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가는 하멜의 꿈
다시 산더미만한 파도가 배를 덮쳤다. 배 뒤쪽에서 우지끈하는 굉음이 울렸다. 선미(船尾)의 관망대가 부러져 나가는 소리였다. 파도는 쉬지 않고 달려들었고 비상 탈출용인 작은 배마저 파도에 휩쓸려 떨어져 나갔다. 배 안으로 물이 들어와 차오르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화물과 돛대를 배 밖으로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기도만이 유일한 생존수단이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저기 섬이 보인다!”
산방산 아래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제주의 절경으로 손 꼽는데 부족함이 없다. 가끔은 에메랄드빛으로, 가끔은 블루 사파이어 색깔로 빛나는 바다, 바다 위에는 형제섬이 떠 있고, 형제섬 근처에는 바쁠 것도 없는 고깃배가 한가하게 지나간다. 발 아래에는 바다를 향하여 꿈틀거리며 나아가는 용머리 바위, 이것만 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용머리 해안에는 이국적인 범선 하나가 해안 풍경에 일조를 하고 있다.
해안변 육지 위에 올라앉은 이 배는 네덜란드 상인이었던 하멜 일행이 제주에 표착할 때 타고 있었던 상선 '스페르웨르(Sperwer)호'를 복원해 놓은 것이다. 배는 3층 건물 높이 정도의 목선으로 갑판에는 커다란 돛대 3개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배 내부는 하멜 전시관으로 이용 중이었다.
헨드릭 하멜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1630년에 태어났다. 이 당시 네덜란드는 해외무역으로 부를 쌓으면서 해상패권을 자랑하던 시기였다. 하멜은 1650년 11월 동인도회사의 일원으로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장부 업무를 담당하다가 1653년 6월18일에 스페르웨르호에 승선하여 타이완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타이완에서 다시 일본의 나가사키를 향하여 출발한 것은 7월 30일이었다. 나가사키를 향하여 가던 배는 거센 풍랑에 휩쓸리며 8월 16일 새벽에 제주도 남서쪽 해안에 표착하였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배가 해안가에 세 번 정도 부딪히더니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하갑판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갑판 위로 올라올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난파당했다고 한다. 선원 64명 중 36명만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저녁 무렵 위도를 측정하여 그들이 표착한 곳이 ‘켈파르트(Quelpart) ’라고 밝혔다. 켈파르트는 1642년경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갤리선 ‘켈파르트’가 제주도를 처음 발견한 이후 제주도를 켈파트로 지칭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멜 일행이 죽은 동료들을 매장하고 쉬고 있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하멜 일행을 제주목사 이원진 앞으로 데려갔다. 목사는 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이원진 목사는 얼마 있지 못해 임기가 끝나 돌아가 버린다. 결국 하멜 일행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곤장을 맞게 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약 1년 후인 1654년 6월 26일에 하멜 일행은 한양에 도착했고, 일행 중 하멜을 포함한 8명이 조선을 탈출한 때는 1666년 9월 4일이었다. 나머지 잔류자들도 일본과의 협정으로 조선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까지 생존자는 16명이었다. 하멜은 1668년 7월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그가 고향을 떠난 지 18년만이었다.
하멜이 조선을 탈출하여 당도한 곳은 일본이었다. 그곳에서 하멜은 동인도회사에 그동안 밀렸던 월급을 청구하게 된다. 그런데 동인도회사에서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들어보지도 못했으니 월급을 지급할 수 없다”고 버티게 된다. 그런 회사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하멜은 그동안의 사정을 보고서로 작성하게 된다. 이게 바로 ‘하멜 표류기’였다.
하멜 표류기에는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제도, 등 조선에 대한 각종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선 사람들은 매우 도둑질을 잘하며 속이거나 거짓말을 잘한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신뢰할 수가 없다. 조선 사람들은 유약한 민족이며 강직함이나 용기가 전혀 없다.” 지금 우리 모습도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 대적하기보다는 퍼주기로 연명하고, 핵을 만들어주고도 그걸 평화라고 우기는 조센징들이 정치권에 수두룩하니 말이다.
하멜은 조선 땅에 13년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하멜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희망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가 잃어버렸던 스페르웨르호는 밤마다 하멜의 꿈자리에서 어른거렸을 것이 틀림없다. 조선을 탈출한 하멜은 하멜 보고서를 썼고, 은둔의 나라 조선과 그 나라에 딸렸던 조그만 섬 제주도의 실체를 서방세계에 소개했다.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관한 서양인 최초의 저술서였다.
하멜 표착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후보지로는 중문에서 고산까지 여러 군데가 거론되지만 실제로 하멜 표착지로 가능성이 높은 곳은 고산 수월봉 남쪽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용머리 해안에 표착 기념비가 설치된 것은 고증이 덜 된 시점에서 기념관을 개관한 탓이라고 한다.
용머리 해안가에 설치된 범선 모형의 하멜 전시관은 길이 36m, 폭 8m, 높이 11m로 5층 구조이며, 2층에는 하멜전시실이 꾸며져 있다. 하멜 전시관의 범선은 하멜의 영혼이 서려서일까, 당장이라도 바다로 달려들고 싶은 모습이다. 하멜 범선 옆의 벤치에는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저 사람은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하멜일까. 아니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하멜 일행 중의 그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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