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대부흥으로 한반도와 대중은 성령의 불길에 휩싸여 있을 때 한성감옥에서도 또 다른 성령의 역사함이 시작 되고 있었다.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성경책에 눈길 한 번 준 적 없었다. 고문으로 온몸을 피칠 한 청년 이승만은 차거운 감옥바닥에 집어던져진 자신도 모른 채 저절로 하나님을 찾으며 짧막하게 기도 했다.
“하나님, 저의 영혼을 구해 주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 주시옵소서”
감옥 찬바닥에 버려진 청년 이승만의 목에는 10㎏ 넘는 칼을 메고 있고, 가슴과 두 팔 두 손목은 수갑과 오랏줄에 채워지고 묶인 채 두 발목은 무거운 차꼬가 채워져 있었다. 매일 끌려가 형틀에 묶여 매질을 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허벅지 뼈가 튕겨질듯 주리를 틀었고, 손가락 사이에 대나무 토막을 끼워 손가락 살집이 떨어지지도록 비틀며, 불에 달군 인두로 지졌다.
고종은 철종의 부마 박영효에게 열등감을 심하게 가지고 있었고,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철종의 부마였던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는 일찌기 문명개화에 눈을 떠 오랫동안 일본에 머물며 많은 공부를 하여 개화지식인으로 명성을 더해갔다. 그가 고종에게 상소한 "개화건백서"는 조선의 활로를 찾아 주고 있었음에도 고종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일본에 있는 박영효에게 경고하듯 고종에게 청년 이승만을 자신의 역린을 건드린 반드시 죽여야 할 역적이 되었다. 고종은 청년 이승만을 특별히 괴롭히기 위하여 체포전에 특별지시까지 했다.
체포된 청년 이승만 경무청으로 인계 된 후 수구파의 일원으로서 황국협회에서도 악명이 높았던 박달복에게 다시 넘겨졌다. 청년 이승만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박달북은 이승만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실에 연락을 취하여 그를 엄하게 심문해도 좋다는 고종의 특별 지시를 받았다. 박달복은 경무청의 안쪽 어두운 취조실에서 고문을 했다. 고문실은 두꺼운 돌벽으로 싸여 있어서 비명 소리가 밖으로새어 나가지 않게 되어 있었다
이승만 전기를 쓴 로버트 올리버 교수는 그의 저서에 청년 이승만이 박달복에게 당한 고문의 잔혹함을 남기고 있다.
"이승만은 두터운 벽에 차단되어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과는 단절된 상태에서,그를 위해 많은 것을 베푼 선교사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이런 고통을 당하느니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심정을 체험했다. 살갗을 파고드는 포승줄에 두 팔이 묶인 상태에서 양다리에 주리를 틀고, 손가락 사이로 대나무 가지를 넣어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비트는 고문을 당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매일 곤장을 맞아 그의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출중한 체력이 아니었다면 그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밤이 되면 고문실에서 끌려나와 어두운 지하 감방에 던져졌고, 날이 밝으면 다시 끌려나와 또고문을 받았다."
박달복으로부터 당한 끔찍한 고문은 국부 이승만에게 평생 트라우마가 된다. 박달복을 "나와 가장 원한에 사무치는 원수", "나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풀어대는 격분한 동물들" 이라고 불렀다. 국부 이승만은 77세 때에 쓴 수기에서 박달복과 한성감옥에서 당한 고문을 떠올리며 "이따금 나는 꿈속에서 감방에 들어가 있다" 라고 썼다. 고문 당시를 묻게 되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걸 잊어버리게 놔둘 수는 없나"라고 대답했다.
국부 이승만은 고문 휴우증으로 한여름에도 팔에 추위를 느끼는 신경이상으로 고문 휴우증에 시달렸고, 냉기를 느낄 때마다 입김을 손에 후후 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중 가장 고난을 많이 받은 분은 국부 이승만이며, 가장 가난하게 성장한 대통령은 박정희이다.
봉건사회의 감옥은 처참했다. 한성감옥 동료 김형섭은 한성감옥의 입감할 때 기억을 남겨 놓았다. 국비유학생으로 일본 사관학교에 유학했던 김형섭은 유길준이 일본 동경에서 조직한 '일심혁명회'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한성감옥에 투옥 되었다.
