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주의(主知主義, imagism, modernism) : 1912년 경 엘리엇, 흄, 파운드 등을 중심으로 한 영미 시인들에 의한 시 운동. 그들은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 즉 형상이라 생각하여서 시의 음악성 및 운율보다는 시각적〔회화적〕 요소가 강조되었다. 한국에서는 1934년 최재서에 의해 소개된 후 김광균, 정지용, 장만영, 장서언 등의 시인에 의해 이 경향의 작품들이 쓰여졌다.
t.s. 엘리엇 (thomas stearns eliot 1888 - 1965) 엘리엇은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st. louis)의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의 유력한 실업가였다. 할아버지 윌리엄 그린리프 엘리엇(william greenleaf eliot)은 세인트 루이스의 제 1유니테어리언 교회의 목사로서 참된 신앙과 엄격하고 근엄한 봉사생활을 통하여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워싱턴 대학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그의 모친은 시극을 발표하고, 조부의 전기를 쓰고 하여 엘리엇에게 문학적 동기와 환경을 직접적으로 조성해주었다. 엘리엇은 1906년에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여 석사과정까지 마쳤으며 러셀(russell), 산타야나(santayana) 등에 사사하여 철학연구에 흥미를 가졌고,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을 연구하고 교지에도 시를 발표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에 최초의 시집이 나왔고, 1920년에 최초의 평론집 『성림』(the sacred wood)이 나왔다. 1922년에는 『황무지』(the waste land)가 발표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문학에 있어서 세계적인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학, 사회, 교육, 종교 등 문화 전반에 관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며, 계간지 『기준』(the criterion)을 편집하여 문학계 이외의 분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네 사중주』(four quartets)를 발표하고 또 계속 시극을 발표하였다. 그는 1948년에 명예훈장(order of merit)을 영국국왕에게서 수여받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68세 때에 30세인 미모의 여비서와 재혼하였다. 오랫동안 애정이 고갈된 상태에서 삶과 사랑과 현실 일체를 부정하던 그의 사상이 재혼 후에는 사랑을 구가하고 삶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변모하였다.
t.s.엘리엇 작품세계
엘리엇은 현대영시에서 새로운 사고와 감수성으로 새 시대를 연 시인, 비평가이다. 현대영시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가 1910년대 중엽에 영시단에 시를 처음 발표했을 때 그것을 절대로 이해하고 평가한 사람은 소수의 문인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그의 시가 일견 종래의 영시와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엇의 시는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것과는 다른 종류의 시이다. 그의 초기 시에서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숨긴다. 즉, 그의 시는 19세기적인, 개인적인 서정시가 아니다. 예이츠에게 있어서 시의 이상은 자기 자신, 즉 “전체로서의 인격"을 시에 불어넣는 일이었지만, 엘리엇에게는 “시란 인격의 표현이 아니라 인격으로부터의 도피"였다. 그러므로 엘리엇의 시를 읽을 때에는 종래의 개인적인 서정시를 읽을 때에 가지는 마음의 준비를 버려야 한다. 그의 시는 극을 보거나 고도의 기법을 사용한 영화를 볼 때에 가져야 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대해야 한다.
엘리엇의 초기 시는 이미지가 기발할 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이미지, 단락과 단락 사이의 전이가 비약적일 때가 많다. 그것들은 때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함께 모여 어떤 시적인 의미를 표출한다. 그가 하버드 대학에서 시작(詩作)을 할 무렵 그에게 큰 영향을 주고 그의 흥미를 끈 것은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들과 프랑스의 19세기 상징주의 시인들이다. 이 두 가지 전통이 엘리엇에게서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어떤 분위기가 시의 의미를 결정지으면서도 시에 동원된 이미지는 하나하나 살아서 우리의 지성에 호소하고 그 구성과 이미지가 매우 복잡 미묘하여 우리는 지성의 눈을 항상 뜨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의 시작 태도는 그의 초기 시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fred prufrock),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아폴리낙스 씨"(mr. apollinax), “하마"(the hippopotamus) 등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바로 이것이 20세기 초기 조지왕조시대의 무기력한 서정시와 확연히 구분되는 현대시의 전통의 한 요소가 되었다.
