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격은 괴벽스럽다.
그 누구보다 강하게 보이다가도 별것 아닌 작은 일에 터무니없이 무너지기도 했는데, 누구라도 화를 내야할 상황에서는 바다처럼 넓은 이해력을 보이는가 하면 정작 아무도 문제 삼지 않을 작은 일에 벌컥 화를 내서 친구들이나 주위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기 일쑤였었다.
아마도 속이 좁은 이유도 있겠지만 본능적으로 예민한 성품을 타고난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너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녀석은 세상에 없을 거다!”
반항적인 나를 훈육하시느라 몽둥이찜질을 하시다가 지치면 입에 달고 하시던 아버지 말씀이다.
그런 나도 나이 칠십에 글을 읽거나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감상에 빠져 순식간에 10대 소년시절로 되돌아가버릴 만큼 정서적이기도 하다. 말했듯이 나는 괴벽한 만큼 예민하기도 한가보다.
그래서인지 이젠 지난 일들이 추억으로 닥아 온다.
암으로 입원했던 병원으로 문병 온 형이 했던 말이 그 옛날 진해해군병원의 기억과 맞물려 아련한 아픔으로 기억된다.
“죽지 마!”
벌써 형에게 병원으로 찾아와 걱정하게 만든 것이 이번이 두 번째인가.
진해 해군병원에 입원했을 때. 피부이식수술皮膚移植手術을 받고 마취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는 나에게 형이 면회를 왔었다. 형도 맹호부대로 파월됐다가 귀국하는 길에 부산에서 가까운 진해부터 들른 것이라고 했다.
병동으로 돌아온 후, 보조간호원이 물병이며 소변기를 비우느라 부산을 떠는 소리에 마취에서 깨어나며 의자에 앉아 있는 형을 보았을 때, 나는 환상을 보는가 싶었었다.
“무사히 귀국했네?”
눈물이 고였었는가, 갑작스런 내 목소리를 듣고는 서둘러 눈을 비비고 태연한 척, 얼굴을 가꾸는 형이었다.
“녀석이……, 아파 보이는구나.”
“피부이식 수술이었는데 뭘. 부산에서 바로 온 거야?”
형은 동생면회를 왔으면서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말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것 같았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상상을 초월하는 동생의 부상을 확인하면서 받은 충격이 그만큼 컸을 터인데…….
“우리 부대 PX에서……, 준비해 왔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야, 이거 엄청 비싸겠는데? 이런 고급 시계를 내 것으로 해도 괜찮을까? 하느님이 질투하는 것 아닌지 몰라.”
금장金裝 쎄이코 시계를 뜯어보며 감탄하는 내게 형이 침울하게 말했다.
“그래도……, 살아와 줘서 고맙다. 선물이라도 고를 수 있게 해줘서. 네 친구 유성은 전사했으니 선물도 고를 수 없었잖니.”
형은 나와 같은 중대에서 근무하다가 바탄캉에서 전사한 동네친구를 생각했는가 보다.
하긴, 그 친구 역시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 형에게는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동생이나 다름없을진대……. 우리가 살아 돌아왔다 한들 해병대 소총소대 대원에게 시계 살 시간이나 있었겠는가.
간호장교가 수술실에서 갓 돌아온 나의 수술성공을 축하한다며 침대 머리맡 꽃병에 활짝 핀 장미 두어 송이를 꽂아주었다. 마치 장미를 처음 본 사람처럼 멍청하게 응시하는 나를 바라보던 형이 질문했다.
“장미가 아름답구나.”
“아름다워?”
“……?”
“고등학교 때부터 지닌 의문인데……, 꽃은 식물의 성기性器야.”
체온계를 확인하던 간호장교와 질문했던 형이 동시에 놀라고 있었다. 꽃을 성기로 비유한 내 정신 상태를 순간적으로 의심했던가 보다.
