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라는 걸 마실 줄만 알뿐, 커피를 내리거나 볶거나 등등 소위, 하고많은 이름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C-레이션 인스턴트커피로 시작해서인지 나이 70이 넘은 지금도 하루 다섯 잔은 마셔야 제 컨디션을 유지할 만큼 커피에 중독(?)된 사람이다. 그게, 커피를 마시되 숭늉처럼 엷게 타서 음료처럼 마시는가 하면 촌스럽게도 인스턴트커피 맛으로도 충분하니 시작을 어찌했느냐가 중요하긴 한가보다.
그런데 어제, 아주 특별한 손님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고교 동기동창이 자신의 막내아들이 함께 찾아온 것이다.
막내아들 때문에 너무나 답답하여 오랜만에 바다구경이나 하자고 강릉 경포대에 갔던 길에 우리 집에서 하룻밤 유하고 상경하자며 반 강제로 데려왔다고 한다.
“네놈이나 나나, 우리 나이에 답답할 게 뭐있어? 뒷방 늙은이 노릇 대충하다가 때가오면 맘 편히 가면되지.”
“내가 답답할 일이 뭐가 있겠냐. 이 녀석 때문에 속이 뒤집어지는 거지.”
이쯤 되면 남의 일이기는 하지만 궁금증이 일어나게 되어있는 것.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아들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말인즉, 막내아들은 엉뚱하게도 커피를 볶아 여러 가지 맛으로 내리는 기술자라고 했다.
나로서는 내린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겠지만, 이 녀석이 이상하게도 커피를 너무나 좋아해서 대학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커피전문점을 전전했다는데 무슨 학원인가에서 본격적으로 커피를 배우기까지 했다던가.
결국 서울장안에 산재한 커피전문점을 전전하며 잘 나간 것까지는 좋은데 일하던 직장에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이 문제라는 거였다.
“우리 업계는 원래 그래요. 누가 한 업소에서 일 년 이상을 버티겠어요? 아버지는 너무 구식이에요.”
막내아들의 반발이다.
“이 녀석 좀 봐라! 마치 일본 전국시대 낭인처럼 뿌리 내리지 못하고 동 가숙 서 가숙 하는 주제에 그게 옳다는 거 보라고.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진즉에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아들과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했을 테고 나라도 편을 들어 아들을 설득했으면 싶었을 거다.
이런 경우에는 내게도 한계가 있다.
물론 내 정서로도 친구 녀석과 마찬가지로 손쉽게 직장을 옮겨 다니는 걸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내 기분에 옳지 못하다 생각되기로 우선 커피전문점이라는 곳에서 커피를 마셔봤을 뿐, 그런 곳의 운영 실태를 전혀 모르는 처지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나 역시 녀석의 막내아들이 일 년이 넘기 전에 다른 업소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못하는 짓인지 알 수 없다는 거다. 모르면서 어찌 상대를 설득하겠는가.
“글쎄, 커피전문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전혀 모르는 내가 할 말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자넨 어째서 그리도 자주 자리를 옮기는 거지? 음식점 주방장들이 자리를 자주 옮기는 것과 같은 맥락인가?”
“주방장들이야, 다른 업소에서 한 푼이라도 더 준다면 냉큼 옮기겠지만 저는 꼭 임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래? 기왕 만났으니 커피전문점 이야기를 들어볼까? 혹시 소설소재로 필요할지 알겠어? 자리를 옮기게 되는 원인부터 알려줄래?”
커피전문점 기술자들이 자주 자리를 옮기는 요인은 업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문을 닫는 데에도 있지만 내가 생각지도 못할 불가피한 이유가 많았고, 친구의 막내아들이 자리를 옮기는 것 또한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 속셈의 일단을 드러내고 말았다.
비록 아버지와 나누는 술좌석이라 조심스럽게 마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술이란 한두 잔 마시다 보면 취하게 되는 것. 제 속셈이 드러나지 않을 방도가 있을 리 있겠는가.
“처음에는 기술자 대우도 해주고, 간이라도 빼 줄듯 하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하인취급을 하더라는 겁니다. 저들이 사장이면 사장이지, 커피 뽑을 기술도 없으면서 사람취급조차 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붙어있겠어요?”
말하자면 그 많은 요인 중에 커피전문점 사장과 종업원 간의 갈등이 자리를 옮기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라는 얘기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인간적인 갈등 때문에 자리를 옮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쩐지 친구 부자지간의 다툼에서 빠지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친구의 응원이라도 얻고 싶어서 그 먼 길 찾아왔는데 매정하게 빠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흠! 갈등이라……. 성질대로 한다면 당연하게 관둬야 하겠네.”
“그렇죠? 역시 아버님께서는 이해하실 줄 알았다니까요.”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관둬야 하다니……!”
