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포먼Carl Foreman의 각본으로 프레드 진네만Fred Zinnemann감독이 연출한 ‘하이눈’은 흑백으로 촬영된 정통 서부영화다.
마카로니 웨스턴macaroni-western에 길들여진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좀 지루하게 느껴지겠지만 이영화가 제작된 1952년 당시로서는 영웅적인 보안관을 그린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서부영화였었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running-time이 1시간 24분. 영화 역시, 극중에서 10시 40분에 시작해서 12시 4분에 끝날 만큼 극劇 속의 상황전개狀況展開와 일치시키는 철저한 리얼리즘realism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게리 쿠퍼Gary Cooper에게 그의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이 영화는 그 외에도 제25회 아카데미(1953) 주제가상, 편집상, 음악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제10회 골든 글로브(1953) 음악상, 여우조연, 남우주연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아울러 제5회 미국작가조합(1953) 각본상과 제18회 뉴욕비평가협회(1952) 감독상, 작품상 등을 수상할 만큼 수작秀作으로 뽑혔었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50년간 7명의 미국 대통령들이 가장 즐겨 보았던 영화가 ‘하이눈’이었다고 한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번이나 이 영화를 보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 영화의 무엇이 미국 대통령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알 수 없으나 줄거리가 단순명쾌單純明快하고 세팅setting도 서부극에 꼭 있어야만 하는 보안관 사무소와 술집, 그리고 교회 등으로 간단하다.
서부극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주제로 마을 주민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끝내 정의로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보안관의 생명을 건 결투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1870년. 서부의 작은 마을 헤이들리빌의 어느 일요일 아침.
세 명의 무법자들이 마을 기차역에서 누군가를 초조焦燥하게 기다린다. 12시 정오에 도착하는 기차에 이들의 보스boss ‘프랭크(밀러이안 맥도날드Ian MacDonald분)’가 타고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헤이들리빌 마을의 보안관 ‘윌 케인(게리 쿠퍼Gary Cooper분)’이 보안관직을 은퇴하여 아름다운 신부 ‘에이미(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분)’와 결혼식을 올리고 마을을 떠나는 날이다.
그럼에도 ‘밀러’는 5년 전 ‘케인’에게 체포되어 투옥된 복수를 하러오는 것이다.
이미 보안관직을 사임한 ‘케인’에게 더 이상의 책임은 없지만, 자신이 떠나면 ‘밀러’가 마을에 큰 피해를 줄 것이 분명하기에 ‘에이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함께 싸울 사람을 구하지만 주민들이 외면한다.
복수復讎는 어리석은 집착執着이다.
‘윌 케인’이 보안관직을 사퇴하고 아름다운 신부 ‘에이미’와 결혼식을 올리는 사이에 ‘프랭크 밀러’의 부하 ‘벤 밀러(쉐브 울리 Sheb Wooley분)’와 ‘짐 피어스(로버트 J. 윌크 Robert J. Wilke분)’, ‘잭 콜비(리 반 클리프Lee Van Cleef분)’등 세 명이 ‘헤이들리빌’ 마을에 나타난다.
이들은 마을의 역전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형기刑期를 마치고 자신을 교도소로 보낸 ‘케인’에게 복수하려고 돌아오는 두목 ‘프랭크 밀러’를 기다리는 것이다.
복수란 자신에게 쓰라린 변을 당하게 한 상대에게 그와 같은 변을 겪게 하는 일을 말한다. 즉 앙갚음이다.
그러나 ‘밀러’는 자신의 범법행위로 체포당했음에도 반성보다는 보복을 선택했다. 이건 일종의 승부사적인 집착이다.
집착은 ‘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는 ‘케인’은 1대 4의 결과가 빤히 보이는 싸움을 해야 한다.
마을을 위해 싸우려고 하건만 외면만 하는 마을사람들로 인해 좌절과 분노에 몸을 떨면서도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케인’이다. 마을을 위해 싸우려 했던 마음이 이제는 도망칠 수 없다는 사나이의 자존심으로 목숨을 거는 것이다. 그 또한 집착에 다름 아니다.
