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기독교관을 비판함(47)
도올은 수운이 쓴 용담유사龍潭諭詞를 해설한 <수운이 지은 하느님 노래 용담유사>라는 책을 냈다.(통나무출판사,2022) 그는 이 책의 시작부분에서부터 유물론적 인간론을 내세운다. 몸이 나의 존재의 전부이고 몸이 사라지면 몸의 구성양식이 해체되고 죽게 되면서 끝이고 결국 죽음은 무無이고 뒈지면 끝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몸이 끝나면 영혼불멸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개소리도 다 끝이 아니냐고 한다.(위의 책, p.12)
그러면서 영혼과 육체를 나누거나 하는 건 지난 1,2세기 동안 세계를 틀 지운 로고스 체계의 산물이며 이러한 지식의 체계는 세계 권력의 체계와 습합되었고 이러한 권력적 지식을 소유한 자들은 몸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눈다. 이들에게 몸의 소멸은 단지 육체의 소멸일 뿐이며 영혼의 소멸은 아니다. 이때 육체는 순수물질pure matter이 되며 영혼은 순수 정신pure spirit이 된다.(p.13) 몸의 소멸이 곧 존재의 종말이라는 엄연한 사실의 섭섭함을 견디기 어려워 죽어도 남는 게 있어야 사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고귀한 정신의 불멸the immortality of the Soul을 확보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p.14)
아울러 그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1556-1650)의 실체이원론을 비판하며 우주의 궁극적 실재로서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개의 실체를 설정한 데카르트 식 이원론을 터무니없는 철학이며 비상식적이라고 한다.(p.15) 이렇게 도올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적 대립을 혐오하면서 이 대립이 없는 수운의 언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과연 수운과 도올에게 이원론적 대립의 요소가 사라지고 없어지는가? 도올은 말한다.
“...나의 몸은 숨으로써 하늘天과 교섭하는 것이다. 나의 몸은 하늘을 숨 쉬고 땅을 먹는다.....나의 몸은 자기원인일 수 없다. 교감 없는 실체일 수가 없다.”
하여 하늘과 땅의 이분법을 쓰고 있다. 몸 자체가 하늘과 교감 없인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한다.(p.19) 이원적 대립이 없는 상태면 왜 하늘과 땅이 구분돼야 하나? 하나로 링크됐어야 맞는 거 아닌가.
그렇게 이분법적 대립을 증오하면서 왜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가? 하늘도 땅도 하나로 돼야 이분법이 없어지는 거 아닌가? 이렇게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는 것에 대한 도올의 래디칼radical한 반응은 불필요한 고집이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통찰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불변의 통찰이다. 인간은 육체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영혼 없는 인간이란 그야말로 허당이고 설명 자체가 안 된다.
죽고 사라저가는 육체를 전부인양 하는 건 영혼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논리다. 죽는 게 두려워서 뭘 남겨야겠다고 영혼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영혼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는 가장 저급하고 몹쓸 관점이다. 정신이 물질에서 나온다는 그 소박한 견해야말로 인간을 물질덩어리로 전락시키는 단순성이다.
도올은 “나의 몸이 나의 존재의 전부”라고 한다. 몸이 전부다? 이것이 주역을 수 백독 했다는 도올의 인간관인가? 주역에 그렇게 쓰여 있었나? 몸이 인간의 전부고 뒈지면 그만이라고? 아무리 일원적 해석이니 무슨 이분법 극복이니 해봐야 독백은 될까 사실에 충실한 논리가 아니다. 도올의 이분법 비판은 기독교의 교리 해체가 그 심리적 배경임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도올은 기독교회가 증언하는 하나님 창조 구원 천당 지옥 심판 이런 도식이 너무 싫은 것이다.
