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한 국부 이승만은 37세가 된 1912년에 기록한 비망록(Autobiographical Note, 1912.)”에 배재학당에 대한 소회를 남겨 놓았다. 그 해 국부 이승만은 전년도 일제가 날조하여 대대적인 기독교인 탄압사건이었던 105인 사건으로 쫒기는 몸이 되어 33년의 기나긴 망명길에 오르는 해이기도 했다.
“내가 배재 학당에 가기로 하면서 가졌던 포부는 영어를, 단지 영어만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영어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배웠는데 그것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사상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억압받고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국가 시민들은 그들의 통치자들의 억압으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으로 들은 나의 가슴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지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너무나 혁명적인 것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도 그와 같은 정치적 원칙을 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종과 민비는 매관매직도 부족해 과거시험까지 팔았다. 청년 이승만은 번번히 과거시험에 낙방할 수 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폐지가 되었다. 실의에 찬 청년 이승만에게 유년시절부터 의형제로 지내온 신흥우는 배재학당 입학을 간곡하게 권유한다.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배재학당에 입학한 청년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그의 스승 아펜젤러를 만나 인생의 가장 큰 전환을 맞이 한다.
한성감옥에 수감 되어 있었던 1899년 12월 28일 이승만은 스승 아펜젤러에게 한통의 서신을 보냈다. 그 편지의 일부를 발췌하여 보았다.
“저희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값비싼 담요와 쌀, 그리고 땔감 등을 보내 주신 데 대하여 어떤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저와 같이 비참하고 죄 많은 몸을 감옥에 갇혀 있는 가망 없는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고, 더욱이 의지할 데 없는 제 가족들에게 먹고 살아갈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에 조직한 학생회인 협성회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고, 졸업식때 고관대작을 불러 놓고 학생대표로 영어연설을 한 이승만에 대한 아펜젤러의 관심은 각별했다. 제자의 옥바라지는 물론 사형선고를 받은 이승만의 구명을 위하여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아펜젤러는 감옥에서 초인적인 독서와 집필활동을 한 이승만에게 공부에 필요한 서적과 성서를 넣어주며 그의 인생을 조력한 가장 큰 든든한 후원자였다.
옥중에서 스승 아펜젤러가 목포를 가는 길 배가 전복되어 순교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청년 이승만은 하루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슬피 울었다.
국부 이승만은 아펜젤러가 이땅에 남긴 인재육성의 절정이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며 배웠던 중고등학교의 커리큘럼이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서 처음 시작 된다. 하다못해 수업시간의 끝과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까지 배재학당에서 시작되었다. 완고한 유교선비였던 청년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통해 근대인으로 육성 되었고, 육성 된 그의 어깨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얹어졌다.
아펜젤러와 국부 이승만 없는 자유대한민국의 탄생은 없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아펜젤러는 성년 직전 18세에 감리교 메소디스트로 중생(Regeneration)했다. 웨슬리안으로 다시 태어난 아펜젤러는 선교방식에 있어서도 감리교의 아버지 존 웨슬리를 쫒아 봉건 조선의 사회적 성결을 위하여 헌신한다.
존 웨슬리는 대학을 다닐 때 매소디스트 즉 규칙쟁이라고 조롱을 받을 정도로 구별되는 거룩함, 성화, 성결을 추구했다. 내면적 성화는 물론 외적 성화를 통한 실천적인 삶과 나아가 사회적 성화를 외쳤다.
존 웨슬리는 영국 전역을 말을 타고 다니며 대중 앞에서 설교와 집회를 열어 사회적 성화를 가르쳐 영국이 낳은 위대한 부흥운동가였다. 그는 말을 타고 이동하며 영국 전역을 돌며 모든 대중을 위해 헌신한다. 그가 말을 타고 영국을 다닌 거리가 무려 지구 12바퀴에 해당하는 29만마일이다. 그는 노동자, 농민, 광부, 뱃사람, 창녀와 범죄자를 모아 놓고 설교를 하였다. 말등에서 책을 읽고 말등에서 식사를 하며 말등에서 보낸 시간이 말 아래서 보낸 시간 보다 많았다.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 운동이 퍼져나갈 때 영국은 산업혁명의 휴우증으로 인간 소외, 빈부격차, 계층갈등, 향락주의, 배금주의 등 많은 사회적 갈등과 부작용이 확산되어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었다.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운동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며 일촉즉발의 사회적 위기감과 긴장감을 치유하였다.
웨슬리는 교회가 앞장서서 먼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함과 도와야 함을 역설했다. 무료 의료시설과 무료 급식시설을 설립하여 빈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았고 이러한 사회적 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노예무역과 노예제도 폐지 운동도 활발하게 벌렸다. 이러한 사회적 성결운동은 초기 자본주의 부작용을 치유하였고, 노예무역과 노예제도 폐지의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노예제를 폐지시켰다. 국회에서 노예무역과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외롭게 싸우는 윌리엄 윌버포스에게 웨슬리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운동은 사회적 갈등을 봉합함으로서 프랑스에서 불어닥친 광기와 살육과 혼란의 프랑스 혁명이 영국에 상륙하는 것을 막아냈다.
웨슬리안 아펜젤러는 조선에 만연한 사회적 봉건폐습과 싸우기위하여 교육에집중했다. 각성한 현대적 의미의 시민을 육성하기 위하여 학교를 세우고 인쇄소를 통해 성서보급을 하며 언론과 언론인 독립신문, 협성회, 만민공동회의 든든한 후원자로, 조력자로 사회변혁을 이끌며 복음을 전했다.
아펜젤러의 가장 큰 꿈은 조선에 자유인을 길러내는 것이었다. 아펜젤러의 교육관은 확고했다.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협성회회보·매일신문의 발간, 독립협회의 활동을 도왔고 자유와 인권이란 근대 가치가 교실에서 사회로 퍼져 나가게 했다. 미국 정부와 선교본부에서 정치적 문제와 내정문제의 개입을 엄격하게 금지시켰지만 아펜젤러는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위하여 투쟁하는 서재필·이승만·윤치호 등의 근대화 운동가들을 핍박과 탄압의 칼날 앞에 방패를 자처했다.
아펜젤러의 선교방식은 이땅에 자유와 민주주의, 국민의식과 인권, 언론과 출판에 혁혁한 유산을 남겼다.
반면, 언더우드는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의 후예이다. 가장 칼빈주의적인 장로교의 목사이다. 칼비니스트였던 언더우드는 제네바의 칼빈이 그러하였듯 금욕, 기강, 규율 등을 통해 개인적 삶과 변화에 집중한다. 장로교 7가지 세례기준에서 보듯이 금욕, 기강, 규율, 근면, 성실, 도덕성 등 개인의 바르고 균형잡힌 삶에 집중했다. 언더우드는 교리와 개인의 신앙생활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아 선교사 간에 갈등도 있었다. 조선의 칼빈 언더우드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선교방식과 방향에 있어 아펜젤러는 조선사회의 교육과 인재육성을 통해 내부의 동력을 폭발시켰다면, 언더우드는 개인적인 선교역량도 뛰어났고, 미국, 일본 등을 다니며 조선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기부금을 유치하고, 에비슨을 비롯한 수 많은 선교사가 조선으로 건너오게 하여 외부의 동력을 통해 조선의 변혁을 이끌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칼비니즘과 매소디즘은 조선선교에 순서와 우열을 가릴 문제가 아니다. 조선에 반드시 필요한 영역을 각자에게 맡겨 변혁을 이끌어내는 하나님의 역사함이고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다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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