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전래의 조선 최초 선교사는 1832년 암허스트호를 타고 보령 고대도에 잠시 머물다 간 유태계 독일인 칼 귀츨라프이다. 그러나 선교를 위하여 찾기 보다는 상선이었던 동인도 회사 암허스트호의 의사 겸 통역사로 고대도에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가난으로 힘든 고대도 주민들을 위해 감자 재배법을 알려주고 조선의 존재를 서양에 알리는 역할에 그치게 된다.
그의 일기에 감자를 전해 준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땅을 선정하여, 100개가 넘는 감자를 심었다. 수백 명의 주민들이 둘러서서 놀라운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날 감자밭 주위에 울타리가 둘러 처진 것을 보고 매우 기뻤으며, 재배 방법대로 따른다면 이 훌륭한 농작물은 조선에 널리 확산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반도에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의 시작은 영국인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이다. 토마스 선교사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어려서부터 언어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 10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14살 때 옥스퍼드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 입학을 허가를 받았지만 연령제한으로 입학을 하지 못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성년이 되기 전 156번의 설교를 할 정도 뛰어난 인재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웨일즈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웨일즈는 칼빈주의 감리교 (Calvinistic Methodist church)가 탄생한 곳으로서 훗날 1904년 –1905년 세계 3대 영적 대각성 운동 중 하나인 웨일즈 대부흥이 있은 곳으로서 칼빈의 영향이 깊었던 곳이다. 웨일즈 대부흥이 일기 전 웨일즈에는 15회의 크고 작은 영적각성 운동이 있어 자연스럽게 그의 신앙심도 깊어졌다.
1863년 연상인 캐롤라인 고드프리와 결혼하고 한달 후 선교를 위해 부부는 중국으로 떠나, 12월 한겨울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를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이미 도착 당시 아내인 고드프리는 임신 중에 있어 현지 적응과 기후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소극적인 선교로 일관하는 선교책임자와도 마찰을 겪게 되면서 새로운 선교지을 찾아 내륙인 한커우를 다녀온다. 그 사이 아내 고드프리는 하혈을 하다 바이러스에 감염 되어 "주님은 나에게 고귀한 분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아내를 잃은 토마스 선교사는 실의에 빠졌고, 현지 선교사의 소극적 선교와 부딪히게 되면서 사직한다. 1864년 산둥성 북부 해안 도시 즈푸로 가서 세관 통역관으로 일을 하며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소속 선교사인 알렉산더 윌리암슨을 만나게 된다. 토마스 선교사는 윌리암슨의 소개로 김자평과 최선일 2명의 조선인과 만나게 된다. 그들은 모두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온 천주교인이었다. 그들은 묵주, 전주교 문답교리서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것에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오염되지 않는 성경을 전해 주겠다는 선교열에 불타 올랐다.
토마스 선교사는 김자평과 최선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며 그들의 안내를 받아 조선에 나누어 줄 한문 성경책을 준비하여 중국 어부의 목선을 타고 백령도와 창린도, 석호정, 선진포, 만경대 등을 돌며 두달반 동안 성경을 나누어 주고, 복음을 전파하며 한국말을 배웠다, 그러나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만주를 돌아 육로를 통해 1866년 1월 북경으로 돌아 온다.
당시 조선은 사정은 폭풍전야와 같았다.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자신의 처가 천주교 신자였음에도 병인박해를 일으켜 8,000여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신부 12명 중 9명을 처형했다. 더욱이 오가작통제로 5집 중 한집에서만 천주교 신자가 나와도 5집 모두를 처형하는 광기의 세월이었다.
이 때 프랑스 신부 리델은 살아 남아 탈출하여 중국에 정박하고 있는 프랑스 함대 로즈 제독에게 사실을 알린다. 격분한 로즈 제독은 조선 정부의 천주교도 및 프랑스 신부 처형을 항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출항을 결정한다. 조선에 다시 입국하여 선교를 준비하고 있던 토마스 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한다.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성경을 나누어 주다 잡히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는 순교를 각오함이었다.
그러나 때 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프랑스 함대는 베트남으로 가게 되면서 재입국이 좌절 되었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토마스 선교사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위하여 조선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통역사로 승선한다.
마차 세대분의 성경을 싣고 조선으로 향한 토마스 선교사는 평양 감사 박규수의 입국불허와 이에 불응하는 제너럴셔먼호 간의 전투에 휩싸이며 사로잡히게 된다. 전투 중에 한문 성경을 대동강변에 던지며 “야소를 믿으세요”라며 외쳤다.
대동강변 쑥섬에 사로잡힌 토마스 선교사는 처형을 기다리는 중 자신의 목을 내리치는 박춘권에게 웃음을 띠며 성경을 전해주며 순교한다.
성경책을 받은 박춘권을 당시의 기억을 남겨 놓았다.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순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였스나, 이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 왔노라“
박춘권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큰공을 세워 벼슬길에 올랐지만 두고 두고 당시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살다가 평양에서 선교하고 있던 목사 마펫(Moffett, S. A., 馬布三悅)에게 죄를 고백하고 1899년 세례를 받아 안주교회 영수(領袖)가 되어 남은 생애를 복음에 투신한다.