이런 증언들을 모두 폐기하고픈 충동이 이원론 비난이고 기철학이고 도마복음인 것이다. 하지만 이모든 게 사실인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인간은 영혼과 육체도 됐고 유한자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죽음을 향해 괴로운 행진 중인 자인 것을! 도올에게는 기독교 신학이야말로 이분법의 대표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도 나의 몸의 일부 현상으로 설명되어야 하는데 그런 사고의 전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세계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반란인 것이다. 이러한 반란을 심오하게 성취한 사람들이 바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사유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라고 해 동학을 이원론 극복의 원조라는 듯 강조한다.(p.19,20)
이상하다. 동학교주 수운은 상제上帝라는 신을 만나 그렇게 대화도 하고 부적도 삶아 먹곤 했는데 왜 수운이 이원론을 극복했다고 하는가? 이원론이 없어지려면 초월적 대상이 없고 유아독존 해야 하는데 왜 상제란 신을 섬긴 수운이 이원론 극복의 대표란 말인가?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도 나의 몸의 일부현상”이라니 이는 또 무슨 궤변인가? 우리 모두와 도올선생의 몸은 피조물이고 죽음의 지배하에 있는 유한자들이다. 어떻게 사람의 몸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만유의 창조자이시고 구속주 심판주 되신다. 유일무이하게 홀로 영광 받으실 성삼위 하나님이신데 사람 몸의 일부가 되신다니 이는 망상에 준하는 표현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분이 분명하다. 이를 섞는 게 우상이고 인본주의 자연주의 범신론이다. 여호와의 거룩하신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아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3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지신 속성의 일부를 인간에게 주셔서 공유적 측면이 일부 있으니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끝까지 피조물이고 지음 받은 존재다. 인간을 우상화 하거나 신격화시키는 일, 또는 하나님과 피조 된 세계를 섞으려는 시도는 모두 성경의 계시적 진리에서 떠난 영혼들의 성경도그마 파괴행위다.
인간은 아무리 용을 써도 피조물이다. 시간과 공간에 묶여 살다가 죽고 심판 받아야하는 죄인들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되 존재를 하나님과 섞을 수 없다는 게 성경의 도그마이다. 도올선생의 몸이 하나님의 백분의 일이라도 섞인 게 있다면 선생은 불사불멸不死不滅의 존재여야 하고 시공을 초월한 자유인이어야 한다. 하지만 도올님을 비롯한 우리 모두의 삶은 죽음을 향한 행진이요 그 몸들은 이 순간도 썩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유한자들이다.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을 섞으려는 모든 시도는 허무한 결과를 맞게 될 뿐이다.
도올의 이런 억측은 수운의 동학을 더욱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도올은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설명하면서 이는 왕권을 넘어 신권神權에 도전한 것이며 니체는 신을 살해하려 했지만 수운은 신의 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신과 인간에게 동일한 생명력을 부여했다고 한다.(p.25) 하지만 수운이 신의 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상제란 신과 만나 부적을 먹고 투쟁가로 산 것이 신神의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이런 비약은 삼가야 한다. 수운이 그냥 혁명을 추구했던 인간이었을 뿐인데 무슨 신의 모습이란 말인가?
인내천 사상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하늘같이 섬긴다는 덕담형식으로 이해하면 모를까 인간 즉 신이라고 하면 혼란을 야기하는 거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전혀 다른 영적 차원이다. 여호와 하나님 삼위일체 신께서 만유를 창조하신 참 신이시고 그 외는 모두 피조물로서 죄와 유한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자들이다. 아무리 특출한 자도 모두 유한생명체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다. 수운이 신의 본 모습이라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거나 영생 했어야지 어떻게 죽음 앞에 무력했던 인간이 신의 본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참신이시고 참인간 되시는 증거는 성경에 넘쳐나고 있고 그 중에도 친히 부활하심으로 죽음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참 신이신 것이다. 인간은 죽었다 깨나도 인간일 뿐이고 신이 아니다. 섞는 건 모두 혼란을 야기하고 사람을 미혹하는 스토리가 된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걸어보지 못한 환자를 기도로 고치자 사람들이 바나바 보고 제우스신이라고 하는가하면 바울보고는 헤르메스신이라고 격찬하며 제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와 제사를 드리려 한다. 이때 이단교주들 같으면 좋아라고 신적 행세를 했을 텐 데 바울과 바나바는,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지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고 사람들을 말려 제사를 금지 시켰다.(행14:8-18) 이런 사도들의 매너가 바로 정답이다. 인간을 신으로 둔갑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우상숭배요 하나님의 분노를 초래할 행위들이다. 영광 받으실 성삼위 여호와 참신께서만 홀로 영화로우셔야한다.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구원 받아야할 존재자들이다.
사람들이 헤롯을 신이라고 떠받들자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신적행세를 하다가 주의 천사가 와서 치자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행12:20-23) 어떤 위인도 신적 행세를 하면 결과가 안 좋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는 죄가 된다. 하나님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심판 날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유6) 이렇게 하나님은 교만하여 신을 빙자하는 자를 심판하신다. 도올은 과연 수운이 자신을 신이라고 여기고 주장하며 경배하라고 했는지 유심히 살펴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도올의 말들에는 종잡기 어려운 복잡계가 있다. 여기서 한 말이 저기서는 다르게 튀어나온다. 수운은 신을 객화客化시키지 않았다고 해 놓고 항상 객체로서의 하느님을 만난다고도 한다. 또 몸이 신이라고 하면서 객체로서의 상제와 대화했다고도 한다.
