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은 일본에 백자를 선물한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도자기 채색 기술을 배워 일본식 채색도자기를 탄생시킨다. 장차 유럽을 강타할 도자기가 선적 된 이마리 항의 이름을 딴 이마리 도자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장사 속 밝은 네덜란드 상인과 만난 일본의 채색 도자기는 유럽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이마리 도자기는 유럽귀족의 권위와 부의 상징이 되었다. 유럽이 열광하는 동안 이마리 도자기는 일본에 금괴 65톤을 선사한다. 또한, 도자기를 포장한 종이에 그려진 일본 풍 그림은 유럽 인상파에 깊은 영향을 주어 화풍까지 바꾸어 버린다. 일본은 유럽에 문화대국으로 자리 잡는다.
일본에 백자기술을 가르쳐 준 이삼평은 일본에 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사당까지 지어 지금도 추앙의 행열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이 유럽에 수출한 이마리 도자기는 조선백자와는 근본 부터 다른 일본에서 재창조 된 도자기이다. 기술은 전수 되었지만 일본화가 되어 버린 일본의 상품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포로송환을 위하여 일본에 사명대사를 보낸다. 13회에 걸쳐 쇄환사를 파견하였지만 끌려간 조선인은 아무도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쇄환사를 보면 산으로 도망갔다. 수만명의 포로 중 돌아온 포로는 불과 수백명만 돌아왔을 뿐이며, 귀환한 조선인을 피로인이라 부르며 사회적 멸시와 차별 속에 대부분 노비가 되어 비참한 생을 마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100년 후 1697년 3월 2일 승정원 일기에 광주 관요에서 굶어 죽은 39명의 조선 도공기록이 나온다.
“굶어 죽은 자는 39명이었고 힘이 없어 문 밖 거동을 못하는 자는 63명에 가족이 흩어진 집이 24집이었다. 남은 자들도 힘이 없어 그릇 형태를 만들지 못할 지경이었다.(윤3월 2일 '승정원일기')
일본이 유럽에 도자기를 팔아 금화를 긁어 모으고 있을 때 조선은 국가의 관요에 고용 된 솜씨 좋은 도공 조차 천민으로 살아야 했고, 도자기를 굽는 것 외에는 일체의 생업을 금지했다. 사사로이 그릇을 만들어 팔거나 도주하는 경우 곤장 100대에 징역 3년형에 처했다. 당시 곤장 100대를 맞으면 대부분 휴우증으로 죽는다.
연산군 때 단천 은광에서 일하던 김감불과 김검동은 은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은제련법을 개발한다. 납이 포함된 은광석에서 녹는점의 차이를 이용해 납만 산화시키고 은을 골라내는 기술 이다. 당시 은제련법은 광석을 태운 다음 재에서 은을 걸러내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생산성이 매우 낮았으나 “연은분리법”의 개발로 몇배에 이르는 은생산이 가능했다.
그러나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중종은 연산군 때의 사치풍조 척결을 내세워 은채굴을 금지시킨다. 또한, 그 이면에는 수백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부귀를 누리던 양반은 노비제 사회를 지켜야만 했고 은을 계속 생산하면 교역이 번창하고 그로 인해 농업을 중시하는 나라의 근본이 무너질 수 있다는 양반의 걱정이 있었다.
조선에서 은생산이 중단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은 경수와 종단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해 연은분리법을 습득하는데 성공한다. 일본의 은생산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멕시코에 이어 세계 2위의 연간 20만kg을 생산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 들인다.
임진왜란 이전 막대한 은생산으로 벌어들인 돈이 임진왜란의 군자금이 되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이와미 은광은 세계 최대의 은광이 되어 연간 수십톤의 은이 수출 되어 일본 근대화의 종자돈이 된다.
조선에서 넘어간 도자기 기술과 은제련법은 일본을 부강하게 만들었고, 17세기 말 일본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인 겐로쿠 시대의 물질적 기반이 된다. 연은분리법이 가져다 준 축복으로 자본은 축척 되었고, 축척 된 부를 기반으로 문명개화로 이어져 끝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같은 도자기 제작기술과 은제련법을 두고 조선은 그 가치 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와 끔찍한 굶주림과 가난의 시대를 열었고, 일본은 세계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극한다.
도공을 굶겨 죽인 국가에 대한 반성 조차 없이 일본이 조선의 은제련술과 백자기술로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고 우리가 비난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 최고의 TV 생산국이다. TV를 발명한 미국이 반미하는 우리나라를 TV 기술을 두고 우리를 비난하여야 할까?
조선은 2~3%의 양반을 위하여 백성이 죽어 가야 하는 사농공상의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노동을 하는 것을 땀 흘리는 근로를 가장 큰 수치로 여겼다.
구한말 조선시대 양반에 대한 기록이 흥미롭다.
조선의 성리학은 노동을 천시했고, 양반이 노동을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재화의 재분배라는 사회적 핵심가치인 상업을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겼고,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을 도둑질의 근본으로 보았다.
조선에 건너와 선교사로 사역했던 제이콥 로버트 무스의 기록을 보자.
