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 박헌영은 함열 갑부 김해균이 사는 혜화동 저택 ‘혜화장’을 근거지로 삼았다. 미국에서 귀국한 우파 영수 이승만은 조선타이어라는 기업을 사장 정진섬의 ‘돈암장’을 숙소로 삼았다.
그해 9월 박헌영은 여운형을 끌어들여 공산주의-사회주의계열 연합 형식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했다. 인민공화국을 창설한 장소는 경성 옥인동 47번지, 친일 귀족 윤덕영이 만든 ‘벽수산장’이었다./박종인기자
◈1946년 서울시헌장
해방이 되고 1년이 흐른 8월 10일 제정된 ‘서울시 헌장’은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변경했다. 새롭게 탄생한 서울시는 두 달 뒤인 10월 1일 고시를 통해 행정구획명칭도 변경했다.
개정 동명은 대체로 합방 이전 명칭을 채택하거나 위인을 기념하여 작명했고, 일본식 정(町)은 동(洞), 정목(丁目)은 가(街)로 고쳤다. 그리고 11월 21일 ‘서울특별시헌장 수여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경성은 사라지고 서울특별시가 앞으로 탄생할 대한민국 국도(國都)로 선포됐다. 그런데 수여식을 보도한
신문들 부터 혼란스러웠다.
행사 다음 날인 11월 22일 자 ‘한성일보’는 행사장을 ‘서울중학 강당’이라고 표기했고 당일인 11월 21일 자 ‘공업신문’은 ‘경성중학’이라고 표기했다.
문영당이라는 출판사는 ‘신동명입(新洞名入) 서울안내’라는 지도를 제작해 재미를 봤다. 지명을 붉게 인쇄한 식민 시대 지도에 검은색으로 새 지명을 추가해 인쇄한 지도였다.
지도에는 출판사 주소도 신주소 ‘인현동’과 옛 주소 ‘앵정정(櫻井町)’이 병기됐다.
그 1년 사이에 참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해방된 시민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그 서울특별시 대저택들에서 벌어졌다. 대저택 이름은 각각 경교장, 돈암장, 혜화장과 벽수산장이다.
◈해방, 그리고 귀국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 쇼와가 항복을 선언하는 라디오방송이 경성 시내에 흘러나왔다. ‘패전(敗戰)’
‘항복(降服)’ 같은 명시적인 표현은 없었다.
‘4개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 같은, 얼핏 들으면 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 가득했다. 다음 날에야 경성 사람들은, 조선인들은, 자기들이 해방됐음을 알게 되었다.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일제히 공개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이미 총독부로부터 권력 인수를 제안받은 ‘건국동맹’ 지도자 여운형은 8월 15일 당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광주에서 벽돌 공장 노동자로 은신해 있던 공산주의자 박헌영은 즉각 경성으로 올라와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준비위는 남조선노동당, 즉 남로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11월 23일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 1진이 환국했다. 만인의 대환영 속에 귀국한 지도자 김구는 다음 날 조선중앙방송 라디오를 통해 “삼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아 자주 독립 완성에 매진하겠다”고 선언했다.
(1945년 11월 25일 ‘조선일보’)
1940년 강제 폐간 후 복간된 조선일보는 복간 사흘만인 11월 26일 1면에서 ‘김구 주석에의 기대 절대-국내 현실을 파악해 전선 통일이 요체’라고 주문했다.
이미 귀국해 있던 이승만이 김구를 만나 환국을 축하했고 여운형 또한 김구를 찾아가 덕담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