“ 수운은 항상 하느님을 만난다. 그의 하느님은 인격체로서 수운에게 말을 건다. 수운은 그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은 그에게 명령을 하달하기도 한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라 리얼한 그의 몸의 생성체계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현상이다.”라고 한다.(p.29)
객체로서의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신과 논쟁하고 명령을 하달 받았다고 하니 말의 일관성이 없어진다. 게다가 이런 신과의 대화나 논쟁이 그의 몸의 생성체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니 오락가락 혼돈이다. 몸이 신이고 객체로서의 신은 없다는 투로 말하면서 신적 존재와 대화하고 논쟁도 하며 명령도 하달 받았다니 혼란스럽게 믹싱mixing된 의식인 모양이다. 신관神觀, 인간관人間觀에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수운의 정신이 이런 콘텐츠인지 도올의 해석과 주관이 이렇게 파악한 건지 모호하기만 하다. 이런 주장들은 성삼위일체 여호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해치려는 교란행위다.
도올은 말한다. “수운은 태극을 무화無化시킨다. 하느님을 무화시킨다. 하느님은 초월을 담지하면서도 철저히 이 세계와 함께 생성한다. 동학은 신화를 초극한 상식이다.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문명을 이 지구상의 모든 누메나noumena(본체)적 사유와 구분 짓는 특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운은 박소朴素한 태초太初이다.” 하였다.(p.30) 여기서 수운이 태극을 무화시켰다는 것은 최수운이 태극太極, 즉 온 세상의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을 없애버렸다는 뜻이고 하느님을 무화시켰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수운이 박소한 태초라고 한다. 박소朴素는 소박素朴이고 소박은 ‘소박하다’의 어근인데 ‘소박하다’는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동아 새 국어사전) 그러면 최수운이 태극이고 만유를 시작한 신이란 뜻 아닌가? 과연 수운이 태극을 없애고 그 자리에 올라간 신이고 만물을 창시했단 말인가? 이야말로 허황한 발설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수운을 높인다 한들 이런 발언은 이성적이지 않다.
도올은 창조주 성삼위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더니 수운을 그 자리에 놓으려 하는가 하면 물활론hylozoism적 흔적을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이 물활론物活論은 물체 자체에 생명이나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설이다. 고대 초기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Thales나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등이 생각했던 학설로 근원적 물질의 자기운동을 한다고 여기는 고대의 원시적 세계관이다. 도올도 이 고대인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물활론 적 면모를 과시 한다. 그는 북한산의 인수봉에 정신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수봉이 의식은 없더라도 정신이 없다고는 못할 것이라면서 인수봉에 혼이 있다고 하는가하면 이런 물활론을 저차원의 비과학적 사유체계가 아니라고 변호 한다.(p.32)
그는 호모 모미엔스(Homo Momiens)가 기본적인 인식체계를 제공하는 고등한 철학으로 재인식되어야 한다며 인수봉도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주변과 끊임없이 교섭하면서 생성을 계속하는 다이내믹한 생명체라고 주장한다(p.33)
여기서 도올이 말하는 모미엔스란 도올의 창작어인데 그가 1987년 1월 싱가포르 국제회의서 사용한 용어이고 몸이라는 우리말을 학술용어로 승화시킨 용어로 알려지는데 그 뜻은 ‘몸뚱아리 인간’을 말한다고 한다.(<아름다움과 추함> 김용옥,57-63쪽) 그는 “호모 싸피엔스에서 모미엔스로! 사피엔스여 사라져라! 모미엔스여 일어나라! 이것이야말로 나의 기철학의 귀결점이다.” 라고 외친다(위의 책, 같은 페이지)
이렇게 수운의 신격화나 몸을 우상시 하는 기철학과 물활론적 사변 같은 것들에 급급 하는 현상은 세계 존재의 궁극적 원인자이신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된 영혼의 방황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누가 도올의 이런 주장을 신봉하고 물활론자가돼 인수봉에 가서 절하고 그 산과 정신감응을 하다가 탈 이성 현상이 발생하면 누가 치유할 것인가? 예부터 도를 닦는다며 우주의 기를 받았다느니 만유와 하나가 돼 만사에 통달했다느니 또는 자연만물과 대화하고 소통한다는 등 하다가 정신착란 된 경우들 종종 있었다. 인수봉은 그냥 바위산일 뿐이다.