“조선의 양반은 자신이 육체 노동을 하지 않음을 자랑하기 위해 손톱을 놀랄만한 길이로 기르고 있었다. 몰론 모든 양반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확연한 양반이나 한양의 관료들은 굳이 손톱을 기르지 않아도 귀한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양반들의 손은 모두 하나 같이 깨끗하고 부드러운 흰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풍토는 생업에 종사하여야 할 백성에게 조차 노동을 부끄러워 하는 풍조를 만들었다. 그 결과 극단적 가난과 기아에 시달리게 했고 양반은 그 비참한 삶을 사는 백성의 피를 빨았다.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가 본국에 양반에 대하여 보고하고 있다.
"조선의 양반들은 평민에게 가혹한 폭정을 가한다. 양반들은 돈이 떨어지면 평민들의 물건을 착취하고 약탈하는데.. 그런 것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다. 관리나 수령 등의 양반들은 논이나 집을 사고도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이것은 관습이다. 조선에서 가장 못된 착취계급은 바로 양반이며 조선의 왕이 백성들을 잘 통치하려 해도 양반들이 중간에서 권력을 남용하여 횡령과 착취를 일삼는다."
또한 양반의 도덕적 타락도 심각했다. 성적문란은 극에 달해 있었다. 서자나 서얼은 자식취급 조차 하지 않았고 부자유친의 나라 조선에서 피붙이 자식을 내다 버리다시피 했다. 여자에 대한 차별은 작금 원리주의 이슬람 국가에서 벌어지는 차별은 애교스럽다.
평생을 조선 선교에 바치고 순교한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는 양반의 심각한 도덕적 타락을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의 양반들은 아주 비열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결혼을 한 후 3일 동안은 부인과 산다. 그런 후에는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다. 자기 첩들하고만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가엾은 본부인에게는 정절을 강요한다. 만약 그녀가 도망가거나 정절을 버리면 관리에게 데리고 간다. 그러면 관리는 그녀를 매질한 후 자기 종에게 줘버린다. 양반의 부인들은 평소 혼자서 집 밖으로 외출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도덕성의 타락은 사회를 총체적으로 부실하게 만든다. 어느 학문이나 종교 보다 높은 도덕성을 주창했던 성리학의 민낮은 백성을 수탈하고 고혈을 짜는 수단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성리학은 백성조차 노동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심각한 타성과 패배감을 심어 주었다.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은 조선을 여행하고 만연한 나태와 게으름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인들은 커다란 돼지 한 마리를 머리에 이고 갈 정도로 힘이 세다. 이들은 일본인보다 몸몸집이 크고 건강했다. 하지만 서양인이라면 혼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일 조차도 매사 여러명이 달려들어 반나절 동안 매달려 있기 일수였다. 조선의 마부들은 어찌나 게으른지 말의 안장 하나를 싣는데만 3명이 달라 붙어 잡담을 하느라 30분을 보낸다”
조선을 샅샅이 정탐하고 조선잡기를 남긴 혼마 규스케도 심각한 게으름을 질책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목수라면 반나절 걸려서 할 수 있는 일을 조선의 목수는 3,4일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교통도 빈번하지 않고 생존도 곤란하지 않다. 조선의 현상에 대조해 보면 감히 깊이 책망할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그 작업의 태평함에 화가 치밀어 오를 정도이다.”
지배층의 타락한 도덕성, 백성의 고혈을 짜는 것이 정당화 된 가치관 나아가 노동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는 유교의 뿌리 깊은 관습은 총체적으로 사회를 타락시켜 버렸다.
잘못이 누구인가에게 있는지 조차 분간 할 수 없는 악의 일상화가 구한말 조선의 모습이었다.
조선에 선교사로 건너와 사역한 다니엘 기포드 선교사는 당시 풍속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엄한 처벌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도둑질은 무서울 정도로 일상화 되어 있다. 도적들은 거대한 칼을 차고 다닐 뿐만 아니라 칼을 능숙하게 다룬다”
“거짓말은 일상화 되어 있다. 조선 사람들은 수대에 걸친 연습으로 거짓말을 하는 기술을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 시켰다. 상인들은 모든 거래에서 끊임없이 사기를 치고 무리수를 둔다. 지금은 훌륭한 기독교인 된 내 친구는 과거에는 아침에 깨어나는 순간부터 오늘은 누구에게 사기를 칠까? 하는 생각부터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일하지 않는 백성, 그 백성의 알량한 재물 마저 착취하고 강탈하던 양반. 그 사회는 희망 없는 패배감 속에 가난과 굶주림을 숙명으로 받아 들이며 살아야만 했다. 언제나 경제는 파탄난 상태였고, 파탄난 경제는 일상이었다.
달레 신부가 남긴 기록이 뼈 아플 정도이다.
“조선에서 왕궁이라고 불리는 것은 빠리의 좀 넉넉히 사는 연금생활자라면 살려고 하지 않을 초라한 집들이다”
빠리의 중산층 조차도 살지 않을 임금의 궁궐을 가진 초라한 나라 그것이 조선이었다. 임진왜란 때 타버린 궁궐을 200년도 넘게 흉물로 방치한 그래서 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하여 또 다시 백성의 피를 빨아 다시 지은 경복궁이 국보로 남아 있다.
조선을 생각하면 북한이 보인다. 조선과 북한의 사회 시스템이 다를 것이 있을까?
북한 동포의 참상이 조선의 참상이고 이씨왕조가 김씨왕조로 바뀌었을 뿐이다.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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