내 한마디에 아버지와 아들의 반응이 정 반대로 나타난다. 이거야, 소설 쓸 때처럼 말빨로 아버지와 아들을 현혹시켜야 할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다.
정치인들과 종북세력의 혹세무민을 가장 싫어한다면서도 나 역시 상황에 따라 혹세무민의 교활한 혀를 놀리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야, 성질대로 하면 당장 때려 치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가지고는 평생 돈 몇 푼에 팔려 다니는 삼류기술자 신세를 면치 못할 것 같은데?”
“……?”
“자넨 자신이 근무할 커피전문점 선택부터 잘못하는 건 아닐까?”
“저는 이곳저곳 부르는 곳이 많은데요?”
“내가 보기에는 그게 문제라는 거야. 자네를 부르는 곳으로 가봐야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취급 할 게 빤하거든. 왜냐하면 자네를 부르는 곳일수록 안정되지 못했거나 돈 푼이나 가지고 새로 개업했거나, 기존에 있었던 기술자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거나, 그래서 자네를 부르는 게 아닐까?”
“…….”
“가령 명동에 전통 있는 커피전문점이 있다고 하면 그런 곳일수록 사장과 기술자, 기타 종업원들이 긴 시간 함께 했기에 전통이 생긴 것일 터, 그런 곳에서도 자네를 부르던가? 딴에는 자신이 한국에서 알아주는 커피전문가라고 자부하는지 모르겠으나 과연 그럴까?”
어제 친구 막내아들 녀석에게 해준 말은 여러 가지였다.
‘자신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그런 인격을 지닌 사장을 만나야 하고 기술자가 해야 할 일과 일반 종업원이 해야 할 일을 구분해서 맡길 수 있도록 안정된 고용을 할 만큼 고객들에게 인정받는 업소라야 한다는 것.’
‘그런 업소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니, 완벽한 기술을 배우고 완성하기 위해 좋은 스승을 만났을 때에는 어떤 인간적인 모멸이나 고난이라도 이겨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사장과의 갈등으로 손쉽게 이리저리 옮길 사람이라면 자기 업소를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기에 평생 봉급 몇 푼에 팔려 다니는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는 것.’
‘내가 기술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기 전에 자신이 일하는 업소의 영업이 원활한지, 기술자가 할 일 외에 다른 일까지 함께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업소의 여건이 어려운 건 아닌지를 살필 수 없다면 자신의 업소를 경영할 자격이 없다는 것.’
뭐, 그럴듯하게 떠들기는 했지만 커피전문점을 잘 모르는 내 말이 납득할 만한 충고가 되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구 녀석은 내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던지 고개를 끄덕이기 바쁘다.
이건 아들과 아버지가 누가 이기나 투전하는 하는 것도 아니고 아들 앞에서 이처럼 노골적으로 내 편을 들면 기분 나빠서라도 고개를 돌리고 말겠다 싶어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친구야. 내가 한 말들은 일반적인 이야기일 뿐이야. 직장생활도 어쩌다가 더러운 상사를 만나면 하루에도 열댓 번씩 사표를 내고 싶지. 하지만 사표 잘 내는 사람 쳐 놓고 일가를 이룬 사람 보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지. 커피전문점이 어떤지 알고 하는 말이 아니었으니 내 말이 옳은지 그른지 나도 모르거든.”
그래도 막내아들의 표정이 심각해진 것을 보니 내 말에도 나름대로 들을 만한 구석은 있었던가 보다.
어차피 삶이란 관계성이다.
젊은이들이 소화해야 하는 원리가 있다면 갈등이 생겼을 때, 떠남으로써 피할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풀어나갈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떠나서 얻을 것은 없다.
여기에서의 떠남이란 피함과 같은 의미이기에 그렇다. 예컨대, 업소가 경영난에 부딪쳤다면 커피기술자 입장에서도 보다 맛있고 향기로운 커피를 내릴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고객을 다시 모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일.
자신은 봉급쟁이니 만큼 경영난에 책임 없기에 떠난다고 한다면 자신의 기술향상조차 이룰 길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관계성의 오묘한 섭리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는 건 간단하다. 마음만 먹으면 죽음처럼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러나 사는 건 참으로 힘겹다.
관계를 해야 하고 관계성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갈등을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잘살고 못사는 것, 행복하고 불행한 것, 기쁘고 슬픈 것, 결국 그 모든 것이 관계성으로부터 오는 것. 배우고 깨닫는 것 역시 마찬가지.
따지고 보면 삶 자체가 관계라는 거다.
그 어느 곳이든, 그 어떤 일이든,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하여 10년을 버텨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더라도 결코 그곳이나 그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나는 친구 아들에게 한 가지 충고를 더했다.
“자네, 시간 날 때마다 불경과 성서를 읽으라고. 이 두 경전들이 전하는 말들을 음미하다 보면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음을 깨닫게 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