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25動亂이 나던 그 해 11월에 태어났다.
劣惡한 환경에서
8개월의 未熟兒로 태어난 탓으로
숨도 쉬지 않는 나를 보고
어른들은 살지 못할 것이라 해서
포대기에 둘둘 말아 방구석에 밀어 놓았다.
버리기 전에 혹시나 해서 포대기를 열어보니
나는 숨을 쌕쌕 쉬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살아서 지금 60대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너 나 없이
어려웠던 시절에 幼少年기를 보냈다.
지금은 그때에 比하면 천지가 개벽할만큼
풍요로운 시절을 살면서
요즘 世態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 해 6월.
전쟁이 터졌으나
우리 집은 避難을 가지 못했다.
그때 증조할머니가 年老하셔서 擧動이 불편하셨다.
나는 살만큼 살았으니
너희들만이라도 피난을 가라고 하셨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피난을 포기하셨다.
인민군이 進駐하고 우리집은
그들의 밥 먹는 장소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精米所를 운영하셨기 때문에
쌀이 있었고 마당이 넓어 그렇게 되었단다.
뱃속에 나를 가진 어머니는
晝夜로 밥 짓는 일을 했고
그 일이 얼마나 고됬는지
손톱에서 피가 났다고 한다.
미국과 유엔군이 參戰하여 전세가 逆轉되었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국군이 進駐했는데
附逆자를 색출하여 處刑하는 慘劇이 벌어졌다.
당시 30세의 아버지도
꼼짝 없이 처형자의 신세가 되었다.
이때를 위하였는지 몰라도 할아버지는
책임자급 국군 上士를 뒷뜰 장독대로 인도하여
그 밑에 油紙로 싸서 감추어 두었던
얼룩진 태극기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이 일로 아버지는
奇蹟적으로 처형자 신세를 면했다.
대신 北進하는 국군을 따라 勞役夫로 참전하셨다.
그때 아버지가 처형되었으면
나는 평생 한 많은 遺腹子로 살았을 것이다.
그 얼룩진 태극기는 지금도 내가 보관하고 있다.
할머니는 매일 밤 장독대에
촛水를 떠놓고 촛불을 켜서
天地神明께 아버지의 生還을 빌었다.
국군과 함께 生死를 넘나들며
평양까지 北進했다가 용케도 살아 돌아오신 아버지!
그러나 그 기쁨도
막내 삼촌의 悲劇을 덮지는 못했다.
法大 在學 중 해병대 단기사관학교를 수료하고
少尉로 任官하여 적과 싸우다가
元山전투에서 戰死했다.
그가 남긴 건 戰死통지서와 몇 푼 안되는 遺族年金.
전사한 삼촌은 내 고장
충현탑의 位牌 1번에 그 이름이 적혀있다.
中共軍의 개입으로 국군이 후퇴하자
지난날의 惡夢을 반복 할 수 없어
어머니는 핏덩이나 다름 없는 나를
이불에 싸서 들쳐업고 피난을 가야했다.
이런 苦難속에서 나는 포탄 터지는 소리에 놀라
서둘러 어머니 뱃속을 뛰쳐 나왔는지 모른다.
이런 비극이 어찌 우리 집안뿐이겠는가?
3년의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조국 山河.
거기서 나의 幼少年期가 시작되었다.
곳곳에 부서진 탱크 잔해물.
버려진 銃彈을 가지고 놀다 폭발하여 죽거나 다치는 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한 班에 孤兒들이 서너 명은 되고
그들의 단결력에 눌려 屈從해야 했던 기억들.
학교에서 나누어 주는 우유와
강냉이가루를 먹고 설사를 했던 기억들.
너 나 없이 가난했던 시절.
生日날에만 특별히 먹는 짜장면은 天上의 別味였다.
밥 먹고 아이들이 뛰어 놀면
어른들은 이렇게 타일렀다.
"얘들아! 뛰지마라, 배 꺼진다."
거리에는 거지와 문둥병자 傷痍軍警이 넘쳐났다.
그 중 상이군의 쇠갈고리 손이 너무나 무서웠다.
그들은 연필을 强賣하며
그것을 사지 않으면 행패를 부렸다.
문둥이는 어린애의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에
애들은 집 밖에 나가기를 꺼릴 정도였다.
美軍 방역차가 오면
전교생이 학년별로 운동장에 모였다.
소매와 허리춤 바지가랭이에
하얀 DDT가루를 에어콤프레서로 쏘아 넣었다.
단발머리 여자애들은 白髮이 되었다.
겨울은 몹시도 추워서 방안에 놓아 둔
주전자의 물과 걸레가 얼었다.
밖에서 세수하고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만지면 쩍하고 달라붙었다.
전기사정이 안 좋아 해가 지면
칠흑(漆黑) 같이 어두었으나
밤하늘엔 별이 총총 빛났고
銀河水는 강물 같이 흘렀다.
당시 아버지를 살려 준 고마운 국군상사는
전쟁이 끝나고 몇 번 우리집을 찾아왔다.
그가 돌아갈 때 그의 주머니엔
어머니의 금반지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덕인지
95세까지 형형(炯炯)하게 사시고
재작년 추석날에 돌아가셨다.
내 나이 올해 인생학교 6학년 8반이다.
그 나이는 인생에 있어 중요한 轉換期이다.
자식 養育을 마쳤고 生業 一線에선 은퇴할 때이다.
그래서 개인을 넘어 나라를 걱정해야 하는
餘裕와 當爲가 거기에 있다.
6.25를 몸소 겪은 세대들이 나서서
그 날을 특별한 날로 定하여
나라의 안보를 튼튼히 하는 契機로 삼는 것이 좋겠다.
제1,2차 연평해전이 1999년 6월15일과
2002년 6월29일에 일어난 것도 공교롭게 다 6월이다.
이를 위하여 6.25를 國家記念日로
定하자는 의견을 모으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래서 新세대에게 나라가 自主力量이 부족하면
苦難이 온 다는 것을 周知시키면 좋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