물활론 자체가 고대인들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존재세계를 설명해보려고 시도했던 추론에 불과한 것인데 왜 21세기 광명 천지에 그것을 집착하는가?
몸을 신성시 하는 것도 착각에 불과한 접근이다. 몸은 그냥 영혼을 담은 그릇으로서의 신체적 작동일 뿐 그게 존재세계의 근원일 수는 없다. 창조주 하나님과 척지고 나면 이렇게 수운선생을 신격화 하려하거나 몸을 궁극적 가치로 여김 또는 물활론이나 범신론 같은 것으로 견뎌보려 한다. 하지만 물질이나 형상화된 모든 것들은 신이 아닌 피조물이다. 피조물에서 영원성 궁극성 또는 신적 요소를 찾으려하면 헛되고 헛된 결과를 맞는다.(전1:2) 성경으로 계시하시고 그리스도로 화육하셨으며 성령으로 감동감화하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창조주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크신 하나님과 무엇을 섞거나 견주려 하는 건 무모한 어리석음이다.
도올이 그의 유튜브에서 동경대전 122강의 한 것을 들어보면 오리진origin이 있다는 사고는 유치한 사고이며 기독교가 가르친 최악의 병폐이고 이 오리진 때문에 엄청난 비극이 벌어진다고 했다. 이 오리진orgin은 ‘근원’ ‘기원’을 말하는데 도올의 이런 오리진에 대한 부정과 증오는 창조주 하나님의 만유창조를 부정하고 비난하려는 의도다. 범신론 유물론 물활론 인본주의 기철학 동학 최수운 등을 뒤섞은 사변으로 창조주 참신의 창조와 계시, 구원역사를 무력화시키려는 저의다. 이 세계의 시작이 없고 시작하신 주체가 없다면 어떻게 이 존재세계가 발생할 수 있단 말인가? 진화론 빅뱅이론 무슨 양자역학 우주 물리학이나 천문학이 해결 해 주던가? 어림없다. 인간과 세계는 존재의 시원始原을 발생시킨 주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지음 받고 나온 객체요 지으신 주체에게 전적으로 의존된 존재자들이다. 인간이 우주의 해와 달과 별들과 지구의 자연적 조건들은 만들고 나왔나?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자연계에 내던져진 피조체다. 인류가 과학이나 문명을 건설해 나가도 모두 창조된 세계와 그 질서들 그리고 그 원료들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이 엄연한 실상을 부인하고 세계와 인간을 존재의 시원이거나 근원으로 삼으려는 어리석음은 지양해야 한다. 무신론과 범신론 유물론 물활론 따위로 세계를 이해하려 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는 것과 같은 미련이다. 오리진을 행하신 절대적 존재인 창조주 하나님 성삼위 여호와신의 계시와 구원 역사에 참여한 은혜가 없이는 존재세계를 해명할 수도 없고 답을 구할 수도 없다.
도올의 이런 주장들은 하나님을 떠난 영혼의 불안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다. 도올이 말하듯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엄청난 일 생기는 게 아니고 불신앙과 무신론 등의 무모함이 더욱 사고뭉치요 병폐인 것이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종교적이고 영혼의 본향이신 하나님을 그리워한다.(시 42:1,2) 그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영혼들이 하나님 대용으로 만들어 낸 것들이 세상 종교들이고 유물론이요 범신론이며 기철학이고 물활론들인 것이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을 대체해보려 하지만 안 되는 것이 인간실존이다.
우리 인간은 영혼의 본향이신 참 하나님을 만나기까지는 평안이 없다. 도올이 제시하는 그런 사변들은 모두 우리를 허무하게 하고 끝없이 방황케 하다가 결국 좌절시키고 만다. 거기엔 구원이 없고 죄 사함과 하나님을 아는 계시적 지식이 없으며 영생 천국 소망이 없다.
도올의 성경비난은 계속 반복 된다. 그는 다시 로기온Logion(복음서의 주의 말씀들)을 비난한다. 이 로기온 자체도 이미 상당 부분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오염됐다고 한다.( 도올의 <용담유사> p.48,49) 이 말은 수운의 용담유사가 수운 자신의 기록인 데 비해 복음서의 주 예수께서는 직접 저작을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이 주의 말씀조차 왜곡해 선포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도올의 억측이다. 도올이 초대교회를 가 봤나? 사도시대를 살았었나? 뭘 보고 왜곡했느니 오염됐느니 그러고 있나?
