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위장에 수술하기조차 늦은 암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안 이후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항암효과가 있다는 음식을 섭취하며 하루 2만보를 걷는 운동을 하고 있다.
내가 걷는 코스에는 개울이 있다. 늘 개울가를 걸어 2만보를 채우는 셈이다.
개울을 흐르는 물을 보니 그나마 놀고 있던 물고기들이 보이지 않는다. 농약 때문일까? 굳이 개울을 보지 않더라도 어쨌든 자연이 망가진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우리 인류가 타락했기에 자연환경마저 흔들리는 것인지, 자연환경이 흔들리기에 인류가 타락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전 세계 곳곳에서 기상천외한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음에 어이없을 따름이다.
오대산 자락에 사는 죄로 어쩔 수 없이 가끔 만나게 되는 착각도사들이 부르짖는 자유를 연상하게 하는 기행들이 세계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천주교 신부가 성폭행을 했다며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언젠가 동성 간 결혼은 허용하지 않지만 동성애자 간 파트너관계 등록은 허용하고 있는 독일에서 그 나라 외무장관이라는 사람이 동성애자답게 동성 간 결혼식을 올렸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동성 간 파트너 관계 등록을 하면 정상적인 부부와 같은 권리와 책임을 누릴 수 있다하니, 남의 나라 법에 콩 놔라 팥 놔라 따질 일은 아니로되 외무장관 쯤 되는 사람이 동성결혼을 할 정도면 이미 동성애가 일반화 되어있다는 건지 황당해진다. 글쎄, 이쯤 되면 지구촌 곳곳이 이미 소돔과 고모라쯤으로 타락해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영국을 국빈방문 중인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가톨릭 사제司祭의 어린이 성추행 사건에 대해 ‘깊은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사과했다는 기사를 일기도 했었다.
그야말로 사제들의 성폭행은 한국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제들은 결혼을 하지 말라고 지침이라도 내렸는지’ 성서에서 읽은 기억이 없으나, 스스로 섹스를 반납하겠다고 서원하고 사제의 길을 걷는 자들이 성인도 아니고 어린이를 상대로 성추행이라니, 나로서는 그러고도 사제복을 입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뭐, 지금 우리나라 천주교 사제들도 여신도들에 대한 성폭행에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빨갱이들의 단체까지 결성해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말이다.
하기야 사제들도 인간이니만큼 명예를 추구하는 인간적인 실수나 성적 유혹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제들은 나처럼 가짜에 가깝도록 막 되먹은 신자와는 달리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대단한 신앙심을 지닌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이렇듯 도처에서 성 추문이 일어나거나 우리나라의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빨갱이조직까지 생겨나는 걸 보면 인간정신을 지켜줄 최후의 보루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암담해지는 기분이다.
교회가 이리도 타락해서야 어찌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겠는가.
물론 가톨릭 사제 모두가 이처럼 타락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아울러 어린이에게 성추행을 한 사제나 여신도에게 성폭행을 한 사제 또한, 성적문제만 있을 뿐, 인간적으로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완전히 타락했으리라 단언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단 사제서품을 받았을지라도 스스로 서약했던 섹스반납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의지가 약함을 알았다면 사제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이는 사제로서의 사회적 신분은 유지하면서 자신이 서약한 의무는 남몰래 파기하는 몰염치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요즘 우리 한국사회는 곳곳에서 사회해체 수준의 타락이 감지된다.
언젠가 울산 중부경찰서는 약 3년간 친딸을 성추행한 혐의로 최 모(47)씨를 구속하려고 영장을 신청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최 씨는 지적장애를 가진 초등학생 딸을 수차례에 걸쳐 몸을 만지고 변태적인 행위를 강요한 혐의를 받고 있다니 이래서야 어찌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따로 있다 하겠는가.
집에서 개를 기르다보면 제 어미든, 남매든, 딸이든 상관없이 올라타는 꼴을 보게 되는데, 도대체 세상 사람들이 모조리 자유를 구가求暇하는 착각도사錯覺道士가 되지 않은 바에야 어찌 이런 일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다.
내가 기독교 사상을 지녔기에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문명을 창조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만일 인간 사회에 문명이 없었더라면 짐승보다 더 추악한 삶을 살아야했을 터이고 이는 곧 인류의 멸망을 앞당겼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동물들은 배가 고프지 않으면 살생을 저지르지 않지만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어서 백만 석을 채우려고 가난한 이웃집 쌀 한 되박을 탐낸다지 않던가.
그뿐이라면 어쩌다가 있는 일이겠거니 하겠다.
자신의 직무를 이용하여 살인을 은폐한 경찰간부까지 나타나는 세상이다.
언젠가 자신의 아내를 엽기적으로 살해한 50대 경찰 간부가 범행 직후 근무 경험을 토대로 치밀하게 범행을 은폐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기사도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광주에서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 내 쓰레기더미에 유기한 김 모 경위(57)를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했다니, 과연 이런 일이 문명사회에서 일어나도 좋은 것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나는 굳이 하느님의 섭리를 내세워 성서말씀과 다르게 살기에 타락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성서나 불경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자연의 흐름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해답이 나온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에 그렇다.
