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러시아는 영국과 세계 패권을 두고 그레이트 게임을 벌렸다. 대항해시대를 거쳐 세계는 바닷길로 연결이 되었고, 바닷길의 확보는 곧 국력과 직결 되었다. 영국은 러시아가 대양으로 진출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나오는 모든 항구와 뱃길을 봉쇄했다. 일러전쟁은 영국이 일본을 사주하고, 돈을 주고 무기를 주고, 군사정보를 주어 대리전을 치루게 하여 러시아의 뱃길을 막은 전쟁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한 바닷길은 크림전쟁으로 좌절 되었고, 인도양을 향한 뱃길은 아프카니스탄에서 좌절되었다. 크림전쟁으로 로스차일드가에 1500만 파운드의 막대한 빚을 지고 허덕이고 있는 러시아는 카나다를 식민지로 두고 있는 영국이 알라스카 침공이 두려워 미국에 헐값에 팔아 완충지대로 두었다.
러시아는 영국의 견제를 피해 바닷길을 확보할 수 있는 대안으로 동해와 대마도를 주목했다. 러시아는 비릴레프 함장을 시켜 군함 포사드니크 함을 출동시켜 1861년 3월 13일 대마도의 가라사키우를 점령하고 폐슈츄로프 함장 휘하의 제2진까지 보내 대마도를 점령을 공고히 했다.
러시아에 대항은 엄두도 내지 못한 일본은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일본의 요청을 받은 영국의 호프 함대는 1861년 8월 27일 전투태세를 갖추고 대마도 점령군 사령관 리카체프 제독에게 철수할 것을 경고했다. 영국 해군의 화력 앞에 러시아는 무릎을 끓고 물러난다.
대마도 점령이 수포로 돌아가자 러시아는 영국과 바다에서의 충돌을 피하고 조선이라는 우회로를 찾았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에서 활약한 가르네프의 주도하에 참모본부 소속장교와 수병으로 구성 된 간첩단을 조선에 보낸다. 간첩단은 지리, 군사,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1885년부터 4년간 조선을 샅샅이 뒤져 조선 첩보서를 작성하여 정부에 "조선보고서"를 제출한다.
부동항 확보를 위하여 조선에 야금 야금 낙타코를 들이밀던 러시아는 어느날 갑자기 호박넝쿨이 굴러들어 온다.
1896년 2월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한 아관파전을 단행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국과 미국 공사관 등 7번의 망명을 시도한 고종은 유일하게 망명을 받아준 러시아에게 감사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은 끊임없이 러시아 짜아르 니콜라이2세에 “일본을 혼내달라며 30여통이 넘는 친서를 보내고, 선물공세를 펴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빛내 주었다. 그러나 국제질서는 양육강식과 국익만 존재하는 정글일 뿐이다. 살길을 찾아 온갖 정성을 다해 매달렸지만 훗날 헤이그 밀사 사건에서 니콜라이2세에게 거나하게 뒤통수를 맞는다.
모든 열강은 의회민주주의로 박차를 가하고 있음에도, 고종은 망조가 들은 상국 중국의 대안으로 짜아르체제 전제군주국 러시아를 동경한다. 자신의 안위를 지켜줄 뒷배가 필요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 망명 후 자신의 권력을 지킬 방안으로 인아거일(引俄拒日)을 구상했고 자발적 러시아의 속국이 되고자 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897년 2월에 환궁 후 일인 황제가 입법, 사법, 행정, 군권, 조세와 재정을 모두 장악하는 1897년 10월에 선포할 대한제국 준비를 차곡차곡 했다.
황제국 대한제국 준비에 바쁜 고종에게 러시아 외교관 알렉세이 스폐예르는 러시아 공사관 숙박비 청구서를 내밀었다. 러시아 증기선에 공급할 석탄 저장고를 위해 부산 절영도 전체를(지금의 부산 영도) 조차해 달라는 것이었다. 절영도 전체를 석탄고로 쓰겠다는 것은 단순 석탄저장고가 아니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외상 장부를 받아든 고종은 아관파천을 주도하여 출세가도를 달린 외부대신 민종묵에게 절영도 조차의 밀지를 내린다.
러시아는 장교단으로 구성 된 군사고문단을 입국시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한반도에 기병대를 비롯한 1,300명의 군대를 한양에 주둔할 계획을 세우고 전초작업으로 러시아 군함을 부산에 입항시켜 절영도에 수병을 주둔시켰다. 경제를 장악하기 위하여 한러은행을 한양에 개설했다. 조선 침투는 영토적, 군사적, 경제적 전방위로 전개되고 있었다.
