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4.05 03:07 | 수정 : 2018.04.05 08:09
前정부 정책에 관여했으면 'JP지수 높은 사람'… 요직서 배제
"정권 바뀌어도 후환없게 상사 지시 녹음" 서로 못믿고 몸사려
"JP 지수가 높은 사람은 부처에 돌아올 생각을 말라네요. 위험하니까 아예 가만 있으랍니다."
전 정부에서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인사는 최근 같이 일했던 외교부 간부에게 이런 푸념을 들었다. "JP 지수가 뭐냐"고 물었더니 "적폐(JP)의 약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JP 지수가 높은 공무원은 업무상 배임 같은 중죄를 저지른 경우보다 요직에 기용될 가능성이 더 낮다"고 했다. 어떤 식이든 전 정부 핵심 정책에 관여한 공무원은 '기피 대상 1순위'라는 얘기다.
세종시의 한 정부 부처 과장은 "요즘 위에서 구두(口頭)로 긴박한 지시가 떨어지면 녹음이라도 해놔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했다. 그는 "윗선 지시를 이행한 해수부 차관이나 실세의 인사 민원을 전달한 산업부 국장이 구속되는 걸 보면서 나중에 나는 어떨까 생각하면 오싹하다"고 했다. 세종시 공무원들 사이에선 '간부와 부하 직원들이 과거와 달리 서로를 못 믿는다' '문제 될 일은 무조건 기록부터 남겨야 후환이 없다'는 말들이 나온다.
현 정부가 1년 가까이 전방위 적폐 청산을 밀어붙이면서 엘리트 관료들의 헌신을 근간으로 하는 한국형 행정 시스템이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 요즘 정부 부처들은 JP 지수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실무자급 공무원들이 차고 넘친다. 외교부는 위안부 협상과 대북정책, 국방부는 사드 배치, 국토부는 부동산정책, 해수부는 세월호, 공정위는 삼성 특혜, 교육부는 국정교과서, 고용부는 노동개혁 현안에 발만 담가도 잠자리가 편치 않을 지경이다.
전 정권, 전전 정권의 핵심 정책을 수행했다는 이유로 엘리트 관료들을 '부역자'로 취급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관료 사회에서 복지부동(伏地不動) 행태가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현직 관료는 "정권 초인데도 실세 옆에 자리 잡은 청와대 행정관들조차 나갈 자리만 찾는다"며 "이렇게 초반부터 공무원들이 납작 엎드리는 건 처음 본다"고 했다.
본지 인터뷰에 응한 전 정부 경제·사회 부처 장관급 인사 8명은 "이런 식으로 전 정권의 책임을 관료들에게 묻는다면 행정부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장관급 인사는 "과거에도 전 정권과 가까웠던 고위 관료들이 배제된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실무자급까지 광범위하게 처벌받는 경우는 없었다"며 "능력 있는 후배들이 'JP 지수' 핑계대며 몸을 사리는 걸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