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데이빗 린david-lean 감독이 영화화한 닥터 지바고Doctor-Zhivago는 러시아의 시인이자 작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pasternak(1890-1960)의 소설이 바탕이다.
이 소설은 구舊소련 시절 금지됐던 작품인데다가 정치적 압력으로 작가 스스로 1958년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던 소설로 유명하다.
이 소설을 읽었던 시기가 중학교였는지 고교 때였는지 기억이 명료하지 않지만 처음 읽었을 때에는 그저 줄거리만을 기억했을 뿐, 이 위대한 소설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나이 들어 영화를 보고난 이후 다시 읽었을 때 비로소 알 수 없는 슬픈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데이빗 린 감독은 1910년대 볼셰비키Bolshevik 혁명과 1차 세계대전의 혼돈 속에 스러져 간 시인이자 의사였던 지바고의 일생을 마치 웅대雄大한 서사시적敍事詩的 대하大河와 같은 화면으로 펼쳐낸다.
한국에서는 1968년 처음 개봉되어 많은 영화마니아mania들을 열광시켰던 이 영화의 근간根幹은 유리 지바고(오마샤리프Omar-sharif분)와 라라(쥴리 크리스티Julie-christie분), 그리고 부인 토냐(제랄딘 채플린Geraldin-chapln분)와의 러브스토리지만 장엄한 공산사회주의 혁명의 와중에서 스러져갈 수밖에 없었던 인간 개개인의 처절한 모습을 감동을 넘어선 장구한 인간역사로 재창조해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화면상의 장관壯觀은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할 만큼 빼어난 구도構圖와 앵글angle로 잡아낸 끝없이 펼쳐지는 설경雪景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발랄라이카의 음색을 살린 모리스 자르Maurice-jarre의 감미로운 주제곡 '라라Lara의 테마'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각색, 미술, 의상 등 5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당시만 해도 냉전시대였기에 대부분의 촬영은 시베리아가 아닌, 에스파냐에서, 겨울 장면은 핀란드에서 찍었다.
이야기는 지바고의 이복형 예프그라프가 지바고와 라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찾아 대화하면서 시작된다.
8세의 나이에 고아가 된 유리 지바고는 그로메코가家에 입양되어 성장하는 과정에서 1912년 어느 겨울 밤, 크렘린 궁성 앞에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기마병에게 살해되는 현장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시를 쓰는 한편 직업을 위해 의학醫學을 공부하며 의사로서 명성을 얻은 지바고는 그로메코의 외동딸 토냐Tonya와 결혼한다.
어머니의 정부情夫 코마로프스키Komarovsky(로드 스테이거Rod-steiger 분)에게 폭행당하고 사교계의 크리스마스 무도회장에서 그에게 권총을 쏜 라라와 그 자리에 있었던 지바고가 운명처럼 만난다.
그러나 라라에게는 혁명투사 파샤Pasha(톰 카우트네이Tom-courtenay 분)라는 연인이 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러시아가 볼셰비키혁명의 혼란에 빠지면서 군의관이 되어버린 지바고는 혁명군 종군간호부從軍看護婦가 된 라라를 만난다.
1917년 수립된 러시아의 혁명정부 숙청대상이 되어버린 지식인 지바고는 아내 토냐 가족과 함께 우랄산맥의 오지奧地 바리끼노로 숨어든다.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했던 그는 시내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 근처로 이주해온 라라와 운명적으로 재회한다. 이때부터 지바고는 라라와 토냐 사이를 오가면서 이중 밀회를 지속한다.
어느 날 바리끼노를 다녀오다가 마주친 빨치산에 잡혀 혹독한 긴 세월을 전쟁터에서 의술을 펼치며 보낸 지바고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라라를 찾지만 혁명정부의 탄압으로 다시 헤어지게 된다.
러시아도 정치적인 안정을 되찾을 지음, 이복형 예프그라프의 도움을 받아 의사직업을 얻어 출근하던 지바고는 전차에서 내리는 라라를 보고 황급히 그녀의 뒤를 다르다가 심장마비로 절명한다.
우연偶然을 필연必然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자신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우연한 만남을 경험한다.
자신이 의도意圖한 바에 따라 만나지기도 하지만 전혀 의도하거나 기대한 바 없는 사람을 만나 자신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바삐 전차에 오른 지바고가 마침 전차에서 내리는 라라와 무의식無意識중에 엇갈려 만난 것이 그렇다.
자신의 정부情夫인 코마로프스키와 딸의 불륜을 눈치 채고 자살을 기도한 라라의 어머니를 치료하러 왕진往診했던 지바고가 두 남녀의 불륜을 목격할 때까지만 해도 우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부터 라라에 대한 지바고의 관심이 심어지기 시작한다. 우연이 필연으로 바뀌는 초기과정初期過程에 들어선 것이다.
결정적인 필연으로의 변화는 정부군 군의관인 지바고와 남편을 찾으려고 간호부가 된 라라가 전쟁터에서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붉은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떠나는 라라를 바라보는 지바고의 눈에 눈물이 맺힐 만큼 필연으로의 변화에 결정적인 사건이다.