이 세상의 문서들은 오염이나 오작 가필 수정이 있고 왜곡도 허다하지만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성경은 일점일획 모두가 영감으로 기록된 무오 한 말씀이다. 이 세상에 성경만큼 정확한 지식이요 불멸의 형이상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 자체를 원천적으로 의심하고 왜곡 선동하는 내용은 도올의 의식 속에서 조작된 작품일 뿐이다. 도올의 말대로 성경이 그렇게 인간적 의도로 기록 구성 됐다면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고 세계최고의 베스트셀러이며 수천 년 역사를 이어올 수 없다. 앞서 말해온대로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됐기 때문에 부끄럽고 안타까운 내용들까지 수록돼 있다.
인간적 의도가 있었다면 이런 내용들은 모두 빼고 기록했을 것이다. 성경은 인간과 우주만상의 출현과 과정, 미래 종말까지 계시된 신비서이다. 도올이 아무리 성경을 이겨보려고 해도 안 된다. 감히 성경을 어떻게 해보려는 욕심은 필망의 코스다. 일찍 성경에 굴복하고 회개하는 게 살길이다. 성경 비난을 더해갈수록 결국 자신의 영혼 속 고통만 더해갈 것이다.
수운이 친필로 기록했다고 해서 용담유사가 성경을 이겨내거나 대신할 거라 생각하면 착각이다. 용담유사는 그냥 수운의 상제上帝란 영의 영향권 아래서 기록된 문서일 뿐이다 이런 서책들은 세상에 쌓이고 쌓였다.
도올이 수운의 용담유사나 동학교의가 세상을 건질 것처럼 과대 선전 하는 건 희망은 될지언정 현실성이 없다. 도올은 착각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사도들이 무슨 이유로 로기온을 오염시키거나 일부러 기적설화를 만든단 말인가 만일 그게 만든 스토리라면 그런 만들어진 내용을 위해 목숨 바쳐 순교까지 한단 말인가? 잘 아는 대로 당시 바울은 최고의 석학이었지 않은가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기기까지 했던 교회 박해의 장본인이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분이 꾸며내고 과장하며 오염된 콘텐츠를 위해 목숨 바쳐 일생을 헌신 했겠냐 말이다. 도올의 성경 비난은 하나같이 근거 없는 허설이다. 그의 교회에 대한 앙심이 낳은 결과물들이요 픽션수준의 잡담들이다.
도올이 수운에 대한 과대 포장은 도를 넘는다. 기독교의 하느님이 동학의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거라면서 기독교는 물론이고 이 지구상의 모든 교인들이 수운이 말하는 하느님 신앙으로 다시 태어날 때 일류의 빛이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용담유사>, p.57) 이 또한 도올의 허황된 희망이다. 우선 기독교회는 하느님이란 말을 안 쓴다. 성경에서 떠난 천주교가 혹 그 용어를 쓰겠지만 이는 성경적 신명이 아니다. ‘하나님’이 유일신 성삼위일체 여호와의 신명이다. ‘하느님’이란 공간으로써의 하늘을 숭배하는 함의가 있는, 어디에나 편만한 하늘숭배 관념이다. 성경적 신명일 수 없는 막연한 구호이다. 홀로 영광 받으실 창조주 참신은 ‘하나님’으로 경배되어야 한다. 도올이 수운의 ‘하느님’ 표현을 무슨 궁극성이 있는 것이거나 오리진origin인 것처럼 말하는 건 아무 설득력 없고 그저 수운을 우상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는 주장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수운은 신일 수 없는 피조물이고 유한자며 혁명을 위해 애쓴 투사일 뿐이다.
그에게 어떤 종교적 이미지가 있다 해도 어디까지나 투쟁을 위한 형이상학이요 서학과 싸우기 위한 민속적 신관의 접목이라고 봐야할 것이지 그이상의 과도한 평가는 삼가야 한다. 한국 하비에르 국제학교의 교감인 문명숙 수녀는 Donghak and the god of Choe, Je-u:Through the Donggyeong Daejeon and the Yongdam Yusa라는 아티클에서 서학과 동학은 서로 대치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리스도교와의 접점이 있고 생태계의 문제와 창조보전을 위한 노력에서 공통의 중요성을 지닌다고 했는데 창조보전과 생태계 문제를 논하는 데는 접점이 있고 공통된 과제를 논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리스도교와의 접점이 있다고 본 것은 말이 안 된다.