러시아를 주시하고 있었던 서재필은 본격화 된 침투를 국가적 위기로 보고 독립신문을 통해 수차례에 조선에 경고했다. 서재필은 러시아의 본심을 대중에 알려 여론은 들끓게 만들었고 민가에는 속 검은 러시아를 조심하라는 노래가 퍼졌다.
그러자 러시아 공사 스폐예르는 군사고문단을 비롯한 한러은행이 즉각 철수하겠다며, 고종에게 공식서한을 보내 24시간내 답변을 달라고 협박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지면을 통해 끊임없이 러시아의 침투와 오만을 알리며 여론을 주도했고, 독립협회를 움직여 윤치호, 이상재 등과 만민공동회(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데몬스트레이션을 하고자 했으나 만명이 모여 만민공동회라 불리게 된다)를 개최한다. 배재학당의 이승만, 양홍목, 현공렴 등은 장안에 독립신문 호외를 뿌리며 서재필을 도왔다.
1만명이 운집한 만민공동회에서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가 연사로 열변을 토해 대중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고, 청년 이승만도 연사로 나와 명연설로 울분을 포효했다. 만민공동회 4대 연사에 20살 갓넘은 청년 이승만도 이름을 올리며 장안에 화재의 인물로 떠오른다.
아펜젤러는 만민공동회 뒷전에 서서 배재학당 학우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당시 한양 인구는 18만명 내외였고 일만명이 운집한 것은 일대의 충격이었다. 자발적으로 일어난 백성의 성토는 한반도 2000년 봉건제 국가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국가의 모든 권력을 일인 황제에 발아래 두려 했던 고종은 전전긍긍 했다.
각성한 성난 대중의 성토에 러시아는 절영도 조차를 포기하고 한러은행도 철폐했다.
고종은 참 비겁한 군주였다. 갑신정변은 고종과 김옥균의 동지적 관계에서 일어난 혁명이었다. 갑신정변 거사 당일 윤치호를 통해 김옥균에게 100냥짜리 어음을 주고 거사자금을 지원했다. 김옥균의 회고록인 갑신일록에는 갑신정변 5일전 고종과 단독면담을 한 내용이 남아 있다. 단독면담 중 갑자기 민비가 들어왔다. 그러자 고종은 친서 한 장을 써주고 자리를 파했다.
"경이 품고 있는 뜻을 내가 잘 안다. 국가의 대계와 관련된 일은 위급할 때에 경의 대책에 일임할 터이니 경은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고종은 갑신정변 아니 갑신혁명의 동지였다. 동지가 아니라면 최소한 재가를 받고 일어난 혁명이었다. 삼일만에 정세가 급변하자 고종은 갑신혁명 동지들를 역적으로 몰아 동지들의 가족을 모두 주살했다. 흣날 고종은 끊임없이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죽이려는 시도는 수없이 벌어졌다.
갑신혁명 동지들은 혁명 실패로 고종과 같이 도주 하다 홍영식과 박영효의 형 박영교는 끝까지 고종을 호위하였고, 들이닥친 청나라군의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주살 된다. 갑신혁명의 혁명가들이 역적이라면 역적과 같이 도망가는 고종은 무엇이고, 혁명 동지의 삼족을 멸한 고종을 호위하다 사망한 것은 무엇인가 말이다.
갑신혁명에 참여한 서재필의 가족은 모두 주살 되거나 자살했고, 2살짜리 아들은 죽은 엄마의 시신 옆에서 젖을 빨다 굶어 죽였다. 고종이 굶겨 죽인 것이다.
서재필은 자신의 영어 스펠링을 거꾸로 써서 필립 제이슨이 되어 한국인 미국시민 1호가 되었고, 고된 삶속에서 의사가 되어 미국인과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갑오개혁으로 갑신혁명의 박영효와 서광범 등이 사면복권 되고 박영효는 박정양 내각에서 실세가 된다. 박영효는 인재가 필요했고 혁명 동지인 서재필을 외무 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하였으나 비겁한 군주 고종이 있는 조선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사랑은 서재필을 조선으로 건너 오게 했다. 미국에서 감리교 그리스도인이 된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중추원 고문으로 월급 300원을 받게 된 서재필은 12년만에 고종과 다시 만난다. 고종과 만난 자리에서 왕 앞에서는 안경을 벗어야 함에도 나는 외국인 신하다 라며 안경을 벗지 않았고, 왕에게 절은 고사하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 한국말을 잊어 버렸다며 통역관을 붙이게 했고, 고종 앞에서 짝다리를 집으며 담배를 피워 물며 고종을 능멸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자유와 인권, 개인과 민주주의, 시민과 책임을 계몽했다.
