가가 우리나라이다.
무역으로 오늘의 번영을 일군 중국이 남중국해를 두고 몽니를 부리곤 하지만 그 바닷길이 막히면 굶어 죽는 것은 짱깨 스스로 임에도 그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은 멍청한 족속임에는 틀림이 없다. 미국은 구경하라며 항공모함을 보내 대만해역을 관통한다. 중국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도 미국의 항모를 대적할 힘은 최소한 100년 이내에 생길 일이 없으며 바닷길을 지키는 미국의 항공모함은 힘의 상징이다.
지구촌 어느 세력이든 바닷길을 막으면 미 해군이 가서 혼내 준다는 경찰국가 미국의 자유무역에 대한 의지는 단호하다, 석유 수송로를 지키기 위하여 미 항공모함 2대는 걸프만에 24시간 떠 있으며 작전을 한다. 전세계 모든 해군력이 결집하여 미해군과 싸워도 미해군은 여유롭게 제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미국과 미국 시민의 세금으로 미해군을 통해 전세계에 공급하고 있는 항행의 자유라는 공짜 상품(freedom of navigation)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공공재이다.
이승만의 졸업논문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다.
전쟁 당사국 이외의 비교전국인 중립국가가 전쟁 당사국과의 통상에 대한 논문이다. 미국을 모델로 연구 된 이승만의 논문은 유럽국가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통상을 하는 미국은 해상에서의 중립교역의 확보가 늘 관심사였다. 이에 대한 연구논문이며 오늘날 항행의 자유를 보장하여 위하여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미국을 염두에 둔 듯 해상에서의 중립을 박사논문으로 선택했다.
항행의 자유는 시대가 갈수록 강화 되어 갔고 이러한 진보는 전시가 발생하면 항행을 할 수 없는 적대적 작전 영역은 제한되고, 중립교역의 자유가 확대되고 보장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다. 미국은 지속적으로 자유무역주의를 강화시키며 세계의 통상을 보호하고 세계는 무역을 통한 번영을 누릴 것이다.
국부 이승만은 독립정신의 6대실천강령을 통해 세계와 통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선지적 혜안은 한성감옥의 혹독한 수련과 그의 천재성이 졸업논문으로 완성 되었다.
미국에서는 권위 있는 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된 서적을 학술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한다. 프린스턴 대학은 이승만의 졸업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하였고, 윌슨이 국회연설에서 인용하여 연설 할 정도로 탁월했다.
서울대 법대 정인섭 교수는 100년 동안 국부 이승만의 논문을 뛰어넘는 청출어람 하지 못하는 후학들을 심하게 매질했다.
“사실 19세기까지 전시 중립법 발전에 관한 한 100년이 넘은 이승만 대통령의 연구 이상 자세한 글이 아직 국내에서는 발표된 바 없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후 이승만은 귀국하여 월남 이상재 선생과 같이 YMCA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며 거대조직으로 만들고 YMCA 교장을 맡아 교육과 강연을 이어갔다. 이승만을 중심으로한 기독교 세력의 결집에 조선 총독부는 끊임없는 견제가 이어지다 급기야 105인사건이 터지게 된다.
이승만과 윤치호만 잡으면 정국이 잠잠해 질 것이라 생각한 조선 총독부는 윤치호를 잡아 가두었고 이승만을 잡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백척간두 위기의 순간에 국제 YMCA 총재 모트 박사가 서울로 달려와 “미국 기독교의 주요인물 이승만을 체포하면 미국은 물론 국제적 반발이 일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협박했다.
당시 미국내 기독교 인맥과 여론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존재는 미국 사회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또한, 일본은 미국 여론에 촉각이 곤두설 수 밖에 없었고, 일본은 다 잡은 대어를 포기하며 “이승만 퇴거 명령”을 내린다. 결국 조선을 떠나게 된 이승만은 기찻길에 올라 부산으로 향했다. 33년의 길고 긴 망명객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는 잔잔한 부산 앞바다의 정적을 깨우며 이승만의 가슴을 후벼팠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독립을 선언한 대륙회의가 열렸던 필라델피아에 미주에 있는 한인대표 150명이 집결했다. 50대 중반의 서재필이 의장을 맡았고, 이승만, 이대위, 민찬호, 윤병구 등이 집행부의 중역을 맡았고, 유한양행 사주를 지내는 유일한, 김노디, 조병욱, 임병직, 정한경 등 20대 청년도 참가하고 있었다. 1차한인대회로 명명하고 한국도 미국의 건국과정과 유사한 방식으로 새로운 국가건설에 착수했음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행사였다.
