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주년에 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기억하자 -
최종세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도 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으로 남침함으로 발발한 전쟁이 바로 6·25전쟁이다. 그렇다면 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그것은 전쟁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6․25전쟁은 해방 이후 좌우로 갈린 정치이념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전쟁 미체험 세대들이 늘어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역사적 배경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전면전을 준비한 쪽은 북한이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군사력을 키웠다. 북한 지도부는 ‘남조선 해방’에 대한 북한 주민의 열기가 높고 남한 정부에 대한 남한 국민의 지지는 낮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한반도의 주변 상황도 그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1949년 한 해 동안 미군이 한국에서 모두 철수한데다가 중국 공산당이 중국 전체를 장악하고, 소련이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등 호재가 잇달았기 때문이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4월 5월 소련과 중국을 차례로 방문하여 자신감을 보이며 전쟁 의지를 밝혔고 두 나라로부터 지원 약속을 끌어냈다. 전쟁은 미리 준비된 북한 인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미국이 사회주의 진영을 봉쇄하기 위해 유엔군을 조직하며 6월 27일 미 공군의 참전을 시작으로 16개국의 국제연합 유엔군이 참전하였다.
유엔군의 대규모 개입에도 불구하고 북한 인민군은 멈추지 않았고 팽팽한 가운데 10월 13일 중국 공산당이 전쟁 참여를 공식 결정하면서 1951년 1월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에 밀려 한강 남쪽까지 후퇴했다.
1월 말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반격을 개시하면서 38도 선 부근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1951년 6월 23일 소련이 유엔 대표를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미국이 제의를 받아들여 7월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은 2020년 말 기준 이산가족의 수는 133,406명이고, 이산가족 생존자는 49,452명으로 집계되었다. 이산가족 신청자 중 8만여 명이 고령으로 사망하고, 현재 49,452명이 생존해 있다. 안타깝게도 6․25 전쟁 피해자들은 고령으로 사망하고 참전용사의 처우기준이 공정치 못해 큰 아쉬움을 남겼다.
국가유공자 선발기준 역시 5․18 유공자와 비교했을 시 6․25전쟁 참전자들에겐 가혹한 면이 없지 않다. 참전자들에게 지급하는 수당은 월 9만 원 전부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담보로 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에 대한 예우치고는 너무 빈약하다.
올해는 6․25전쟁 71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다시는 이 땅 위에서 6․25와 같은 전쟁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안보정신을 살리기 위해 육군3사관학교 오성회 김창주(5기 동기회) 회장은 포천 38선 표지석에서 영천에 있는 육군3사관학교까지 장장 600㎞의 도보전적비순례를 시작했다. 도보전적비순례는 이동로상에 있는 전적비를 참배하면서 걷는 외로운 도전이다. 6․25전쟁 71주년이 되는 그날 3사관학교에 도착하여 충혼비에 헌화 분양하고 참배하는 것으로 순례를 마친다. 그가 도보전적비 순례를 하는 것은 용서는 하되, 잊어서는 안 되는 전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 대한민국엔 수많은 병역 명문가 집안이 있다. 병역 문제에서는 3대에 걸쳐 티끌만큼도 흠이 없는 대한민국 대표 명문가다. 망국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한 조부와 3대가 병역을 더한, 전 최재형 감사원장 가족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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