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혁명 후 혁명 정부는 부패한 사회정화를 위하여 대대적인 수술을 했다.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축첩한 공무원을 쫒아 내는 것이었다. 부패한 공무원 40,000명을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그 중 축첩으로 쫒겨난 공무원은 수천명에 이를 것이다. 내무부 산하에서만 510명이 축첩한 공무원으로 적발되어 축출되었다. 내부부 통계 밖에는 찾지 못했지만 쫒겨 난 40,000명 중 상당한 숫자가 축첩으로 인해 쫒겨 났을 것이다.
5.16 혁명때 까지도 사정이 저러 했으니 구한말 축첩은 편만한 사회악이었고, 여성은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질곡의 삶을 살며 조혼과 매매혼, 약탈혼과 억압에 신음했다.
영적 대각성 운동인 원산대부흥, 평양 대부흥에서 가장 많은 회개가 이루어진 것은 첩을 두고 있는 것, 상습 불륜을 저지른 것, 부인을 유기하거나 내다 버린 것 등 여자를 학대한 것이었다.
여자아이는 이름조차 없거나 “섭섭이” “못난이” “언년이” 등으로 살다 학교 들어갈 무렵의 나이가 되면 집안에서 격리된 채 지내야 했고, 남자와의 겸상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남자들이 먹고 물린 밥상의 음식찌꺼기를 먹고 살아야 했다. 결혼하면 칠거지악의 굴레를 뒤집어 써야 했다. 즉 부모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행실이 음탕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 하는 것이었다. 삼종지도라는 해괴한 관습을 앞세워 여자는 생각과 의견을 표현할 수 없었고 대낮에 집 밖 출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1890년에 한국에 온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가 여성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다.
“그들은 모두 머리에서 발끝까지 흰옷을 입고 있어서 마치 그림처럼 보였다. 우리는 남자들만 볼 수 있었다. 여자들은 해가 져서 남자들이 집에 들어온 뒤에야 밖에 나올 수 있었다. 진기한 풍속이다.”
그로부터 7 년이 흘렀다.
미국의 감리교는 청년 단체인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를 만들어 전도, 성경 읽기, 절제 운동, 사회봉사 등의 활동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이를 도입하여 자신이 세운 정동교회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하고 노병선이 초대 회장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렸다.
1897년 12월 31일, 정동교회에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엡윗청년회 토론회가 열렸다. 찬성 편에는 독립협회의 서재필과 김연근이, 반대 편에는 남감리회의 윤치호와 조한규가 나서서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반대편에 섰던 조한규는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인류타락의 근원이다”라며 여성교육에 대한 반대논리를 세웠다.
그러자 청중에서 조한규의 논리를 날카롭게 반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록 하와가 죄를 지었으나 마리아가 아니시면 예수께서 어찌 세상에 오셔서 죄를 대속하셨으리오”
유교 원리주의 성리학이 지배하던 그 시대 공개 된 남자들의 토론석상에서 청중 여자가 감히 논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짐승 취급 받는 여자의 목소리가 잘못된 세상을 꾸짖는 시작이었다.
그녀는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의 양녀 여메례였다.
그녀는 마산에서 태어났다. 아이의 점을 보기 위하여 무당을 찾은 그녀의 부모는 딸이 부모와 함께 단명 할 것이라는 점괘가 받는다. 그러자 딸을 내다 버릴 궁리를 하다 한양에 푸른눈을 가진 외국인이 버려진 아이들을 먹여 주고 재워 주며 가르치는 곳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 정동의 스크랜튼 대부인에게 버리듯 맡겨졌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살아 있는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여메례를 양녀로 입양 한 후 정성을 다하여 키웠다. 개신교인이 된 여메례는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며 세례를 받고 메리(Mary)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메리를 한자로 음역하면 ‘메례’였다.
총명한 여몌례는 선교사와 영어로 프리토킹을 할 정도로 어학적 능력이 뛰어났고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의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에게 간호학을 배워 여성 전용 병원인 보구여관에서 간호사 겸 전도부인으로 근무하였고, 지혜와 지식은 나날이 늘어 학교를 세우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단지 점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버림을 받은 여메례는 어쩌면 길바닥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운명이었다. 그녀를 자유인으로 키운 것은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이었다. 그녀의 남편 스크랜튼 집안은 17세기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Puritan)의 후예이며 메리 스크랜튼 집안 역시 영국에서 건너 온 청교도 집안이다. 메리 스크랜튼의 감리교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나 형제자매가 모두 목회자이거나 일본 선교사로 활약하는 등 신앙의 집안에서 자랐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본국에서도 나이가 많아 어렵게 선교 허락을 받았고, 며느리의 반대로 홍역을 앓았다, 국내 입국에서도 갑신정변 휴우증으로 입국이 순탄하지 못했고, 외국인에게 집을 파는 사람이 없어 고통을 받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과 며느리와 한국으로 건너 오게 되어 선교를 시작한 메리 스크랜튼은 억압 받는 조선 여성의 어머니가 되었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 집의 방 하나를 시작으로 소외 받고 고통 받는 여자의 교육을 위하여 이화학당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학생 모집을 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다 첫 여학생을 받았다.