내가 평소 소위 깨우쳤다며 온갖 기행을 일삼는 자들을 착각도사라 비웃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마치 자유라는 걸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기 기분에 맞으면 옳은 것이요 제 취향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비판하면서도 자신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른 도사들은 내가 상대한 바 없으니 어떠한지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만난 도사나부랭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하나 같이 ‘거침없다는 말은 제 편리한데로 한다’는 뜻이요, ‘자유롭다는 말은 제멋대로 한다’는 뜻이었었다. 그야말로 착가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혹시라도 어린이를 성추행한 사제나 제 친딸을 성추행한 아버지, 아내를 죽여 토막 내어 유기해 버린 경찰관들은 착각도사들과 마찬가지로 뭔가 착오를 일으킨 건 아닐지 모르겠다.
나는 우주의 섭리든, 인간의 삶이든 본래부터 자유롭게 나타난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리가 있다.
굳이 복잡한 수학적, 물리적 이론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인력引力이 있기에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른다거나, 살아있는 생물은 음식 등, 그 무엇인가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거나, 낮과 밤이 있다거나, 여하간 자연이 나타난 원리를 거슬러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우쳐서 자유를 얻은 도사들은 이런 자연의 원리를 내 멋대로 거스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순리를 역행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없다.
우리가 말하는 자유란 순리를 거슬러 제멋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집착執着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디에도 매인데 없이 거침없는 삶을 누리되 어디까지나 순리 안에서 하라는 것일 게다. 말하자면 동성애를 하거나 어린 자기 딸을 성추행하거나 아내를 죽여 토막 내거나 하는 짓들은 순리가 아니라는 거다.
무엇이 순리인가를 모른다면 자연현상을 보면 된다.
아무리 개라도 강아지를 범하는 개는 없다. 아들 개가 어미와 짝짓기를 하여 낳은 강아지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근친상간으로 아이를 낳는 일이 거듭될수록 유전인자는 열성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사촌 간에 결혼할 수 있는 풍속을 지녔던 서양 왕족들이나 일본 황실에서도 그 풍속의 폐해를 경험하고 변화시킨 지 오래다.
왜 그런가. 순리를 어겼기에 일어나는 폐해다.
우리 인간들에게도 질서는 있다. 그 질서는 도덕이나 풍속, 법률 등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질서는 무엇으로부터 나왔는가.
나는 오랜 세월 자신들이 속한 지역의 자연환경 속에서 사회를 이루며 살아오는 동안 자연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웠을 것이고 우리 지역에서는 이렇게 사는 것이 더불어 사는 데 좋다는 경험에 의해 도덕관념이 정립되어왔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는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혹은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깨우침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을 것이다.
아무리 도사 아니라 하느님일지라도 일단 나타남의 이 세계에 태어났을 때에는 이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예수님께서도 병자들을 고치거나 포도주를 만들거나 음식을 나타나게 하는 기적을 선보이셨지만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거나 미래를 예언하는 식의 초능력을 쓰지 않았다.
포도주를 만들거나 병자를 고치는 것도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는 우주의 섭리를 활용한 것일 뿐, 무슨 영계의 능력을 끌어서 사용한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다. 하느님도 타락한 자들을 단죄할 때, 자연현상으로 벌하지 않았던가.
내가 깨우쳐보지 못해서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도사들이 아무리 큰 깨우침을 얻었을지라도 몸이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이 있기에 공부하고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깨우쳤기에 우주의 섭리와 우리 인간들의 질서를 무차별 깨부순다?
그런 행위는 죽어서 귀신이 된 다음에 해도 충분하다. 아무리 육신통이 열렸기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가, 굶주림을 막을 수 있는가.
아울러 나는 사제면 사제답게, 일국의 외무장관이면 장관답게, 경찰관이면 경찰관답게, 아버지면 아버지답게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고 주장해왔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란 없다. 하지만 이 순간의 진리는 있다.
나는 대단한 그 무엇인가가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속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지하고 공감하는 상식이 진리라는 것이 내 믿음이다. 말하자면 숨 쉬어야 살고 먹어야 살며, 적당한 운동을 해야 건강하다는 것이 진리요, 도道라는 것이다.
생각은 어느 곳으로든 튈 수 있고 거침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튈 수 있는 생각도 육신을 지니고 있어야 느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가 높은 사람은 먹지 않고 산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중생들처럼 음식을 먹지 않을 뿐, 우주의 기를 먹든, 또 다른 뭔가를 먹든 어차피 외부의 에너지를 끌어온다는 점에서는 먹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 이유를 들어 지금 세상이 너무나 타락하여 소돔과 고모라 같은 파멸이 가까워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분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굳이 하느님의 벌로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들이 순리를 어기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 도를 넘치면 자연도 그만큼 피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연 스스로가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선택이 바로 지구의 멸망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타락한 인간이 멸종하고 수백억년 후 또 다른 생명체가 지구상에 나타날지 누가 알겠는가.
아마겟돈이 두려워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도사가 되기보다 사람으로 살자고 생각해왔을 뿐이다. 우리 인간들의 삶에는 수천 명의 도사보다 한 명의 인격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