"한밤 중 캄캄한 감방에 이르러 포승을 풀어준 간수가 3,4척 쯤 되는 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가려고 했으나 발에 무엇인가 걸려서 들어설 수가 없었다. 간수가 뒤에서 떠밀었기 때문에 들어서기는 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발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대로 서 있었는데 악취가 코를 찔러서 30분 정도 서 있는 동안 숨이 막힐듯해서 문간의 틈을 향해 호흡을 해야 했다… 동이 터서 방안을 훑어보니 한칸 방만한 곳에 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진흙 속의 뱀장어' 같이 벌거벗은 채로 앉아서 잠을 자고 있던 것이었다. 한밤중 간수가 들고 있던 초롱불에 무엇인가 반짝이는 듯한 느낌을 가졌었는데, 그것은 나체의 사람들의 피부에서 흘러나온 땀이 반사했기 때문이었다."
청년 이승만의 죄목은 대역죄로 한성감옥에 수감 된 후 20일 만에 탈옥하다 체포되어 탈옥죄까지 더해졌다.
배재학당 동문인 주시경이 한성감옥으로 면회와서 탈출을 권유하며 권총을 주고 갔다. 청년 이승만은 감옥 동료인 서상대, 최정식과 탈옥을 시도했다. 그러나 탈옥에 성공하였으나 청년 이승만은 이내 잡혀왔고, 변장을 하고 일본으로 도주를 시도한 최정식은 여관주인의 밀고로 3개월 후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서상대만 도주에 성공하여 상해로 가서 살아 남았다. 청년 이승만은 사형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함이 있었다. 혁명가 김옥균을 암살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홍종우는 출세가도를 달렸고 이승만을 담당한 판사였다. 선교사들의 구명활동이 활발하게 벌어 졌으나 이승만은 홍종우의 정적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곤장 100대에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자신의 운명이 정해진 것을 알게 된 청년 이승만은 모든 것을 체념했고, 그날도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 흙바닥에 던져져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다 피 흘리는 입술에서 난생 처음 기도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배재학당에서 협성회를 이끌며 만민공동회에서 웅변가로 연설가로 이름을 날린 청년 이승만을 고종은 주시하고 있었다. 독립협회가 주축이 된 만민공동회가 백성의 마음을 대변하는 논장이 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만민공동회를 통해 고종과 조정을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고종은 정치적 타협을 위해 국회를 흉내 된 중추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문명개화를 주장하는 독립협회 출신 25명, 쇄국을 주장하는 황국협회 출신 25명을 각 의관으로 임명했다.
만민공동회 연설가로, 매일신문 주필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23살의 청년 이승만을 고종은 정치적 계산하에 중추원 종9품 의관으로 발탁된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는 10년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자 박영효는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복귀했다. 권력의 핵으로 떠오른 박영효는 미국시민권자가 된 서재필을 삼고초려 하여 조선으로 돌아오게 했고,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며 여론을 주도했다.
그러나 박영효는 복귀 1년만에 ‘고종과 민비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 대역죄인으로 몰려 일본으로 도피했다.
청년 이승만에게 배재학당 입학을 권유한 친구 신흥우와 같이 중추원에 들어간 이승만은 일본으로 도피한 박영효를 국가개혁과 문명개화를 위해 복귀시킬 것을 주장하게 된다. 집요하리만큼 권력에 대하여 탐욕을 부리고 있는 고종에게 청년 이승만은 눈에 가시가 되었다.
때마침 박영효를 따르며 일본에 머물던 이규완 등의 추종세력이 몰래 귀국해 고종을 폐위시키고 박영효를 총리대신으로 추대하려는 거사를 추진하고 있었다. 매일신문 주필과 중추원 의관으로 있는 청년 이승만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전덕기, 박용만, 정순만 등과 함께 “황제는 춘추가 많으시니 황태자에게 양위하셔야 한다”는 요지의 격문을 만들어 장안에 뿌렸다.
집요하게 권력욕 만큼은 게걸스럽게 탐욕을 부린 고종은 보부상을 동원하여 폭력으로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와해시켰다. 고종은 청년 이승만의 중추원 의관직을 박탈하며 체포를 명령했다.
고종의 체포 의도를 사전에 알게 된 이승만은 외국인 거주지역으로 피신해 있다 미국인 의사 셔먼의 왕진길에 통역으로 동행하다 발각되어 대역죄인으로 체포 된다.
청년 이승만의 체포을 보고 미국인 의사 셔면은 미국공사 알렌을 찾아가 구명을 요청했다.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살려준 인연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알렌의 구명운동이 한창일 때 탈옥을 시도하다 체포 된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고 매일 매일의 고문 속에 하루속히 사형집행을 기다리다 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온 것이다.
국부 이승만은 그 순간을 자신의 자서전에 남겨 놓았다.
“그 참혹한 감방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다른 세상에 갈 터인데 저 외국사람들이 말해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세상의 감옥에 가게 될 터였다. 그러자 배재학당 예배실에서 선교사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오’ 그런 기억이 나자 그대로 큰 칼에 얼굴을 대고 기도가 절로 나왔다.”