문수녀가 천주교도여서 서학인 가톨릭과의 접점을 논함은 마음대로겠지만 성경교회인 정통적 복음주의 기독교와는 아무 접점도 있을 수 없다. 상제라는 민속적 영과 접신해 신비체험 했던 수운의 동학교와 삼위일체 참 하나님의 교회신앙과 무슨 접점이 있단 말인가?
일점일획도 근사치가 없다. 도올이 기독교가 동학에서 파생됐다느니 하는 소리야말로 무슨 소리인지 모를 횡설수설이다. 신구약 6천년 역사를 가진 기독교가 어떻게 고작 조선말기의 동학에서 파생된단 말인가? 도올은 자신의 지성을 의심 받을 말을 마구 토해 내고 있다.
수운은 죽음을 이기지 못하지만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간 계시다가 승천하신 삼위일체 참 신이심을 명심해야 한다. 거듭 말했듯이 수운은 상제란 이름의 민속적이고 불완전 한 영과 접신했던 체험가였을 뿐이다. 도올의 <용담유사> 74쪽에서도 다시 그 상제란 영의 불완전함을 반복 내 보이고 있다. 반복하지만 그 영은 수운을 만나기까지 오만 년 동안 허송세월 했고 개벽이후 인간세상의 역사를 위해 여러 가지 노력했으나 아무 공功을 세우지 못했으며 그것이 나의 비극이었다고 실토하는 영이다. 아니! 어떤 신이 이렇게 허접할 수 있단 말인가. 오만 년 간 허송세월하고 여러 가지 노력했으나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하는 신이 참신일 수 있으며 세계의 오리진origin일 수 있겠는가? 헛된 노고가 아닐 수 없다.
도올은 수운의 신관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노이무공勞而無功이라고 한다. 도올의 설명을 따르면 하느님은 우주생성 밖에서 그 과정을 주관하거나 컨트롤하는 아웃사이더가 아니고 천지의 생성과 더불어 노력하며 공을 이루는 과정process적 인사이더다. 천지의 개벽 후 천지와 더불어 같이 노력 했으나 공이 없었다는 신이다. 이렇게 수운의 신은 전지전능하신 존재가 아니고 생성과 더불어 실패하고 좌절하는 신이며 수운을 만나 처음으로 성공했다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이다. 그럼에도 도올은 이런 체험을 한 수운의 깨달음이야말로 매우 유니크한 것이고 조선민족의 위상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나타내주는 명언이라고 한다.(<용담유사>,p.76,77) 하지만 이 노이무공이란 빈곤한 사유의 산물에 불과하다. 노력했으니 공을 세울 수 없는 신이 무슨 신이란 말인가 실패도 하고 좌절하는 존재가 어떻게 신일 수 있나?
이런 담론은 서양의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과 변증법dialectic을 뒤섞은 듯한, 혼란스런 토크다. 도올이 이런 멘트를 오리진으로 여기려 하거나 이것으로 성경을 비난하는 도구로 삼으려 한다면 오산이다. 상제란 신은 성경이 말씀하는 타락한 천사의 일종이며 민속적으로 활동하는 영일뿐이다. 이런 영이 어떻게 조선민족의 위상의 고귀함을 나타내 주는 존재란 말인가?
도올은 수운이 상제란 신과 계속 교접한 것을 말하면서도 하느님은 개체적 존재자일 수 없다며 “네 몸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데 그토록 가까운 하느님을 버리고 먼 곳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한단 말인가”고 한다.(<용담유사>,p.176) 여기서 상제와 말하는 것은 상제라는 대상과 일대일 대화하는 건데 ‘하느님이 개체individual being적 존재일 수 없다‘는 건 오락가락 설법이다. 하느님이 개체적 존재일 수 없다면서 어디 가서 하느님을 찾으려 하느냐고 한다. 인격신을 부정한다면서 상제란 인격과 대화하고 사람 몸이 모든 것의 집약인 것처럼 하면서 초월을 말하고 범신론인 듯 한가하면 유물론이고 유물론인가하면 몸이니 기氣니 하는 관념적 유희의 집합 또는 혼란스런 카오스다.