첫 학생은 축첩한 아내가 영어를 배워 왕비의 어전통역이 되면 출세길이 열릴 것이라 생각한 정부 하급관리 손에 끌려온 “김씨부인”이었다. 그러나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그 첩은 삼개월 만에 도망갔다.
두 번째 여학생은 너무나 가난하여 먹일 것이 없어 딸을 맡겼다. 몇일 후 그 어머니는 주변으로부터 어떻게 외국인에게 아이를 맡길 수 있느냐 욕을 먹었고, 미국으로 팔아 먹을 것이다라는 소문 때문에 다시 찾아 왔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한국 땅 밖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었다.
세 번째 학생은 “별단이”였다. 스크랜튼 대부인이 서대문 성벽 아래 가마니를 덮고 자는 모녀를 발견한다. 모녀는 콜레라에 걸려 고열에 신음하고 있었고 남편이 내다 버린 모녀였다. 스크랜튼은 모녀를 데려다 치료하여 주고 별단이는 이화학당에서 공부하여 보구여관의 간호사로 활약했다.
네 번째 학생은 김점동이었다. 그녀는 서재필에 이어 한국인 출신 2번째 서양의사가 되었다. 아펜젤러의 사역을 돕는 그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이화학당에 입학한 김점동은 우리나라 최초 서양 결혼식을 올린 주인공이 되었고, 후에 박유산과 결혼한 후 서양식에 따라 남편성을 따라 박씨가 되었고 에스더의 세례명을 받고 박에스더가 된다.
총명했던 김점동은 선교사와 프리토킹을 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고,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유학하여 여의사가 되어 귀국한 후 의료선교를 하다 과로로 35세에 폐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김정동은 스크랜튼 대부인을 처음 만난 순간을 남겨 놓았다.
“내가 열 살 때 스크랜튼 선생님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매우 추운 날씨여서 부인이 난로 가까이 오라고 했는데 나는 부인이 나를 난로에 집어넣어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부인의 친절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게 하였다. 그 당시 학당에는 나 말고 3명의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밥 먹는 일 외에 아무것도 몰랐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도 몰랐다.”
스크랜튼 대부인이 조선 최초의 여자 학교를 개교하면서 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여학생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무슨 여자가 공부를 하느냐는 편견과 차별은 극복이 쉽지 않았다. 어렵게 여학생 모집을 하였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왕족 박영효가 망명생활을 하다 복권이 되어 딸을 이화학당에 보내며 차츰 인식이 바뀌면서 이화학당은 자리를 잡아갔다.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로서 왕족이었다.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봉건조선의 문명개화를 위하여 갑신정변에 뛰어 들어 많은 고난을 겪은 혁명가이기도 했다.
메리스크랜튼 대부인을 괴롭힌 또 다른 문제는 돈이었다. 서대문 인근에 6천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1886년 학교건물 공사에 착공했다. 그러나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자금의 지원이 어렵다는 소식을 접한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본국 교단에 절박한 사정을 알리며 하나님에게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의 블랙스톤 부인이 3,000달러를 기부하였고, 뉴욕 해외선교부가 700달러의 헌금을 받아 무사히 학교 건물은 준공을 하게 된다. 당시 배꽃이 만발하는 서대문 언덕 위에 완성된 건평 200평의 한식 기와집은 35명의 여학생을 수용할 수 있었고 기숙사도 갖추었다.
버려진 아이, 먹을 것이 없어 맡긴 아이, 구걸하는 아이, 소외된 아이를 데려다 시작한 이화학당은 계속하여 성장하면서 오늘의 이화여대가 되었다.
여메례는 차별과 편견, 억압을 딛고 일어서 간호사, 교사, 교장, 교수, 전도부인으로 자아를 찾았고, 사회를 위하여 끊임없이 헌신하며 봉사했고, 김점동은 미국유학을 통해 의사가 된 후 귀국하여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와 왕진을 포함한 한해 8,000건이 넘는 진료하며 과로에 시달리다 30대의 나이에 일찍 요절했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단지 여자라는 굴레 속에 살아야만 했던 조선 여인에게 교육을 선물했다. 그것은 가부장적 굴레를 쓴 억압받는 조선의 여인을 존엄성을 가진 한 명의 자유인으로서 거듭나는 삶을 개척하는 순간이었으며, 가혹하며 잔인한 성리학의 질서에서 여성의 자아를 찾는 첫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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