국부 이승만은 5년 7개월 동안 한성감옥에서 복역하며 살인적인 집필과 저술활동을 하였다. 한성감옥에서의 생활과 미쳐 알려지지 않는 잡다한 기록을 발굴하여 연구한 국부 이승만 연구의 일인자 중 한명인 유영익 교수는 그의 저서 “한성감옥의 생활과 옥중잡기”를 통해 그 날에 대한 청년 이승만의 옥중에서 남긴 기록을 찾아 공개했다.
“그 순간,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는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새하여 가지고 있던 증오심과 불심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자기네가 매우 값지게 여기는 것을 우리에게 주려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년 이승만의 회심 후 한성감옥을 방문하는 스승 아펜젤러를 비롯한 선교사들에게 성경 및 성서, 외국의 최신서적 등을 감옥에 넣어 줄 것을 부탁했다. 청년 이승만은 무섭게 선교사들이 넣어주는 책을 보며 독서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성경 읽기와 기도를 통해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며 감옥 안에서 죄수들을 상대로 전도를 시작했다. 구한말 격변하는 시대 한성감옥은 양반출신의 고위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청년 이승만의 전도로 한성감옥의 간수부장 이중진과 그의 동생 이중혁이 신가가 되었고, 40여명의 지도층 양반이 그리스도인이 된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 전기에서 당시를 적고 있다.
"그(이승만)가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되면서 실제적인 일들이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수용된 사람들은 갖가지 어려운 사정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흉악범도 있었지만 이상주의에 불타고 부패한 군주의 폐해를 일소하려는 진지한 노력 때문에 수감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 기독교를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은 서양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로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승만은 성서를 보면서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도 읽어주었다. 감옥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면 어 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에 가장 회의적인 사람들도 그의 성경 낭독을 들었다. 기도는 그에게 영적인 교류를 위한 자연스런 방법이 되었고, 하루의 일과를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그가 수감되어 있던 6년 동안 40여 명의 죄수들이 그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신자가 되었다.“
청년 이승만을 통해 전도한 지도층과 지식층을 보면 종이품을 지낸 성균관 대제학 이원긍, 종이품 의정부참찬 이상재, 종이품 내무협판 유성준. 경무관 김정식, 이상재의 아들 부여군수 이승인, 개성군수 홍재기 등 거물급 관료 출신이 포함되어 있다.
양반출신으로 일본에서 이수정, 만주에서 서상륜, 미국에서 서재필 등이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는 있었지만 유교적 전통질서의 한복판에서 권력을 가진 양반들이 국내에서 개종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사대부가 성리학을 등지고 서학의 본체인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것은 사문난적을 넘어 조상의 제사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한 규범에서 패륜을 저지른 것이었다. 한성감옥의 양반 40명의 집단개종 사건은 어쩌면 단군이래 가장 큰 정신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청년 이승만에 의한 한성감옥 집단개종사건을 두고 캐나다 출신의 미 북 장로교 선교사 게일은 자신의 저서”전환기의 한국“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벙커목사와 그의 부인에 의해 정규적으로 방문된 그들의(이승만, 유성준, 김린,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감옥은 처음에는 탐구의 방(inquiry room)이 되었다가 기도의 집 (a house of prayer)이 되었고, 나중에는 예배를 드리는 곳(a chapel for religiousexercises)이 되었으며, 신학 홀(a theological hall)이 되기까지 했다. 이것이 마무리 되자 하나님은 그들을 감옥 밖으로 내보내셨고 일하도록 하셨다. 그들의 높은 사회적 위상과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우수한 한자 실력으로 인해 이 사람들은 수도의 최초기독교 지도자들이 되었다."
청년 이승만의 전도로 개종한 양반 지도층들은 출옥 후 YMCA 조직의 중추가 되어 기독교 교육사업 및 기독교 청년운동에 투신하며 기독교 세계관 전파의 첨병이 되었고, 교육과 사회운동에 뛰어 들어 한반도에 기도교 세계관이 자리 잡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하층으로 파고 들은 선교사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양반 지도층에 선교의 포문을 열은 이승만으로 인해 한반도에 도래할 기독교 세계관의 고속도로가 열렸다.
국부 이승만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선지자로, 주의 종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간구하며 생을 마감했다.
국부 이승만의 전기를 쓴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의 명상은 절반이 기도"라고 쓰고 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는 국부 이승만의 기도하는 뒷모습을 앞모습 보다 많이 보고 살았으며 ”대통령은 걸어가면서도 기도한다"라고 일기에 적어놓았다.
6세에 한시를 짓고 전도유망한 유생으로 장원급제를 꿈꾸는 유자 이승만의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뀐 개종의 순간은 대한민국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출발점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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