이 점을 도올도 의식했는지 도올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운은 서학을 강력하게 배척하면서도 그 장점을 취하고 ..... 초월적 신관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비하하면서도 그 인격성을 취한다. 초월과 내재, 인격과 비인격 불연과 기연이 하나로 혼융된다는 데 수운적 사유의 특질이 있다“고한다.(p.242)
아마 도올 자신도 이런 복잡성과 모순을 인지해서 변명하는 것일 테지만 궁색하고 타당치 않은 논변이다. 어떻게 초월적 신관을 강력 배척하면서 그 신의 인격성을 취한단 말인가 초월적 신격이 존재해야 내재가 있든지 할 것 아닌가? 초월적 신 존재를 강력 배척하면서 신이 뭐 내재를 한다? 배척당하고 없는 신이 무슨 내재를 한단 말인가? 결국 수운의 의식이 매우 혼란스럽고 상제신과 교접하면서도 이런저런 관념의 무질서한 교란으로 질서가 안 되는 말을 하는 것이고 도올이 이를 선전하려니 무리한 설들을 제조하고 있는 형편이다. 도올은 이런 무모하고 혼란스러우며 설득력 없는 이론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 초월을 거부하면서 초월을 체험하고 객체로서의 신 존재를 거부한다면서 상제란 영과 계속 토크하고 ... 이러니 어떻게 도올의 논리에 신뢰가 가겠는가?
도올은 모든 종교운동은 알고 보면 예외 없이 미신의 변양變樣이라고 하면서 수운이 목도한 서학도 미신에 불과했다고 했다(p.290) 여기서 서학이란 (비록 당시는 천주교였지만) 기독교를 말한다. 수운이나 도올이나 이 부분에서는 오해를 하고 있다. 땅에서 나온 세상의 종교들에 대해서는 그런 말 할 수 있다. 세상의 종교들은 미신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유한자로서 초월의 세계를 찾다보니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또 종교행위에 사탄이 침노해 미신적이고 허망한 것을 주입했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 66권 계시인 기독교회의 도그마는 사람에게서 발현된 게 아니고 창조주이신 성삼위 여호와 참신께서 계시하신 역사이기 때문에 세상의 종교들과 같이 여겨선 안 된다.
기독교의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토대하고 있다. 성자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오셔서 구원과 계시를 이루셨고 성령하나님이 성도의 영혼을 성전삼고 내주하신다. 66권 정경은 창조주 성삼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계시하신 기록이기 때문에 인간적 욕망이나 의도가 개입할 수 없는 절대계시요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는 도그마다.
앞서 말했듯이 세상종교는 가인의 종교다. 땅의 소산으로 드려지는 제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창4:1-5) 땅은 죄와 유한성으로 오염돼 있다. 참 종교 참 진리 참 된 구원의 역사는 하늘에서 와야 한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참 종교의 표상이다. 오실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을 예표 했다. 도올이 세상의 종교들에 비난 퍼부은 것은 일리가 없는 게 아니지만 유일한 참된 종교요 아벨의 제사이며 창조주 성삼위 하나님의 자기 계시요 복음인 기독교회를 미신으로 말하는 것은 영적 오류나 무지의 소치다. 오히려 도올이 자랑하는 수운교야말로 미신의 변양變樣 아닐지 골똘히 성찰해 마땅할 것이다.