아펜젤러는 서재필에 부탁하여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게했다. 서재필은 세계 지리, 역사 및 정치학, 토론을 가르쳤다.
서재필은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어 버리고 독립문을 세웠고, 독립신문의 날카로운 논설로 고종을 비판했다. 독립신문은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독립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고, 신문 1부를 200명이 돌려 보았다.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한 한글학자 주시경은 신문 교정작업에 참여하며 한글을 연구했고, 연구 결과물은 즉각 국민에게 배포되어 피드백 되었다. 주시경을 만든 독립신문, 주시경이 만든 독립신문인 것이다.
서재필은 백성은 누구나 참여하게 하였고, 만민공동회 첫 연사가 백정 출신으로 승동교회 장로가 된 박성춘이었다.
절영도 조차가 좌절 된 러시아는 고종을 협박하여 서재필을 해임했고 추방 시키려 했다. 서재필은 고종에게 10년간의 중추원 고문계약기간의 모든 급료와 귀국비용 600원을 지급하면 물러나겠다고 맞섰다. 서재필에게 장차 지급 될 급료와 귀국여비를 모두 지급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서재필은 이승만과 미국에서 다시 만나 독립운동을 이어간다.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여 미국의 전현직 정관계의 유력인사, 기독교계 유력인사,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와 기독교 후원단체 등 2만여명의 유력인사를 회원으로 모았다. 한국친우회는 이승만에게 가장 많은 현상금을 걸게 만들며 일본의 눈에 가시가 되며 외교 독립운동의 상징이 된다.
서재필의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막아낸 것은 한반도를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만일 절영도에 군항이 건설되고 러시아의 군대가 한반도에 주둔하여 러시아의 군사적 영향력을 받았다면 1921년 몽골 북쪽의 투바 인민공화국이 공산화 되고 곧이어 몽골이 공산화 되듯이 그렇게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다.
한반도가 공산화 될 결정적인 위기는 3번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및 군대의 주둔 계획이었고, 두 번째는 일러전쟁을 통한 한반도를 놓고 벌린 쟁패전쟁이었으며, 마지막으로 6.25사변이었다. 서재필은 그 첫 번째 위기를 막았고 현장에서 이승만이 도왔다. 그리고 마지막 6.25 사변은 국부 이승만 홀로 지켜낸 역사였다.
서재필이 떠난 후에도 만민공동회는 계속 되었다. 이승만은 협성회회보를 매일신문으로 재창간하여 대한민국 최초로 일간지를 발행하여 고종과 봉건조선과 싸웠다.
아펜젤러는 협성회를 조직하게 한 후 협성회에서 토론(debate)를 가르쳤다. 봉건질서의 철저한 피라미드 계급사회 조선에서 백성과 천민이 양반에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발표한다는 것은 강상의 죄로 몰려 목이 달아날 일이었다.
아펜젤러는 협성회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발표하고 상대방의 의견과 생각을 듣는 토론을 가르치며 표현의 자유와 사고의 자유를 가르치며 정신적 계급해방의 길을 놓았다. 자유로운 생각을 대중에게 발표하는 연설도 가르쳤다.
독립신문은 배재학당의 당시 토론회와 연설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배재학당 학도들이 학원 중에서 협성회를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의회원 규칙을 공부하고 각색 문제를 내어 학원들이 연설공부들을 한다니 우리는 듣기에 너무 즐겁고 이 사람들이 의회원 규칙과 연설하는 학문을 공부하여 조선 후생원들에게 선생들이 되어 만사를 규칙이 있게 의논하며 중의를 쫒아 일을 걸쳐 하는 학문들은 퍼지게 하기를 바라노라.”
아펜젤러는 모든 토론의 주제와 토론방식은 토론자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자치(自治)를 시켰다. 이는 시민의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지는 의무를 가르친 것이다.
토론주제는 제한이 없었다. 시사, 국정, 풍습, 외교, 국방, 안보, 경제 등 각분야가 망라 되어 주제가 결정 되었고 42회의 토론회가 개최 되었다.
제 1 회. 국문(國文)과 한문(漢文)을 섞어 씀이 가함.
