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깡촌에서 나고 성장했다. 지지리도 못살고 지지리도 꾀죄죄 했던 남루한 성장기였지만 모두가 산촌마을에서 그렇게 살았기에 불편함도 창피함도 없었던 어린시절이었다. 지금도 강원도 깡촌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전기 들어오냐고 농이 오갈 정도로 아직도 강원도를 산촌마을의 가난을 연상하곤 한다.
강원도 사투리 중 골짜기를 지칭하는 고라데이라는 말이 있다. 모퉁이를 모테이라고 지칭한다. 본인을 소개할 때 전기 들어온지 몇일 되었고 강원도 고라데이 모테이에 전기 들어와 경사 났다고 농을 농으로 받기도 한다.
아마도 강원도 만큼 낙후와 가난의 상징이 제주도가 아닌가 싶다. 강원도처럼 농지가 부족했을 것이고, 섬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물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래서 강원도 만큼 제주도는 가난을 숙명으로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난과 관련한 설화가 넘치는 곳이 제주도이고 강원도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 한 것은 드넓은 농토와 물산이 풍족했던 전라도에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수탈의 고장, 가난의 고장으로 둔갑하여 어마어마한 피해의식으로 대한민국을 겁박하고 있다. 그래 보아야 가난과 피폐함은 강원도와 제주도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할 뿐임에도 말이다. 배가 부르면 개소리는 늘어나는 법이다.
택배로 배송 된 맛있는 감귤 한박스를 받고서 어릴 때를 회상했다. 아마도 초등학교 졸업반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먹어 본 감귤맛을 잊을 수 없다. 당시 밀감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맛도 기가 막혔지만 손으로 껍질을 까고 조각 조각 과육이 뜯어지는 것이 더 신기했던 것 같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자그마한 크기의 껍질 두꺼운 국광 사과가 가장 맛있는 과일이었던 고라데이 모테이 동네네 그 시절 밀감은 하늘나라 천상계 과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현재 재일교포 중 제주도 출신이 16%를 차지하고 있다. 도별 인구대비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제 시대 제주도민은 몇집 건너 한집은 일본으로 도일했다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아마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가난을 탈출하기 위하여 도일을 했을 것이다. 숙명적 가난을 극복할 일본은 제주도민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강제징용이니 어쩌며 역사를 왜곡하여 날조를 하고 있지만, 식민지배 기간 내내 문명개화의 신천지 일본에서 기회를 찾고자 수백 수천명의 군중은 부산항에 몰려들어 밀항을 하고자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돈을 찾는 군중 즉 골드러쉬는 인간의 본성이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일본에 눌러 앉은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는 1965년 고향에 감귤묘목 기증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 났었다. 당시 재일 한인 사회에서는 제주 개발협회, 제주도민회, 제주 친목회, 재일경제인협회 등의 단체와 마을 단위 친목회를 통하여 고향에 감귤 묘목 보내기 운동이 본격 전개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제주도에 감귤나무가 도입 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지만 1960년대까지 농사수준은 되지 못했다. 제주도가 본격적으로 밀감의 고장이 된 것은 제일동포의 대대적인 묘목나무 운동으로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먹은 밀감 대부분은 일본에서 건너온 밀감종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1967년에 29,000그루의 밀감나무가 기증되었고 기증운동은 70년대 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아 수십만 그루가 기증 되었다.
제주도 출신 제일교포의 감귤나무 기증운동이 밀감의 고장 제주도를 만드는데 엄청난 기여 하였지만 그 보다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도 밀감재배의 가치를 먼저 알아 보고 제주도를 밀감의 고장으로 리모델링 했다..
1964년 2월에는 연두순시차 제주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감귤재배를 장려하라는 특별지시를 도지사에게 내린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도는 여건이 달라 전국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식량 증산' 대신 수익성 높은 감귤을 적극 장려하라"고 지시했다. 극단적 영농불리의 제주도의 특성상 식량증산을 위한 농업장려 보다 수익성 높은 감귤의 가치를 갈파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1965년 '감귤증산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고, 때마침 불어닥친 제주도민 출신 제일교포의 감귤나무 기증운동과 맞물렸다. 그리고 1968년도부터 제주도의 감귤 산업은 직접 청와대 농특 사업으로 확정되어 저리 융자로 감귤원 조성 자금을 지원받았다. 1960년대 말에는 한국 정부가 감귤 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실시한 이후 온주 감귤 재배는 서귀포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1964년에 110㏊에 불과했던 재배 면적이 10년 후인 1974년에는 9천923㏊에 달하며 90배라는 초고속 성장을 했다.
감귤은 1960∼1970년대 다른 농작물에 비해 수입이 월등히 높아 집 정원에 몇 그루만 심으면 자녀의 학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고 해서 '대학나무'로 불렀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주도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제주도가 국제적인 휴양지가 된 것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인해 광공지로 개발이 시작 되어 지금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제주도라는 섬의 특성상 만성적인 물부족에 시달렸고 이 문제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해결하여 주었다.박정희 대통령은 국토건설단을 통해 어승생댐 건설을 시작했다. 1967년 착공되기 시작한 어승생 수자원 개발 사업은 10억 2000만 원이라는 막대한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구십구곡과 어승생에서 자연유하식 수로를 통해 2만 7000여미터제곱 규모의 저수지로 용수를 끌어들여 48.17km에 이르는 송수관과 16개 지선을 통해 다시 공급하는 계획을 세웠다. 박정희 대통령은 설계도까지 손수 그렸다.
1969년 공사가 어승생댐 건설이 완료 되어 어승생 저수지에 10만톤의 물을 채웠지만 바닥 한 쪽이 붕괴 되어 저수된 물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제주도 지질이 현무암질이기 때문에 물을 가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았고 서울대학교와 동경대학교 지질학자를 초청해 자문을 구한 후 암반층까지 바닥을 3m 더 파내고 철근콘크리트로 보강하고 코팅비닐을 깔아 저수에 성공한다. 당시에 획기적인 해결책이었다. 만성적인 물부족에 시달리던 제주도민은 물걱정에서 영원히 벗어난다.
개대중이나 깡통영삼 같은 개조선 개씹선비들이 염병지랄 떨 때 시대를 창조한 거인의 족적은 무궁하기만 하다. 대한민국 어느 한 곳이라도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이 아닌 곳이 있는가 말이다.
주여!!
기도로서 건국의 문을 열은 주님이 사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양떼를 가장 많이 먹인 박정희를 기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