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가 조선으로 건너 와 처음은 보구녀관에서 의료사역을 하였다. 어느날 몇 년 전 입은 화상으로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에 붙어 있는 환자가 보구녀관을 찾아 왔다. 홀 여사는 화상을 입은 소녀의 손가락을 손바닥에서 떼어 펴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피부가 부족하여 보기 싫은 흉터가 남을 수 밖에 없었다.
홀여사는 통역 등의 문제와 이식피술을 이해시킬 수 없어 자신의 몸에서 세조각의 피부를 떼어 소녀의 손에 상처가 나지 않게 수술을 마쳤다. 그 소녀는 홀 여사의 헌신에 감동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어 성경을 통독하고 다른 환자에게도 성경을 읽어 주며 전도를 하였다.
홀 여사의 이러한 헌신적인 의료사역은 조선인을 감동시켰고, 보구녀관의 환자가 3배가 폭등했다. 홀 여사는 그 바쁜 의료사역 중에서 이화학당에서 심리학과 약물학을 가르쳤다.
남편과 사역지를 평양으로 옮겨 사역을 이어 가는 중 김낙구라는 자가 찾아와 우물제사를 지내기 위한 희생제물을 사기 위한 비용을 요구했다. 마을 공동우물을 관장하는 우물신에게 올릴 제물비용을 달라는 것이었다. 닥터 홀은 우상숭배에 쓰일 돈을 줄 수 없다고 버티면서 마찰이 일었다. 이를 알게 된 평양감사의 눈 밖에 나게 된다.
평양군수는 외교문제로 비활 될 수 있는 외국인을 체포할 수 없어 모펫 선교사의 조사 한석진과 홀 선교사의 조사 김창식을 비롯한 많은 교인을 체포하여 고문을 했다. 평양감사는 김창식은 고문과 매질을 하며 기독교 복음 전파를 하지 말 것을 강요 했다. 김창식은 당당하게 맞섰다.
"나는 기독교가 옳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앞으로도 기독교 신자로 살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도 이를 전하겠다."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체포 된 교인들이 풀려나면서 오히려 교파를 초월한 강한 신앙공동체로 연합하고 평양선교의 열정을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홀 여사의 남편 셔우드 제임스 홀이 평양전투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다 순교한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통해 토마스 저메인 선교사가 순교의 피를 뿌린 평양에 셔우드 제임스 홀의 피가 더하여 졌다.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다. 그들의 피는 장차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이 되는 씨앗이 되었다.
“교회라는 나무는 세 가지 액체를 먹고 자란다. 수고의 땀, 기도의 눈물, 순교의 피다”
홀 여사는 남편과 평양에서 의료사역을 시작하며 봉래라는 맹인 여아에게 점자를 지도하게 된다. 남편이 평양에서 처음으로 전도한 교인 오석형이 있었다. 봉래는 그의 딸이었다. 그 여아를 가엾게 생각한 홀 여사는 점자를 지도하면서 대한민국 최초 특수교육이 시작 된다.
그 당시 맹인과 벙어리, 귀머거리는 사회적으로 혹독한 천대를 받았다. 홀 여사는 소녀시절 배웠던 점자를 기억하여 기름종이에 직접 바늘로 점을 찍어서 점자 문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과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한 후 점자를 연구하고 개발하고, 교재를 만드는 등 맹인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를 한다.
평양으로 다시 돌아 온 홀 여사를 4년 전 잠시 가르쳤던 봉래를 만나 새로 만든 교재로 문맹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 당시를 회상한 아들 셔우드 홀의 기록이 남아있다.
“평양에 이주한 뒤 어머니는 다시 맹인인 오씨의 딸 봉래를 데리고 교육을 시작했다. 처음 이점자 교육은 진도가 느리고 지루했다. 그러나 봉래가 점자로 조선 알파벳을 해독한 뒤에는 순풍에 돛단배 같이 진도가 빨라졌다. 일 년 만에 봉래는 어머니가 준비한 모든 교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점자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말하는 것을 받아 자신이 점자 교습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어머니는 봉래에게 뜨개질까지도 가르쳤다”
봉래는 점자에 눈을 뜨게 된 후 다른 맹인을 교육 시킬 수 있는 교사로 성장하여 홀 여사의 사역을 돕게 된다. 맹인에 대한 교육이 평양일대에 소문이 나면서 많은 맹인들이 홀 여사를 찾아 오게 되면서 맹인 학교가 세워진다.