당의 탄압을 견디지 못한 지바고는 가족과 함께 처가 고향으로 이주했지만 징발당하지 않은 헛간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숨 막히던 당의 감시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다시금 유리아틴에 있는 도서관에서 만난 지바고와 라라는 드디어 불타오르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우연이 필연으로 완성된 변화의 모습이다.
이를 불교논리로 인연이라 해야 할까.
집착執着은 인간을 편협偏狹하게 만든다.
라라의 약혼자 파샤가 집착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혁명을 위해서는 아름다운 약혼자 라라조차 과감하게 버릴 만큼 냉혹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혁명이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릴 것이라고 굳게 믿는 과격분자다.
“혁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그 과업은 라라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파샤의 말이다. 어느 목표를 위해 모든 삶을 포기해버리는 인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사臺詞가 아닐 수 없다.
라라의 불륜을 알면서도 결혼을 감행한 파샤는 1차 대전이 터지자 징집농민을 포섭하기 위해 자원입대한다. 능력이 있으나 인정받지 못한 불만, 약혼자를 두고도 불륜을 일으켰던 아내 라라에 대한 불신 등, 혁명에 대한 집념과 인간적인 회의가 뒤섞인 지원이다.
“행복한 자는 결코 지원하지 않는다.”
지바고의 이복형 예프그라프가 군에 지원하면서 독백獨白했던 말이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지바고에게는 이데올로기ideology에 휩쓸린 핏발선 광풍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땔감조차 없는 궁핍한 생활이 문제가 아니라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시인이자 의사인 지바고로써는 개개인의 개성을 말살抹殺한 일체주의적一體主義的인 사회주의에 적응하기 어렵다.
끊임없이 감시당해야 하는 지식인 출신이기에 감시당하고 사생활私生活이 없는 환경이 지옥에 다름 아니다.
“땔감도둑을 체포하는 건은 체면에 금이 가지만 당이 지시하는 일에 체면이 낄 여지는 없다. 한 사람이야 별 상관없지만 500만이 나서면 도시는 파괴된다. 내 동생을 본건 처음이지만 난 동생을 알았고 당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핏줄로 얽힌 때문은 아닌 것 같다. 형제가 형제를 잡는 세상에 반쪽짜리 형제라니.”
이미 당 비밀경찰 고위직에 오른 이복형 예프그라프가 동생을 찾아왔다가 땔감을 훔치는 지바고를 바라보며 독백獨白하는 장면이다.
“생명을 눕혀놓고 불의라는 종양을 때어낸다? 놀라워. 종양을 때어내는 건 큰 수술이지. 누군가는 삶을 유지시켜야 해.”
이건 혁명을 얘기하다가 지바고가 형에게 한 말이다. 이것이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모스크바의 삶이었다.
결국 예프그라프는 지바고에게 시골로 이주할 것을 권한다.
지바고의 자유로운 영혼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민중은 선동煽動에 솎기마련이다.
지바고와 그로메코 부부는 파샤가 앞장서서 거리를 행진하는 데모대를 바라보며 그들의 구호에 감탄한다.
“동포애와 자유, 좋은 말이구나. 정의와 평등의 빵, 너무 근사하지 않니?”
“그렇군요.”
대수롭지 않게 주고받는 그 대화 속에 숨겨진 잔혹한 역사의 도래渡來를 이들은 짐작조차 못한다.
결국에는 평등의 빵을 얻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굶주림을 얻었음에도 그것을 갈구하는 혁명의 와중渦中에서 귀족뿐만 아이라 얼마나 많은 민중民衆의 피가 필요할지 상상도 못하는 것이다.
군대가 거리에서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포함된 시위대를 무차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한 지바고는 큰 충격을 받는다.
지바고가 충격을 받은 만큼 왕당파에서 스스로 볼셰비키 혁명세력에게 폭력혁명명분暴力革命名分을 준 셈이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벌어지고 전선으로 나가는 군대에 지원병이 몰린다.
지바고의 이복형 예프그라프는 당의 지령을 받고 러시아군에 지원한다.
“난 당에서 자원을 명령받았고 임무는 러시아군의 패배를 조장하는 것이다. 패배는 혁명을 낳고 혁명은 우리의 승리니까. 포섭대상은 징집된 농민이었다. 이들은 새 군화가 달아야 내말에 귀를 기울이리라.”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혁명이 중요할 뿐, 침략자 독일과의 전쟁에서 지고이기는 것조차 상관없다. 사회주의 혁명에는 처음부터 선동과 음모, 그리고 폭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이 지닌 본능을 강제로라도 억제해야 공산주의 이념을 달성하고 유지維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념을 지닌 자들이 늘 사용하는 전술이 사회혼란과 폭력조장이 아닌가.
사회주의의 폭압정치에도 자유로운 영혼들은 곳곳에 있게 마련이다.
지바고 일가가 유리아틴으로 이주하는 열차에서 수용소로 이송되는 죄수가 다른 승객들에게 호통 친다.
“나만이 자유인이야. 당신들은 가축이야.”
그들도 한때는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했거나 동조했던 사람들 중 하나다. 그럴 듯하게 들리는 선동에 솎은 것 쳐 놓고는 너무나 큰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다.