신부新婦 ‘에이미’와 한 때 사랑했던 ‘헬렌’이 함께 열차를 타러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도 ‘밀러’ 일당과 대결하려는 ‘케인’의 결심은 변치 않는다. 마을사람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홀로 네 명의 무법자들과 상대해야 함에도 흔들림이 없다. 과연 신념인가, 아니면 집착인가.
원한怨恨이 그만큼 깊어서일까. ‘열차에서 내린 ’밀러‘의 행동은 거침없다.
“준비 되었는가?”
“시키신 데로. 총은 여기 있습니다.”
“그럼 시작하지.”
즉각 ‘케인’에게 보복하기 위한 행동으로 돌입하는 ‘밀러’다.
다수를 상대할 때에는 작전이 필요하다. ‘케인’은 몸을 숨기고 한명 한명을 차례대로 상대한다. 서부극답게 뒤에서 쏘지는 않는다.
뒤에서 나타났더라도 일단 상대를 불러 얼굴을 마주보는 상태에서 발사하는 것이다.
결국 ‘에이미’의 도움을 얻어 ‘밀러’ 일당을 물리친 ‘케인’에게 남은 것은 마을사람들에 대한 깊은 실망뿐이었다.
이기적인 외면으로 일관했던 마을사람들은 차마 ‘케인’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한다.
복수심으로 자신들의 생명을 버린 ‘밀러’ 일당이나 도망갈 수 없다는 ‘케인’의 자존심이 비록 집착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삶은 그런 집념이 있기에 가치가 있다.
인간의 판단기준判斷基準은 이익利益이다.
‘케인’과 ‘에이미’는 서로 부부로 사랑하겠다는 맹세와 더불어 결혼식을 올렸지만 ‘밀러’ 일당이 나타남과 동시에 갈등이 생긴다. ‘프렝크 밀러’가 가석방으로 풀렸다는 전보가 도착한 것이다.
‘케인’은 시장과 동네 유지들에게 쫒기 듯 마을을 떠난다. 그러나 ‘케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야겠어.”
“왜요?”
“모두들 날 도망치게 만든 거야. 난 한 번도 도망친 적 없어.”
싸움을 피해 도주하기를 바라는 신부 ‘에이미’의 선택은 다르다.
싸움을 걸어오는 무법자를 피해 도망치는 것이 비겁하기에 당당히 맞서려는 ‘케인’의 선택과 남자의 자존심과는 상관없이 우선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은 ‘에이미’의 선택은 자신의 이익에 기준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케인’이 마을로 돌아오자 이발사 겸 장의사葬儀社 사장은 관부터 더 만들라고 아랫사람에게 지시한다.
장사속이다. ‘메트릭(오토 크러거Otto Kruger분)’ 판사부터 도망갈 궁리뿐이다.
“내가 판결했으니까. 자넨 왜 돌아왔나? 바보같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요. 대원을 모아야죠.”
“어리석은 일이야. 기원전 5년, 아테네 시민들은 폭군을 몰아냈어. 몇 년 뒤 폭군은 군대를 몰고 돌아왔지. 시민들은 성문을 열어줬고 대표들이 처형되는 걸 보고만 있었다네. 8년 전, 어느 작은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지.”
“당신은 판사잖아요.”
“그래. 판사노릇 오래했지. 그리고 더 오래 하고 싶다고.”
사람들의 이기적이고도 비겁한 속성에 대한 얘기다.
판사가 말했듯 사람들의 반응도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밀러’ 일당과 함께 싸워줄 대원을 찾는 ‘케인’에게 냉정한 마을사람들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기에는 ‘밀러’ 일당이 두려운 거다.
‘케인’의 보안관 조수 ‘하비(로이드브리지스Lloyd Bridges분)’는 위기를 맞아 ‘케인’의 보안관 자리를 차지할 욕심뿐이다.
“하비, 대원을 모아야 돼.”
“이젠 당신 일이 아니죠. 당신이 떠나면 내일까진 새 보안관이 없으니 내가 이곳 책임자가 되는 거죠. 왜 나를 보안관으로 임명하지 않는 거죠? 당신이 반대를 한줄 알았는데?”
“내게는 묻지 않았어. 아마 자네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는가 보지.”
