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鞦韆詞) - 춘향의 말 1
- 서정주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놓이듯 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다시 밝은 날에 - 춘향의 말 2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 구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 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 때
나는 미친 회오리바람이 되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작은 여울을 마시듯
당신이 다시 그를 데려 가시고
그 훠-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습니다.
그리하여 또 한 번 내 위에 밝는 날
이제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꽃 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춘향 유문(遺文) - 춘향의 말 3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오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다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서 있을 거예요!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네이버 지식백과] 추천사(鞦韆詞) - 춘향의 말 1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2013. 11., 인문과교양)
작가소개와 작품해설
미당 서정주는 20세기 한국시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김광균·김동리·오장환 등과 함께 잡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는 등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첫 시집 『화사집』(1941)에서는 청춘기의 방황하는 정신을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이미지로 표현했고, 『귀촉도』(1948)에서는 동양적 영원성의 세계를 모색함으로써 정서적인 안정감을 획득했다고 평가된다. 세 번째 시집 『서정주 시선』(1956)에서는 불교적 세계와 결합함으로써 인간과 우주를 통합적으로 사유하는 긍정의 단계에 도달했는데, 이 시집에 수록된 「추천사」는 시집의 전체적인 성격과는 조금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초월에의 의지는 그가 초기부터 놓지 않았던 생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서정주는 ‘춘향의 말’이라는 부제가 붙은 세 편의 작품(「추천사」「다시 밝은 날에」「춘향 유문」)을 썼는데, 이 작품은 그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시는 1956년에 출간된 서정주의 세 번째 시집 『서정주 시선』에 실려 있지만, 1947년 10월 『문화』에 처음 발표되었다.이 시의 기본적인 발상은 전후․상하 운동을 반복하는 ‘그네’의 물리적 속성에서 시작된다. 시의 제목인 ‘추천(鞦韆)’은 ‘그네’라는 뜻이다. 시인은 춘향이라는 화자를 등장시켜 그네의 전후․상하 운동을 현실을 초월하려는 의지와 그 초월에의 의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실의 힘 사이를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춘향이, 즉 인간의 유한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춘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소설의 주인공이다.하지만 시인은 춘향이를 신분 문제나 정절 같은 소설적 문제의식과는 별개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존재로 그려낸다. 1연의 “머언 바다”, 3연의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은 ‘수양버들’, ‘풀꽃뎀’, ‘나비 새끼’가 상징하는 지금-이곳의 현실을 벗어나 춘향이 도달하기를 희망하는 이상적 세계이다. 이 이상적 세계는 결코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데, 이는 이 세계가 지금-이곳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만들어낸 추상적 세계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이 시에서의 이상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를 각각 ‘영원성’과 ‘유한성’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 경우 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쳐 오르는 그네는 영원의 형상이고, 다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그네는 유한성의 형상이 될 것이다. 영원을 지향하지만 항상 유한성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이 시는 그것이 인간의 운명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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