“황제는 인민의 적이에요.”
“자신이 인민의 적인 줄 몰랐겠지.”
“알았으면 좋았을 걸. 아저씨 아들은 학교에서 공교도 안 배우나요?”
유리아틴에서 만난 라라의 딸과 지바고의 대화다.
교육이란 일종의 최면이 아닐까.
공교라는 교과목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사회주의에 적합한 인물로 길들이는 것이 열차에서 만난 죄수의 외침과 연계되어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렇게 길들여진 어린이들은 부모형제까지 당에 밀고할 수 있도록 키워지는 것이다.
역시 인간은 길들여지는 동물이다. 그래서 김일성 부자父子처럼 대를 이어 충성을 받을 수 있는 걸까. 전교조의 교육을 받은 세대가 촛불들고 인민재판을 강요하는 요즘의 한국을 보더라도 인간은 길들여지는 생물이다.
그 누구나 선악善惡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디자이너인 라라 어머니의 정부情夫였던 코마로프스키가 그렇다.
그에게는 모든 여성이 성적유희性的遊戱의 대상일 뿐이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필요할 뿐이다.
그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혁명운동에 반대했지만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는 그들을 이용할 수 있는 유연성(?)도 지닌 자다.
친구의 딸이자 정부情婦의 딸인 라라를 강간하는데 아무런 도덕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라라를 파티에 데려간 코마로프는 그녀를 유혹한다.
난생처음 상류사회의 화려한 생활의 일단이나마 맛본 라라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린다.
“간통하다 들킨 여인에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지?”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했나?”
“………모르겠어요.”
“아무도 그럴 수 없지. 육체는 약하지 않아. 너무 강하지. 자제自制하는 길은 혼인婚姻이라는 것을 명심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고백성사告白聖事하면서 라라와 신부가 주고받은 말이다. 라라에게도 흑백黑白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반 강제로 라라를 범한 코마로프스키는 냉정하게 돌아서면서 말한다.
“강간이라고 생각지 마시오. 피차 즐긴 거니까.”
비로소 수치심을 느낀 라라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고 있는 코마로프스키를 찾아가 권총을 발사하여 부상을 입힌다. 라라의 마지막 자존심인 셈이다.
유리아틴으로 이주하던 지바고는 열차가 잠시 정차했을 때 산책하다가 존경과 두려움의 상징으로 이름 날리는 극좌 강경주의자 스트렐니코프 장군에게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다.
그는 라라의 남편 파샤였다.
그 누구든 조금만 수틀려도 가차 없이 처형하는 잔혹한 파샤는 지바고가 라라와 함께 일했다는 말에 석방한다.
혁명운동에 집착했던 그는 목적 외에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냉혹한 살인마로 변신한 것이다.
세상에 낮과 밤이 있듯 누구에게나 선악은 공존한다.
다만 자신의 삶을 어둠으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밝음으로 살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
“러시아에서 개인의 삶은 죽었소. 역사가 죽인 것이지.”
파샤가 지바고에게 자신 있게 주장했듯이 그는 집착이 지나쳐 어둠으로 밀려가는 삶을 선택했을 뿐이다. 이 또한 난세가 창조해낸 가치였다.
유리아틴에서 재회한 라라와 불륜을 저지르면서 지바고의 고뇌苦惱가 커질 수밖에 없다.
부인에 대한 죄의식罪意識이다.
그러나 라라를 사랑한다고 해서 아내 토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동시에 두 여인을 사랑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사랑의 감정에 죄의식을 느끼는 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우리 스스로 정해 놓은 도덕률道德律 때문이다. 낮과 밤이란 자연스런 섭리일 뿐, 그 자연스러움을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선악을 가려놓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다.
해산달이 가까워진 토냐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지바고는 라라에게 절교를 선언하러 유리아틴을 다녀오다가 의사가 필요한 빨치산에 납치되어 강제로 수없이 많은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빨치산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했을 뿐, 가족과 생이별해야 하는 지바고 개인사個人史에는 추호의 관심도 없었다.
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나는 두 가지 의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인간이 믿는 가치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들이 진정 진리라고 믿는 것일까. 어쩌면 그 시대의 가치관이 있을 뿐, 진정한 진리란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문을 느낀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은 우리의 현실이었다.
해방과 6.25, 그리고 좌파 10년의 세월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 세계 모든 사회주의 혁명과정이 러시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이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혼란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유를 갈구渴求한다.
자유란 사상적思想的인 문제든 인간적인 문제든 인류가 지닌 보편타당성의 본능이다.
혹, 그 본능을 억제해야만 유지되는 것이 사회주의가 아닐까. 통제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사회, 최면을 걸지 않으면 분해되는 사회, 그래서 그럴듯한 논리와 선동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이 소설을 집필한 목적이 사회주의의 폐해를 고발하는 데 있는지는 모르겠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휘둘려 개개인들의 인간성마저 여지없이 파괴破壞되는 고통을 느꼈으니까.
여하간 닥터 지바고에서 나타난, 이미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사회적 혼란이 아직도 21세기의 한국에서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안타깝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