한인대회는 5가지를 제안한다.
1) 미주 교포들은 민주주의 원칙을 신봉하는 기독교 인사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지지.
2)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나서며 자유, 민주주의, 기독교라는 가치를 공유함을 강조.
3) 새 나라는 미국 민주주의를 본받아 피통치자의 동의에 기초해야 하고, 정부는 입법부와 행정부로 구성되어 상호 견제하고,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여 조약을 맺으며, 신앙의 자유를 비롯하여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나라가 되어야 함.
4) 일본이 유럽식 군국주의를 포기하고 한국에서 철수하면, 한국은 동북아의 우호적 완충국이 되어 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하게 됨을 설명.
5) 미국은 임시정부를 2천만 우리 민족의 의지를 대변하는 정부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우리의 꿈은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 천명.
필라델피아 한인대회는 미국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친한파가 모였다. 특히 기독교계 저명인사가 주축이 되었다. 성공회 사제 톰킨스(필라델피아 홀리 트리니티 교회 담임목사), 장로교 목사 매카트니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 정통 장로교인), 천주교 신부 딘 (빌라노바 대학 총장이자 수학과 교수)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이스라엘 건국과 억압받는 국가의 소수민족 대표, 공산주의와 싸우는 저명인사가 참여한다. 유대인 신문기자인 베네딕트는 이 대회 성공의 숨은 공로자로서, 유대인 회중교회 지도자 버코비츠의 참여를 이끌었다. 체코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오벌린 대학 교수 밀러(하버드 대학 사회학 박사)도 힘을 보탰다. 또한 볼세비키와 싸운 러시아 선교사 출신 샤트 교수도 참여해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 경고했다.
이승만은 군중을 주도하여 가두행진을 벌리고 미국 독립기념관으로 가서 일본을 상대로 한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미국언론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AP 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되었고, 미국 언론에만 최소 수백 개의 기사가 실렸다. 3·1운동에 대한 일본 당국의 가혹한 탄압이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에 알려지면서 한국에 대한 동정적 여론을 이끌어 냈다.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면서 한국 독립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톰킨스는 ‘League of Friends of Korea’ (한국친우회)로 이름을 바꾸고 회장으로 취임하고 장로교 및 감리교 교회와 기업인들이 중심이 되어 2만5천명의 회원을 가진 거대 조직이 된다. 1921년이 되어서는 연회비 3불을 내고 Korea Review 라는 한국친우회 잡지를 구독하는 회원이 2만 5천 명이나 되었다.
우호적인 미국 언론의 보도을 이끌어내며 이승만과 서재필, 정한경은 교회와 학교를 주무대로 하여 미국 전역을 돌며 독립을 호소했고 한국의 독립에 관한 서적을 출판했다.
기독교로 건국한 나라 미국에서 교회의 위상은 막강했다. 상, 하원 의원은 주말에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목숨처럼 여겼고, 목사의 추천장은 장관의 추천장보다 우선했다. 이승만이 미국에 유학할 당시 선교사가 써준 십여장이 넘는 추천장은 엄청난 권위를 가졌던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 주류사회에 네트워크를 늘려갔고, 특히 교회를 통한 네트워크의 파워는 외교독립론의 가장 근원적인 힘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맥아더를 이미 소령 때 알아보고 인맥을 구축했다. 맥아더 장군의 대한민국에 대한 헌신은 이미 이승만의 인적 네트워크 안에서 작동되고 있었고, 6.25 사변 때 미군파병과 전후복구에 결정적이고 막대한 도움을 준 한 프레데릭 해리스 상원 원목도 이승만의 기독교 인맥 네트워크 안에서 작동되고 있었다. 국부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신앙심은 깊었다. 깊은 신앙심은 미국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기독교를 움직여야 함을 간파하게 했다. 그것은 우리의 축복이었고 사형수에서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한 것은 전적인 한성감옥의 회심과 성령에 힘입은 기름부음이었다.
그 때 하나님의 뜻 그것은 한반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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