엘리엇에게 있어서 시란 정서를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형이상학파 시인들에 대하여 말한 것처럼 “정신과 감정의 상태에 대한 언어의 등가물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가 “햄릿론"에서 사용한 유명한 용어 “객관적 상관물"은 이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한 말이다. “햄릿론"에서 그는 객관적 상관물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서를 예술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유일한 방도는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하는 것, 바꾸어 말하면 그 특정한 정서의 형식이 되는 한 묶음의 사물, 하나의 정황, 일련의 사건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 형식이란 감각적 경험으로 끝나야 하는 외적 사실이 주어지면 그 정서가 즉시 환기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다.
엘리엇의 시가 대체로 극적인 구성을 보이는 것은 그의 이러한 시론에 연유한다. 그러나 그 극적 구성은 단편적이며 고도의 함축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지적 긴장을 요구한다. 브래드브룩(m.c. bradbrook)이 말하듯이 “엘리엇에게 약삭빠른 수동적인 상태에서 접근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독자는 머리를 써야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시는 매우 암시적이다. 특히 그의 초기의 대표작인 「황무지」(the waste land, 1922)는 수많은 고전으로부터의 인용이나 그것에 대한 인유가 특이한 느낌을 주는데, 사실상 이 작품은 인용의 연속으로 끝나고 있다. 엘리엇의 중요한 형식적인 특징의 하나가 단편성인데, 이는 인용, 인유와 무관하지 않다. 이 단편성은 마침내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되는 단편성이다.
작품감상1,2차 세계대전은 문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가공할 파괴력과 비인간성으로 인간에게 이성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니 생각 할 수 없는 침묵으로 몰아갔다. 벤야민은 “침묵이란 단지 고요한 정지와는 다르다.”고 하면서 이것은 죽음, 정신적 상처에서 얼어붙음, 혹은 주술에 마비돼버린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다. 「황무지」의 마지막 순례는 우리에게 귀 기울여 잘 들어야 만이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순례자 시인은 황무지를 구원할 ‘말씀’으로 “다타(주라)!, 다야드밤 (공감하라)!, 담야타(절제하라)!” 세 가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가?
1922년에 발표된 t. s. 엘리엇의 「황무지」는 전쟁의 참혹함을 처절하게 읊은 장시이다. ‘황무지’란 자본과 산업사회의 폐해를 가리킨다. 「황무지」5부로 구성되어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우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생명을 길러주었다.”
t. s. 엘리엇는 「황무지」에서 사회적으로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유대인과 여성에 대해 편견 나타내고 있다. 엘리엇이 공허한 세상에서 해결방안으로 찾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로렌스가 왕성한 생명력에서 해답을 찾았다면 엘리엇은 종교에서 그 해법을 찾았을 것이다.
이는 엘리엇이 영국국교로 개종하고 쓴 「동방박사의 여행」은 동방박사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러 가는 여행을 소재로 하여 늙은 동방박사가 옛날의 여행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엘리엇의 작품 중에서 명백히 기독교적인 영감을 지닌 최초의 것이다.
“오느라고 우리 참 추웠었지,/여행하기에, 이렇게 긴 여행을 하기엔/
하필 일년 중에서도 가장 나쁜 때였지/길은 깊고 날씨는 살을 에이고
/한겨울이었지.”
“나는 탄생과 죽음을 보았어,/그러나 그것들이 다
른 것이라 생각했었지/이 탄생은/우리에게 가혹하고 쓰라린 고통이었
어, 죽음같이, 우리의 죽음같이”
20세기 최고의 시인을 간단하게 정리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는 정신적 공황기에 우리 앞에 나타나 황폐해진 인간의 마음을 시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을 표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 1915년 비비언 헤이우드와 결혼했고, 1933년 이후 그녀가 정신질환에 걸리자 그들은 별거했으며, 그녀는 1947년 죽었다. 1957년 1월 그는 발레리 플레처와 재혼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와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자료출처 :
http://www.spoem.com/english_poem/ts_eliot.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