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감귤 1978년 3월 13일 오후, 서귀포 법환리에 있는 운정 감귤농장으로 일군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감귤 저장창고에서는 종업원들이 감귤 포장작업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밀감 사러 왔어요" 일행 중에 선두에 있던 사람이 농장 종업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작업에 열중하던 종업원들이 얼굴을 드는 순간, 종업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야 했다. 농장 안에는 갑자기 비명과 감격의 탄식이 뒤덤벅 되며 소란스러워졌다. 종업원 하나가 농장장을 부르러 후다닥 뛰어나갔다. 밀감 사러 왔다고 인사를 건넨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도정 순시 차 제주도에 내려와 제주도의 현장을 순시하며 서귀포를 지나가다가 예고도 없이 밀감 농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밀감 농장에 있던 종업원들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탄식을 질렀던 것이다. 대통령과 종업원들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농장장도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대통령은 농장장에게 1년 수익이 얼마나 되는지, 밀감 농사에는 어떤 애로사항이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농장 바깥에 몰려든 관광객들이 박수를 치자 대통령은 관광객들에게도 다시 인사를 건넸다. "여러분도 서울에서 왔나요, 우리도 밀감을 사러 여기 들렀지요"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대통령 등 뒤에는 노랗게 물든 밀감밭이 펼쳐져 있었고, 밀감나무에는 아직 수확하지 못한 밀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중 제주도에 가장 큰 애정을 가진 대통령이었고, 박정희가 변혁시킨 대한민국의 지역 중에 박정희의 세례를 가장 크게 받았던 곳이 제주도였다. 현재 제주도를 먹여 살리는 것은 관광과 감귤이다. 이것은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제주도의 양식 중 양대 축이었다. 제주도 도정 순시 중에 박정희가 밀감 농장으로 무작정 들어섰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주도에서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밀감이 재배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진상을 위한 용도였기에 주민들이 맛을 볼 수 있는 과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밀감나무가 있는 가구는 가혹한 징수의 대상이 되었기에 당시에 밀감나무가 있다는 것은 주민들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는 불운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프랑스 출신의 타케 신부가 일본으로부터 온주 밀감을 처음 들여와 서귀포 지역에 심었다. 이때부터 서귀포 지역에는 감귤재배가 권장되기 시작하였으나 재배 기술은 원시적이었고, 호응하는 농가가 별로 없어서 밀감 재배의 확대는 극히 미미했고, 집안에 정원수로 몇 그루씩 심는 것으로 만족했다. 제주도에서 감귤이 주력 상품으로 도약하게 된 것은 5.16혁명 후인 1964년부터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관광과 감귤이라는 제주도의 미래를 네다보았다. 제주 연두순시에서 '제주 감귤 재배 적극 장려'라는 특별 지시를 내림으로서, 감귤은 제주의 '제1 효자산업'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잡게 된다, 1968년에는 제주도 제1 작물이던 고구마 재배 대신에 감귤로 교체하라는 지시가 내려지면서 감귤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1960년대는 대통령의 지시로 감귤 재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면 70년대는 감귤이 '대학나무'로 불리면서 제주도 가구의 주요 수입원으로 떠올랐던 시기였다. 70년대 초반에는 전국 촤하위로 가난했던 마을이 밀감 재배로서 전국 소득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감귤은 제주도를 대표하는 제1의 상징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박정희가 밀감 재배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박정희는 연두순시 연설이나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수시로 이것을 감귤 재배에 비유하곤 했다. "우리나라에 탱자라고 있지요? 어느 식물학자가 몇 년 전에 일본에서 밀감나무를 이식 해다가 자기 집에 심어 가지고 잘 가꾸어서 키워 놨는데 몇 년 지나고 난 뒤에 열매가 열렸다 이겁니다. 노란 게 열렸는데 따 보니까 이것은 밀감이 아니고 탱자가 열렸더라 이겁니다." "제주도 밀감나무를 서울의 영하 20도가 되는 데다 그냥 갖다 놓았다면 당장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박정희의 민주주의는 외국의 민주주의를 그대로 가져다가 한국에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실정에 맞게 고쳐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표현이었다. 후대의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들은 그것을 '박정희의 독재'라고 불렀지만, 그러나 박정희의 그 정치는 세계 최하위의 가난한 나라를 단번에 경제 부흥국으로 만들었고, 전국 최하위의 가난한 마을을 전국 1위의 부자마을로 만들었다. 이런 '독재'라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하지 않은가. 제주도를 겨울에 방문하면 산남에 있는 마을은 노랗게 물이 든다. 담장 너머로 뻗어 나온 가지에도 밀감은 포도처럼 매달려 제주도에는 도로조차도 노랗다. 밀감 향 가득한 마을은 쳐다보기만 해도 얼마나 풍요로운가. 이런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박정희는 밀감밭을 지나치지 못하고 무작정 밀감밭으로 들어섰던 것이었으니, 제주도의 노란 밀감밭에는 백성들의 삶을 생각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노심초사가 아직도 흐르고 있다. 비바람 2013. 0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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