홀여사에게 교육 받은 오봉래는 일본으로 정규 사범학교 유학을 다녀 온 후 평양맹인학교 교사가 되었다. 학교의 규모가 커져가면서 맹인교육 전문 교사인 록웰이 건너와 맹인학교를 맡아 운영하게 된다. 맹인학교에 열정을 쏟았던 록웰이 1910년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서 그의 아내가 맹인학교를 이어 받아 사역을 하였다.
홀여사는 맹인교육이 자리잡혀 가면서 벙어리와 귀머거리의 농아교육을 시작한다. 1908년부터 농아들을 맹인학교에 데려와 특수교육을 시작한다. 아들 셔우드 홀의 조선회상에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1908년에 맹인들을 위한 새 건물이 완성 되었다. 다음 해에는 맹인 학교가 커져서 귀머거리와 벙어리들까지도 받아들여졌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행한 기적 중 여러 명의 맹인 눈을 뜨게 한다. 홀여사는 점자로 맹인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홀여사는 예수님을 닮고자 했다. 약한자, 소외 된자, 버림받은 자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주며 온갖 사회적 멸시 속에 고통 받은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는 평등한 정상인과 똑 같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이 땅에 선포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와 명태는 사흘에 한번 씩 패야 한다는 속담이 흔하게 회자 될 정도로 여자는 이 땅에 억압의 상징이었다.
홀 여사는 턱없이 부족한 여의사로 인하여 열악하기만 한 여성 의료를 위해 조선인 여의사 양성할 뜻을 세운다. 홀 여사는 기회가 날 때마다 총명한 여성을 찾아 의학공부를 할 것을 권면했다. 그 결과 김용희, 윤심덕, 황 에스더, 김로다 등의 여성들이 의학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윤심덕은 사의찬미 그 윤심덕이다.
당시 조선에서 여성에게 의학공부를 시킬 곳이 없어 여의사를 지원한 모두가 의사가 될 수 없었지만 홀 여사의 재정적 지원으로 김용희는 일본 제국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김로다는 상해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동대문 여성병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녀들의 유학 비용은 홀 여사의 미국 친구 등이 모금하여 후원한 돈이었다.
당시 조선에 여의사를 양성할 교육기관이 없었다. 홀여사는 평양감사의 아내를 치료하여 살려 준 인연으로 평양감사로부터 현판을 받은 광혜여원에 “여자 의학반”을 개설하여 여의사 양성을 시작한다. 그러나 일제 시대 여의사가 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하여야만 했다. 열악한 교육시설로 인해 결국 “여성의학반”은 1년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부속의학강습소를 만들어 남자 의사들을 육성하고 있었다. 홀여사는 조선총독부를 찾는다. 그리고 의학강습소 원장 후지다에게 여자를 모집하여 의학강습소를 남녀공학으로 할 것을 건의한다. 교칙 상 남녀공학으로 할 수 없어 정식으로 여학생을 정식 학생으로 입학 할 수 없었지만 청강은 허락받게 된다. 그리고 1914년부터 조선 여학생들은 남자학생들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며 의학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18년 의학강습소를 졸업한 3명의 여학생이 의료면허증을 받게 된다. 국내에서 교육받은 조선여의사가 처음으로 나오게 되었다. 안숙윤은 졸업 후 동대문 병원에서 근무하였고, 김영훙과 김하티도 평양에서 홀 여사를 도와 활약한다. 그러나 1925년에 의학강습소에 새로 부임한 의학강습소 원장은 여학생의 청강을 허락하지 않아 여의사 양성이 막히게 된다.
여의사 양성이 하루 아침에 막히게 되면서 홀 여사는 여성의학 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여의사를 양성할 의학원 설립을 추진한다. 그러나 외국인 여성의 신분으로 의학원 설립은 쉽지 않았다.