‘하비’는 자기를 보안관으로 추천해주지 않으면 함께 싸울 수 없다며 보안관배지를 반납하고 ‘헬렌(커티 주라도Katy Jurado분)’이 있는 호텔로 돌아가 버린다. 공공의 질서보다는 개인의 영달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헬렌’은 ‘밀러’의 애인이었다가 ‘케인’과 사랑을 나눴던 여인이다. 지금은 ‘하비’와 사귀고 있지만 보안관 조수로서 위기에 처한 ‘케인’을 돕지 않는 ‘하비’의 인간성을 혐오한다.
그러나 밀러를 체포할 당시 호텔주인으로서 ‘케인’을 도왔던 ‘헬렌’ 역시 급히 호텔을 정리하고 마을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위기의 순간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다.
‘에미미’는 자신보다 공명심에 몰입하는 ‘케인’에게 실망하여 홀로 마을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열차시간이 되기까지 ‘헬렌’의 호텔에서 기다리게 된 ‘에이미’에게 바텐더가 묻는다.
“정오 열차로 떠나나요?”
“네.”
“케인은 안 떠나고요?”
“네. 왜요?”
“매우 재미있군요. 전 뭘 준다 해도 정오까진 이곳을 안 떠납니다. 정말 볼만한 구경꺼리니까요.”
위험에 처한 남편을 두고 홀로 도망가는 신부新婦를 비웃는 말이지만 비폭력주의 퀘이커교도Quaker敎徒인 ‘에이미’로서는 폭력을 피할 수 있음에도 ‘밀러’와 정면대결을 벌이려는 ‘케인’이 섭섭하기만 하다.
이 또한 자신의 모습을 만드는 삶의 한 과정이다. 바텐더도 ‘케인’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케인’이 마을의 질서를 잡기 이전에는 ‘밀러’로 인해 흥청망청했던 호텔이 한산해졌기 때문이다.
드디어 한판승부가 시작되고, 첫 총성이 울리자 열차에 탑승했던 ‘에이미’는 자신도 모르게 뛰어내려 마을로 달려간다. 퀘이커교도로서의 양심도, 폭력을 혐오했던 가치관도 이 순간 모조리 사라진 것이다. ‘에이미’의 선택은 사랑하는 남편 ‘케인’이었다.
삶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다.
정오正午에 도착하는 열차로 마을로 돌아오는 ‘밀러’를 피해 마을을 떠나라는 ‘헤더슨(토마스 밋첼Thomas Mitchell분)’ 시장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안녕을 위해 ‘밀러’를 물리치고 떠나려는 ‘케인’과 싸움을 피하고 떠나자는 ‘에이미’의 주장이 충돌한다.
“그놈은 아주 거칠어서 또 말썽을 부릴 거야.”
“이젠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죠.”
“내가 체포했는걸.”
“그건 보안관의 임무였고 이젠 후임자가 오잖아요.”
“후임보안관은 내일에나 올 테니 내가 있어야 해. 임기가 끝났건 말았건 상관없는 일이오.”
“영웅이 되려는 건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영웅이 되려는 것도 아니고 좋아서 이러는 것도 아니요. 평생을 '밀러'에게 쫓겨 다녀야 한단 말이오?”
비록 퇴임했지만 보안관으로서 공공의 안녕을 먼저 생각하는 ‘케인’과 개인의 행복을 우선 생각하는 ‘에이미’다.
보안관이란 타고나는 것일 수도,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보안관이면서도 비겁한 자는 수없이 많고 보안관이 아니더라도 정의로운 사람 또한 많다.
분명한 것은 금생에 태어나서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모처럼 지원했던 사람도 지원자가 없다는 얘기에 꽁무니를 빼버리고 위기를 틈타 급매물로 내 놓은 호텔을 덤핑으로 구입하는 데만 관심 있는 마을 지도자들이다.
‘밀러’를 피하느라 급히 떠나버린 판사나, ‘밀러’를 상대로 힘을 합쳐 싸울 마음이 없는 마을사람들이나, 기어코 폭력을 행사하고자하는 ‘케인’을 버리고 홀로 떠나려는 ‘에이미’ 등 제각각 자신의 모습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벤’이 ‘밀러’를 기다리던 중, 잠시 술집에 들리자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반기듯 환호하는 동네사람들이다. 영리한 것이다.