제 2 회. 학도들은 양복을 입음이 가함
제 3 회. 아내와 자매와 딸들을 각종의 학문으로 교육함이 가함
제 4 회. 학원들은 매일 운동함이 가함
제 5 회. 여인들을 내외시키지 아니함이 가함
제 6 회. 국상 중에라도 도로를 수리함이 가함
제 7 회. 우리나라 종교를 예수교로 함이 가함
제 8 회. 노비를 속량함이 가함
제 9 회. 우리나라 철로 놓는 것을 외국 사람에게 허급지 아니함이 가함
제 10 회. 우리 회원들은 인민(人民)을 위하여 가로 상에 나가 연설함이 가함
제 11 회. 회원들은 이십 세 안으로 혼인을 하지 아니함이 가함
제 12 회. 우리나라에서 쓰는 자와 말과 저울을 똑같이 함이 가함
제 13 회. 국민이 이십 세 된 자는 일제히 병정으로 택함이 가함
제 14 회. 서울과 인천 사이 철도를 놓는데 학도를 보내어 장정과 놓는 규칙을 배움이 가함
제 15 회, 각처에 공원 지를 설립해야 인민을 양생(養生)시킴이 가함
제 16 회. 목욕간을 집집마다 두어 몸을 정결케 함이 가함
제 17 회. 사농공상 학교를 세워 인민을 교육함이 가함
제 18 회. 각 곡식 종을 외국상품 종자를 구하여 심음이 가함
제 19 회. 병인들은 외국의 약으로 치료함이 가함
제 20 회. 산소를 풍수지술(風水之術)로 구치 말고 집집마다 마땅한 곳을 사두고 씀이 가함
제 21 회. 무론하고 매매할 시에 에누리 아님이 가함
제 22 회. 각항 문자를 왼편에서 시작하여 씀이 가함
제 23 회. 내지에 출입하는 외국 사람에게 지세(地稅)를 많이 받음이 가함
제 24 회. 우리나라에서 상하의원을 설립함이 급선무로 결정함
제 25 회. 군대에 호령하는 말을 본국말로 씀이 가함
제 26 회. 의관 제도를 복구함이 가함
제 27 회. 각부에 있는 고문관들을 한(限)이 지나거든 다시는 외국 사람으로 쓰지 아니함이 가함
제 28 회. 유의유식하는 인민에게 제조소를 창설하여 둠이 가함
제 29 회. 우리 회중에서 일주일간 회보를 발간함이 가함
제 30 회. 정부에서 인재를 택용하려면 과거를 봄이 가함
제 31 회. 흉년을 당하여 곡식을 외국으로 수출치 못하게 할 방책은 세를 많이 받음이 가함
제 32 회. 개항을 많이 하는 것이 나라에 유익함
제 33 회. 신문국을 각처에 배설하여 인민의 의복을 넓힘이 가함
제 34 회. 청국이 분파되어 인국 도리에 우리나라에서 구완함이 가함
제 35 회. 은전(銀錢)과 백통전과 동전을 경향 없이 씀이 가함
제 36 회.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씀이 가함
제 37 회. 삼년상(三年喪)과 기타 모든 복제를 년(年)으로 한정하지 않음이 가함
제 38 회. 혼인하는 것은 양자가 서로 보고 정함이 가함
제 39 회. 의리에 죽는 것이 불의에 사는 것보다 옳음
제 40 회. 의리와 경계가 없는 사람이 의리와 경계가 있는 사람보다 강하고 무서움
제 41 회. 각 항구에 우리나라에서 석탄고(石炭庫)를 두어 내외국 윤선(輪船)이 왕래하기에 편리케 하고 외국에는 석탄고 지을 땅을 빌리지 말고 이왕 허급한 것도 거두어둠이 가함
제 42 회. 재정과 군권(軍權)을 남에게 맡기는 것은 곧 나라를 남에게 파는 것으로 결정함
협성회를 통해 각성 된 시민의식은 배재학당 학우들을 통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로 퍼져나갔다. 협성회의 활발한 토론회의 영향을 받은 독립협회는 협성회 토론회를 도입하여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독립관에 모여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승만을 비롯한 배재학당 학우들은 만민공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토론회를 주도하였고, 누구라도 토론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와 언론과 여론의 중요성을 대중이 각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토론회 책임자가 미곡전 주인이 되어 대중의 생각과 말을 통한 여론의 장이 열린다.
만민공동회는 고종이 전국의 보부상을 동원하여 강제 해산시켜 막을 내리고 이승만은 역적이 되어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 수감 되는 비극적인 결말이 되었지만 한성감옥은 국부 이승만의 골고다 언덕이 되었고 이 민족은 자유민주주의 구원을 얻게 되었다.
배재학당을 통한 인재의 육성, 자신의 생각과 말을 공론화 시켜 사회이 나아갈 길을 밝히는 각성은 사회정화의 시작이다. 웨슬리안 아펜젤러의 사회적 성화는 그렇게 싹을 틔우고 이 땅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열며 문명개화의 출발을 시작했고 견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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