홀 여사가 동대문여성병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길정희를 만난다.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할 때 알고 지낸 길정희가 동대문여성병원에 근무하게 되면서 여자의학원 설립 추진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1928년 여자의학강습소 창립총회가 개최 된다. 강습소 설립 비용 마련을 위해 240만원을 목표로 모금활동을 벌렸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대대적인 모금활동을 벌리고 미국에까지 알려져 홀 여사의 친구들도 모금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부족한 모금액을 채울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세워졌고 홀 여사가 소장으로 길정희가 부소장이 된다.
홀 여사는 부족한 자금을 극복하기 위하여 창신동 루이스 여선교사의 집을 강습소로 개조하고. 서울에서 활동하는 의사를 설득하여 무료봉사 교수진 12명(여6명, 남6명)을 모집했다. 그리고 홀 여사가 경영을 책임지기로 하고 뉴욕여의사회와 미국 여선교회에 지원을 받아 교육을 시작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소망했던 조선여성들에게 의학과 의술을 가르치겠다는 소망을 이루게 된다.
자금난을 겪었지만 여자의학강습소는 성공적이었다. 교사들의 수가 이듬해 2배로 늘어났다. 강습소는 성장을 거듭했고 일본인 의사까지 무료 교수진으로 합류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만성적인 자금난은 경영자인 홀 여사를 괴롭혔다. 홀여사는 자신과 조선여자의학강습소에 들어오는 후원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급하고 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에 그 의학교육자금을 갚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하여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안정을 찾아갔다.
1934년에 여자의학강습소에 첫 졸업생들이 총독부 시험에 합격하고 5명이 의사자격증을 취득한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홀 여사가 은퇴하게 됨에 따라 귀국하며 1933년 7월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칭되어 김탁원, 길정희 의사부부에게 인계되었고 성장을 거듭하며 1938년 5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개교하였다. 의학전문학교는 해방 후 우석대학교가 되어 고려대학교에 합병됨으로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홀 여사는 맹인 학교 등 자신이 설립한 특수교육기관은 조선인 교사들을 육성하고 학교운영을 가르쳐 조선사람이 스스로 자립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성의사 육성만큼은 조선인이 스스로 자립하기를 원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안타까워 했다. 특히 여자가 무슨 공부냐는 편견에 사로잡힌 봉건제 질서를 극복하기 위하여 학부모를 찾아 다니며 설득하였다. 많은 어려움을 신앙과 굳은 의지로 극복하며 마침내 조선인이 여의사를 스스로 육성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 은퇴했다.
홀 여사는 1928년도에 뜻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안타까운 마음을 일기로 남겨 놓았다.
"1897-8년 겨울 나는 서울에 8명의 여의사가 있음을 알았다. 돌이켜보면서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 의료 활동은 큰 활동이므로 우리는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필요들이 단지, 몇몇 외국인 의사들에 의해서 해결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일이 분담이 되어 지기 이전에는 힘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조선 여성들이 의료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그들과 의료 활동을 분담할 수 있어야 한다"
홀 여사가 특수교육과 여자의사 육성 교육을 시작한 후 평양에서 여자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생겼고, 많은 학교에 여성이 신식교육을 받았다. 여성교육이 확대 됨에 따라 여성들의 권위가 신장되고 예전에 비해 여성들도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홀 여사는 1915년 12월 15일자 기독신보에서 당시에 대하여 적고 있다.
여인들의 진보됨은 실로 놀랍도다.각 처에 여학교는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까지 설립하여 여자를 교육하는데 서복여자는 중학대학을 마치고 조선전국에 퍼져 교육하는 이도 있고 20여 년 전에 미국에 가서 의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10여 년간 병원사무를 본이도 있으니 어찌 고마운 주의 은혜가 아니라 하리요. 여성서학원 간호원학교 의학교 소·중·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여자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게 각자 자기 지식을 넓히니 이를 25년 전과 비교하면 어찌 진보함이 적다하리오.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 그녀는 진정 이 땅을 사랑했다. 사랑의 빛으로 어둠을 밝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가 우리에게 남겨준 사랑의 유산에 대하여 우리는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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