‘케인’ 홀로 ‘밀러’ 등 세 명의 악당을 당해낼 수 없다고 믿기에 새로운 줄서기를 하는 것.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비겁한 존재로 정립해 나간다.
떠나려는 자신을 막는 ‘하비’에게 ‘헬렌’이 하는 말이다.
“내가 왜 떠나는 줄 알아? 앞으로 30분 후면 케인은 죽어. 그러면 이 마을도 죽어. 난 홀몸이고 살고 싶어.”
그나마 ‘헬렌’은 포기가 빠르다.
자리에 연연하는 ‘하비’와는 근본부터 다르다. 만일 ‘케인’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줬더라면 ‘에이미’나 ‘하비’ 혹은 동네사람들과는 다르게 용감하게 ‘케인’을 위해 목숨 걸고 나섰을 강단이 있는 여자다.
이 또한 ‘헬렌’ 나름대로 타고난 성품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늘 명분을 만든다. 그 목적이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포장하고자 하는 것이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든, 자신이 옳다고 믿고 싶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교회에서 대원을 모집하려 했을 때, 나서려는 사람들을 가로막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불유쾌한 일에 끼어들기 전에 우선 무슨 일인지나 알고 갑시다. 우선 한 가지, 케인은 지금 보안관이 아니잖소? 이것은 케인과 밀러 둘의 일일뿐이오.”
나서기 싫은 자가 남들이 지원하는 것까지 가로막아 지신의 비겁함을 정당화 시키는 장면이다. 아울러 ‘케인’이 보안관이 아니라는 논리에 너도나도 지원을 취소한다. 판사가 말했던 아테네 시민들과 다름없는 비겁함이다.
‘케인’을 도와 함께 싸우겠다고 나선 유일한 사람이 미성년자다. 어리기에 순수하다. 순수하기에 ‘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
그러나 그 아이조차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평생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가는 길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수없이 많은 갈등을 일으키며 새로운 선택을 하게 마련이다.
‘에이미’는 케인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게 ‘헬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케인’이 떠날 수 있게 설득해 달라는 ‘에이미’에게 ‘헬렌’은 이렇게 말한다.
“나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지난 1년간 서로 말도 해보지 않았어요. 저도 당신과 같은 기차로 떠나요.”
“그럼 그인 왜 남아있는 거죠?”
“모른다면 설명해줘도 이해 못해요. 당신은 뭐죠? 그렇게 그이를 떠나다니. 총소리가 그렇게 무서워요?”
“총소리가 무서운 건 아니죠. 아버지와 오빠도 총에 맞아 죽었죠. 정의의 편이었지만 소용없었어요. 그래서 전 퀘이커교도가 됐고 옳건 그르건 싸우는 건 반대예요!”
‘에이미’가 이기적이기에 ‘케인’을 떠나려는 건 아니다. 자신의 쓰라린 경험이 또 다른 극단적인 가치관을 지니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가치관은 상황에 따라, 또는 깨우침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밀러’ 일당과의 싸움에서 한 명을 사살했고 '밀러'를 죽일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비폭력주의자 ‘에이미’였으니까.
좋은 영화에는 리듬이 있다. 긴장緊張과 이완弛緩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이 눈’ 역시 마찬가지다. 정오를 향해 치닫는 시계바늘과 어느 순간 기적汽笛소리가 마을 사람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들려온다. ‘에이미’, ‘헬렌’, 시장, '케인'과 직간접적直間接的으로 엮여있는 사람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는 기적소리는,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밀러’의 부하들에게는 복수할 수 있는 통쾌한 기회로, ‘케인’에게는 장렬한 죽음의 전주곡으로, ‘에이미’와 ‘헬렌’에게는 안타까운 고통으로, 마을사람들에게는 양심의 가책으로……. 그런 군상들의 긴장된 모습들을 빠른 컷cut으로 연출한 감독의 감각이 돋보인다. 차라리 기적소리를 들으며 유서遺書를 쓰는 ‘케인’이 가장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비폭력을 추구하는 퀘이커교도인 ‘에이미’가 적을 사살했을 때,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수작秀作이었다. 아울러 미국 대통령들이 이 영화를 왜 좋아했는지 이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