토마스 선교사를 처형한 박춘권에게 세례를 준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한국 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며 북한에 복음을 전하고 많은 교회를 세웠다. 마펫 선교사는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재직한다. 평양신학교는 한반도 복음화에 절대적 업적을 남기며 조선인 최초 선교사 이기풍 목사, 평양대부흥을 이끈 길선주 목사 등 초대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낸다.
마펫 목사는 평양에 장대현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역사함이었다. 장대현 교회는 세계3대 영적 대각성 운동인 평양 대부흥의 중심에서 평양 및 북한 땅에 영적각성 및 정신혁명을 주도한 조선 최초의 장로교 교회이다. 장대현 교회를 통해 배출 된 신앙인은 3.8선이 그어지고 공산당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남하하여 6.25 사변 및 전후 복구, 반공 일선에서 지대한 공헌을 남긴다.
토마스 선교사는 화공으로 불타고 있는 제너럴셔먼호에서 대동강변에 성경책을 집어 던지며 예수님을 전한다. 그 과정에서 3권의 성경책을 받은 12살의 어린소년 최치량은 평양 관리였던 박영식에게 주었고 박영식은 자신의 집을 성경책을 뜯어 도배를 하였다. 훗날 최치량이 박영식의 집을 구입하여 여관으로 개조하여 장사를 했다. 그 여관 자리에 장대현 교회가 세워지고 북한 복음의 심장이 되었다.
조선시대 고려 도읍 평양과 황해도, 평안남도 사람을 패서인이라 부르며 차별 받으며 벼슬길은 꿈도 꾸지 못했다. 고려 때 무역으로 명성을 날리며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을 구가했던 평양은 조신시대에 장사치라는 비아냥 속에 차별을 받으며 여전히 상업이 발달 했고 상술에 능했다. 또한. 장사치로 천대 받은 사농공상의 차별은 말 못할 울분이 가슴을 채웠다. 상업이 발달하고 울분은 넘쳐 거짓말과 속임수가 넘쳐났고, 저잣거리는 거친 왈패의 싸움이 일상이며 도박과 매춘이 만연한 타락한 평양 이었다.
서울에서 잠시 선교활동을 한 마펫 선교사는 타락한 평양에 선교를 결심하였다.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마펫 선교사는 저잣거리에서 설교를 하다 저잣거리 왈패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이기풍의 던진 돌에 맞아 턱과 얼굴이 상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기풍은 훗날 평양신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조선 최초의 선교사로 제주도 선교에 나서 제주도 부흥을 일군다.
마펫 선교사와 조사 한석진은 목숨을 걸고 평양에 들어선 첫날 묶게 된 곳이 최치량이 운영하고 있는 성경이 도배 된 여관이었다. 여관방에 들어선 마펫 선교사의 조사인 한석진은 “선교사님, 이 벽지는 한문 성경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었던 마펫 선교사가 꿈인가, 생시인가 몇 차례 자신의 귀를 후벼 보았다고 한다. 이때 여관주인이 곧 성경이 들어오게 된 배경을 설명을 듣고 평양선교가 마펫선교사의 사명임을 깨닫게 된다.
마펫 선교사는 최치량의 여관을 사들여 그 자리에 장대현 교회의 전신인 널다리 교회를 세웠다. 술과 여자, 노름으로 방탕한 삶을 살던 최치량은 자신의 잘못을 눈물로 회개하고 장대현 교회 초대 장로가 되어 복음에 남은 여생을 마친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할 당시 평양은 10만 인구의 도시였다. 평양대부흥이 일었을 때 저잣거리에 기생이 주저 앉아 울부 짖으며 회개를 하고 평양은 백성의 울부짖음이 메아리 친다. 평양대부흥을 거치면서 평양에는 세례교인만 2만5천명에 달했고 1,000개의 교회가 세워졌으며 평양은 7만의 교인이 살아가는 동양의 예루살렘이 되었다. 몇년 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들은 그의 동료 존 로스는 조선선교를 위해 한글 성경번역에 나선다. 존로스의 성경번역본은 그대로 조선에 뿌려진다.
문명화를 거부하고 원시생활을 하는 미개 부족에 들어간 선교사는 땅이라도 밟고 돌아다니다 잡혀 처형을 당하지만 토마스 선교사는 땅을 밟는 순간 처형을 당했음에도 평양의 영적 부흥은 불길 같이 일어났다.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 된 것은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의 순간 뿌린 성경의 말씀이 있었고, 하나님이 조선을 궁휼히 보고 있었음이다.
김일성은 북한을 적화 하면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기독교인으로 골치를 앓게 되면서 무자비한 탄압에 나선다. 결국 김일성은 장대현 교회를 헐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운다. 남하한 기독교인은 반공투사로 변신한 이북민은 종교계, 군대, 경제계 등 사회 각 분야로 흩어져 대한민국 건국과 6.25사변, 인천상륙작전, 5.16 혁명, 산업화에 참여하여 막대한 공헌을 한다.
북한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제너럴셔면호를 격침시켰다고 날조하고 있다. 그만큼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평양이 한 때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된 것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역사의 우연으로 받기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먼저 아닐까 생각한다.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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