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조선을 여행하고 기록을 남긴 일본의 저술가, 특파원이었던 혼마 규스케의 조선정탐록에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언문 이란 조선 문자를 말한다. 교묘한 것은 서양의 알파벳을 능가한다. 조선인들은 실로 이와 같이 교묘한 문자를 가지고 왜 고생스럽게 일상의 서간문에까지 어려운 한문을 사용하는지 의문이다. 이와 같이 교묘한 문자도 겨우 중하층 사회에서나 사용 될 뿐이다.”
한국인은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한글이 과학적이고 사용하기 쉬운 세계 최고 수준의 우수한 문자 중에 하나임은 틀림이 없다.
한글을 만든 세종의 한글 창제 동기 중 하나는 당시 상국인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익히는 보조수단 으로 즉 발음기호였다는 주장은 무척이나 설득력이 있다. 중국에 대한 사대가 국시였던 당시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하여 보아도 한자의 발음기호를 위한 한글창제설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이다.
나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유독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조선과 중국은 쇄국이 국가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포장하고 지배계층의 기득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혹세무민하며 망국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이미 데지마섬을 특별 무역구로 만들어 유럽과 교역하며 15세기부터 세계와 호홉하여 왔다. 그리고 쿠로후네 사건을 거쳐 메이지 유신을 성공하고 근대화의 길을 걸은 일본의 저력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필자가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교육이다. 일본은 이미 중세시대부터 불교사찰에서 사설교육기관인 데라코야(寺子屋)를 만들어 서민 대중교육을 일상화 하였다. 데라코야는 사찰에서 공부하는 학도를 일컬어 ‘데라코’라고 불렀다. 데라코야는 에도시대 낙후지역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급격하게 늘어났고 데라코야를 통하여 에도시대 국민 절반이 문자를 읽고 썼다.
조선시대 1%의 양반만 문자를 향유한 것에 비하면 에도시대 일본의 문자해독율은 역사적 기적에 가깝다. 19세기 초반에는 국민 70~80%가 문자를 향유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세계역사를 지배한 유럽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다. 지금 시대에도 유엔인간개발보고서에 문해율이 70~80%이르면 보통수준으로 분류하고 있을 정도이다. 메이지유신 후 세계견문을 위하여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보고서가 20만부가 팔리고, 1862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이 340만부 넘게 팔렸다.
교육받은 국민, 당시 여타 어느 나라의 범접을 불허하는 높은 문해율이 문명개화와 메이지유신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였고 각성한 대중의 지지가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대중화에 미쳐 있었던 조선은 지배계급인 양반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철저하게 대중이 문자를 가지는 것을 막았다. 그토록 과학적이고 터득하기 쉬운 한글을 뒷방 아녀자나 쓰는 문자로 “언문” “암클”이라고 불렀다.
구한말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선교활동에 나섰던 선교사들은 어려운 한자로 된 성경을 일자무식의 대중에게 읽힐 수가 없자 고심하다 한글을 찾아낸다. 한글로 번역 된 성경으로 포교활동에 나선 선교활동은 성공적이었다. 평양 대부흥 운동이 있을 정도로 기독교는 폭발적으로 확장 되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며 한글로 된 성경의 위력은 대단했다. 세계 최초 한글 단행본이 성경이 된 것이다.
당시 성경을 일독하지 못하면 세례를 주지 않았고, 이러한 개신교의 노력으로 문자보급이 늘어났지만 고작 서민대중의 몇%만 읽고 쓸 수 있었을 뿐이었다. 선교사들 중심으로 한글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되었고 띄어쓰기가 고안되고 한국인 학자도 연구에 뛰어들었다.
일제 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선총독부는 한글의 맞춤법 통인안에 나서 1922년 “보통학교용언문철자법(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을 제정하여 한국 맞춤법 통일에 나선다. 일제 시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대식 학교에 “한글 교과서”를 배포하여 한글 맞춤법이 자리를 잡아간다.
때마침 신학문과 현대문학이 등장하면서 대중소설이 유행을 타면서 소위 딱지본 또는 육전소설로 불리는 딱지본 소설은 책 읽기의 대중화·근대화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표지가 알록달록하여 아이들 딱지를 닮아 딱지본으로 부르기도 했고, 장터 국수 한그릇 값이 육전이었고 소설책 한권이 육전에 불과하다 육전소설로 불리며 익숙한 옛 이야기나 새로운 이야기들을 대량 생산해서 값싸게 판매함으로써 문자문화 자체가 확산되고 취미로서의 독서가 일상생활 안에서 자리잡게 되며 대중은 비로서 문자의 주인이 되었다.
여하튼 문맹율 99%의 조선이 조선총독부의 학교의 확대보급, 한글맞춤법 통일, 신식활판인쇄술 및 대량인쇄기술이 도입되면서 해방전후 문해율이 25%에 이르게 되었고 문자생활이 대중속으로 파고 들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반일정신병자는 일제 시대 교육이 황폐화 되었다며 해방전후 문맹율이 70~80% 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구한말 99%의 문맹율은 도대체 뭐냔 말이다. 문맹율 1%를 줄이는데 학교를 몇 개 지어야 하는지 계산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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