도올은 또 이상한 주장을 펴고 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면서 그 “하느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도는 하느님을 무화無化시키는 것이다. 존재자로서의 하느님의 실체가 시공의 변화 속으로 사라질 때만 하느님 사랑은 달성될 수 있다”고 한다. (p.322)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하느님을 없애버려야(無化) 하느님 사랑을 달성할 수 있다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토크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면서 하느님을 무화無化(없애버림) 시켜야 한다니 무슨 소리인가? 이건 선문답은 될지 모르나 이성적 담론은 아니다 어떻게 사랑하면서 없애버림을 동시에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동학교도들이 왜놈과 싸우면서 무아의 해탈을 성취했고 하느님이란 존재, 그 실체를 무아의 평화 속에 묻어버렸다고도 한다.(위, 같은 페이지) 이 또한 무슨 소설인지 오리무중이다. 동학교도들이 전투 중 도를 닦으면서 무아와 해탈을 했고 그러는 중 하느님을 평화 속으로 묻어버렸다는 말 같은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이다. 하느님을 평화 속으로 묻어버린다? 도올과 수운의 신은 그렇게 마구 죽이고 평화 속으로 묻어버리곤 할 수 있는 신인가? 이런 질서지울 수 없는 토크는 삼가야 한다. 글을 책으로 박아내고 그러려면 객관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문장이어야 할 것 아닌가? 무슨 판타지 픽션을 쓰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도올은 더 참람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수운은 다시 말합니다. 겸손해야 할 주체는 우리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야훼는 민족신이고 전쟁신이며 질투하는 하느님이고 호오가 확실한 하느님이며 인간집단을 도륙하는데 하등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하느님이다....민족에 대한 호오가 있는 하느님은 특정한 문명권 밖으로 수출되어서는 아니 되는 하느님이다” 하였다.(p.324)
그는 연이어 “예수는 이러한 하느님을 거부했습니다. 야훼는 하느님의 자격이 없는 우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뒤 엎었습니다. 즉 다윗의 보디가드 노릇하는 야훼를 축출해버린 것입니다. 예수는 다윗 왕권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예수를 다윗의 후계자로 만들고 그를 메시야로 조작했습니다. 수운은 이런 조작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서양의 사람들은 천주의 뜻을 빙자하여 좋은 일을 베푸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천하를 공취攻取하려 합니다.” 하였다.(p.324,325) 하느님이 겸손해야 된다는 말 처음 듣는다. 수운이나 도올이 관계하는 신은 좀 유별난 모양이다. 그런 신관을 선전하는 건 참 희귀한 현상이다. 신이 인간앞에 겸손해야 한다니 그게 무슨 신이란 말인가.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을 전쟁의 신이니 민족의 신이니 뭐 도륙을 했다느니 하는 것도 앞서 누누이 말했듯 도올의 왜곡이고 착오이다. 자유주의 신학도나 인본주의자들이 늘 뇌까리는 소리가 민족신 타령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심은 메시야를 보내사 인간을 구원 하시고 자신을 계시하기 위함이셨다. 성경에 전쟁이 있는 것도 모두 계시와 구원 역사를 위하심이고 죄와 사탄숭배에 대한 심판역사이셨다. 참되시고 홀로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민족신이나 전쟁신 정도로 취급하려는 습벽이야말로 영적 우매상태에서 나온 무모함이다.
또 주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했다느니 하는 것도 무법한 영혼의 잡담일 뿐이다. 구약과 신약을 단절시키고 주예수와 바울을 이간시키며 성경계시의 온전성을 해치려는 궁색한 몸부림은 자유인본주의자들의 단골 메뉴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었으나 이리와 다름이 없는 성경신앙 파괴범들이다. 주 예수께서 성전을 숙청하신 것은 부패한 종교사업체제를 심판하신 일이지 도올이 말하듯 구약계시를 단절시키거나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성전 된 자신이 메시야임을 선포하시면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성령을 모신 성전 될 것을 함께 함의含意하신 역사이셨다. 다윗왕의 보디가드 노릇 하는 야훼를 축출했다느니 하는 표현은 지극히 불손하고 경망된 언사다. 도올이 이런 무모한 표현 남발은 자신의 영혼에 나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예수는 다윗 왕권을 거부했는데 초대교회가 예수를 다윗의 후계자로 만들고 그를 메시야로 조작했다는 설도 난삽한 낭설이다.
구약 39권은 직간접으로 오실 메시야를 예언했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구약 39권의 성취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다윗 계통으로 오신 것 모두 예언의 성취다. (막10:46-52,마1:17) 초대교회가 구주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만들고 그를 메시야로 조작했다고 떠벌리는 도올의 말을 믿을 사람은 자유인본주의 물 먹고 혼미해진 신학도 부류들 정도일 것이다. 신실한 성도는 이게 어둠의 세계에서 들리는 소음인 것을 안다. 도올선생은 더 늦기 전에 그간 성경과 교회신앙을 해친 일들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평생 새벽기도 하셨던 어머니의 신앙을 회복하기 바랄 뿐이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
안티다원
《 안티다원 강동선 목사((철학박사, Ph.D)는 그간 써온 < 도올의 기독교관을 비판함>을 책으로 출판하게 됩니다 금년 중 출간 계획입니다. 도올이 교회신앙을 맹 비난하고 그 파장이 큰데 이를 반론해 낼 서적 한권이 없다는 것은 교계의 수치입니다. 이책은 서울대 트루스포럼에서 출판을 맡게 되며 전국교회에 널리 보급할 계획입니다. 혹시 출판비를 후원해주실 분은 110 533 954773 신한은행 강동선으로 후원 해주시면 출판에 큰 힘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수호를 위해 그리스도인 누구나가 해야할 일이라 생각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동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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