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의 서문을 보면 마르크스가 적어도 영국에서는 자본주의 발전이 이미 절정에 달해서 서서히 자본주의가 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혁명을 일으키고자하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반대했었다.
미국으로 이민간 아돌프 클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852년 마르크스는 현재의 경제적 번영은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것임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혁명은 일어나기 어렵다고 말다.
(마르크스가 Cluss에게 보낸 편지, 1852.4.22 - Werk,XXXVⅢ,525)
크리미아 전쟁이 영국 사회에 준 충격을 본 마르크스는, 특정상황하에서는 영국의 기존 정치세력들이 정교하게 서로 균형상태를 이루게 되어 그 결과 노동계급이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을 통해 정국을 좌우할 주도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뉴욕 데일리트리뷴, 1855.4.27(Werke,XI, 178~83)
1855년에 있었던 다소 폭력적인 노동계급의 시위에서 마르크스는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들이 통제되지 않은 폭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았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1855.6.3, Briefwechsel, Ⅱ, 114,116)
①1857~58년의 파머스톤의 승리와 경제공황에 고무되어마르크스는 다시금 확대와 내적 번영의 시기는 지나갔으므로, 머지않은 장래에 혁명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1957.3.31, Briefwechsel, Ⅱ, 222) Herr Vogt에서 마르크스는 다시 1857~58년 이전에는 새로운 혁명의 물결이 찾아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Werke, XIV, 452)
1858년 마르크스는 라살레에게 이렇게 쓴다.
"결국 현재의 시기는 유쾌합니다. 역사는 다시한번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어디서나 해체의 징후가 있어 현상태의 보존을 원하는 자가 아닌 모든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 줍니다
"(마르크스가 라살레에게 보낸편지. 1858.5.31(Werke, XXIX, 561)
②1858년말경 이 위기들이 잘 넘어간 후에까지 마르크스는 러시아 내부에 모종의 사태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적어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됩니다"라고 쓴다.
③1862년 독일의 정치적 상황이 격화되자, 또 한번 혁명은 그곳에서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긴다.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당신이 그곳의 상황을 기회 닿는대로 적어보내 주신다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혁명이 가까와짐에 틀림없습니다. 나는 1950년 이래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선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48~49년의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여하튼 그것이 세계사의 길입니다. 그리고 세계사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마르크스가 Kugelmann에게 쓴 편지, 1862.12.28(Letters to Kugelmann, p25)
④1863년 프러시아 정치위기가 계속 심각해지자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곧 혁명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1863.2.21(Briefwechsel, Ⅲ, 158)
⑤같은 해 그는 폴란드의 폭동을 유럽의 혁명에의 전주곡으로 간주하며 "이번에는 용암이 동에서 서로 흘러갈 희망이 있다"고 하였다.(Ibid. 1863.2.13(ibid. pp.151~2)
⑥5년 후인 1868년 마르크스는 스페인의 혁명 발전을 보편적 변혁을 알리는 신호로 간주하였다. "나는 스페인의 혁명이 1848년의 나폴리 혁명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유럽역사에 전혀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당신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Ibid. 1868.9.23(ibid. Ⅳ, 118)
⑦마지막으로 마르크스는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고 난 후인 1877년 혁명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했다. 조르게(Sorg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 패배가 러시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위기는 유럽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입니다. 러시아는- 그런데 나는 공식, 비공식의 러시아 소식통을 접촉하여 연구해 왔습니다....오래 전부터 대변동의 문턱에 서 있었습니다. 대변동의 모든 요소가 준비되었습니다. 용감한 터키인들은 러시아 군대와 러시아 재정에 뿐 아니라, 그 군대를 통솔하는 왕실(짜아르, 그 상속자, 그 외의 여섯 왕족)의 인물들에게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 폭발을 몇년이나 앞당겼습니다. 대변동은 입헌주의가 들어서자마자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한바탕 멋진 대소요가 일어날 것입니다. 만일 어머니이신 자연이 우리를 특히 미워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생전에 그 즐거움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러시아 대학생들이 저지르고 있는 어리석은 넌센스는 그 자체로서는 별 가치가 없지만 하나의 징후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징후입니다. 러시아 사회의 모든 부분은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완전히 해체되고 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혁명은 이제까지 파괴되지 않은 보루이며 반혁명의 예비군인 동구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Sorge에게 보낸 편지. 1877.9.27(Selected Correspondence, p.374)
몇주가 지나지 않아 사태가 급전하고 러시아는 발칸반도에서의 승리와 산 스테파노 협약으로 당당한 개가를 올렸으며, 마르크스의 대담한 주장은 간절한 소망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 듯 했다.
그러나 마침내 40년 후 혁명이 러시아에서 실제로 일어났을 때, 그것은 마르크스가 이 편에서 묘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즉, 군사적 패배, 짜아르의 인기 감소, 그리고 과격한 혁명에 선행하는 "입헌주의적 정치투쟁"의 단계가 있었던 것이다.
수주일 후의 일은 맞추지 못했지만 40년후의 일은 맞출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재미가 있기도 하지만,
그 시차가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영국, 스페인, 폴란드, 러시아에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어디서든 기존질서의 안정성에 충격을 주는 듯 보이는 위기만 생기면, 그것을 혁명의 징조와 전주곡이라 생각하였다.
임박한 혁명 발발지의 위치를 그의 철학체계가 정확하게 식별해 내기는 곤란하였다. 그 풍부하고, 통찰력이 뛰어나며, 복잡하고, 명석한 지성이 번득이는 철학체계가 그에게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은 천년왕국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복음밖에는 없었다.
그의 예언들은 그의 평범한 사회-정치적인 직관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직관들은 그의 동시대인들의 그것보다 크게 우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