“나는……, 다리를 잃은 것이 세상살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은 몰라. 처음에는 뭔가 소중한 걸 잃었다는 상실감도 없지 않았어. 그러나 인간에게 다리가 그렇게 중요할까? 아니야. 사지四肢중에 하나가 없어진 것뿐이지. 팔다리가 온전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그 하나쯤 없어도 살 수 있음을 모르는 거야. 성性도 마찬가지야. 꽃이 예쁘다고 찬사를 보내는 자들이 성기를 치부恥部라고 표현하지. 같은 성기를 놓고도 보는 눈이 다른 거야. 암캐의 성기를 핥는 수캐에게 치부라는 개념이 있을 리 없잖아. 정작 성기를 치부라고 말하는 인간들이 좋은 향기로 아름답게 꾸며놓은 식물의 성기에 매료된다니, 이거 우습잖아?”
형과 간호장교의 눈에 당혹스러운 그 무엇이 지난 것처럼 보인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만큼 마음이 넓지 못한 나였다.
“속고 있는 거야. 눈에 보이는 겉모양에 혼을 뺏겨 진실을 보지 못하는 거야. 태어나면서부터 억지로 주입시킨 도덕이니, 질서니, 법이니 따위의 지식들이 오히려 진리를 볼 수 없게 만든 거야. 난 깨어나고 싶어. 내가 지닌 모든 지식, 선입관, 기준들을 깨버리고 싶어. 그래서 진짜를 보고 싶어.”
한참이나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든 형이 안타까운 마음을 내보였던 것일까,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녀석……, 우리가 밥 굶을 만큼 가난했지만, 장학금 받아 대학에 진학했으면서도 입대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저 가난이 나의 숙명이려니, 굶주릴 때는 사람이란 이렇게 사는 것이려니, 아버지에게 매 맞을 때는 자식들은 모두 이렇게 크는 것이려니, 그저 그렇게 살면 편할 터인데……. 어째서 너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 하느님이 그렇게 살라 했으면 그렇게 살면 될 것이요, 세상이 이용하자 하면 이용당해 주면 될 일이지, 꽃을 일컬어 식물의 성기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까다로운 성품이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듦을 왜 모르는 거야. 그저 그렇게 살아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거저 알아지는 걸……, 어째서 그리도 치열하게 세상과, 하느님과 승부를 벌여야 하는 거니?’
그렇게 말을 남기고 집을 향하던 형의 잔상殘像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말기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서도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퇴원해버린 내게 ‘죽지 마!’라며 돌아서는 잔상이 기억되는데…….
부상당한 이후, 나이 오십이 되기까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었다.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활용해야 한다는 섭리를 알 것 같았기에. 눈물을 흘리기보다 이를 악물어야 했기에. 그래야 남의 동정으로 살아야 하는 불구자의 저주를 벗고 스스로 일어선 당당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런 자존심이 클러치clutch를 조작하는 왼쪽 다리에 의족義足을 착용했음에도 굳이 오토 미션automation이 아닌 스틱차량을 운전하기를 고집했었던 것일까. 나 자신의 불구를 인정하되 결코 그 불구에 지지 않겠다는 오기傲氣…….
그래도, 그 때 형이 남긴 그 말의 이면을 위장에 말기 암을 단 나이 70을 넘긴 지금에서야 알아차리고 있는 셈이다. 무엇인가 애타게 찾아 헤맸던 젊은 날의 그 목마름에서 비로소 삶의 긍정적인 한 단면이나마 느끼기 시작한 것일까.
누군가 ‘애써 도를 알려고도 하지 말고 애써 모르는 척도 하지 말라.’라는 말을 했다더니, 청소년시절, 가슴시리 게 좋아했던 노래에 취해 먼 옛날의 나로 되돌아 갈 만큼이나, 지금의 나는 이미 괴벽했던 젊은 시절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알아차려지는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며 그 순간들을 즐기면 되었을 것을…….’
만권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런 느낌을 얻는 건 아니다. 단 한 줄의 글, 단 한 장의 그림, 어느 순간 들려오는 노래 한 곡, 감동이란 이 순간, 바로 지금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오늘의 나는, 삶의 의미를 그토록 치열하게 찾아 헤맸던 과거가 있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젊은 날을 허망한 무엇인가를 찾느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허비했다 치더라도 그것이 이 순간의 나를 만들기 위한 과정인 다음에야…….
한때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조물주로부터 노예근성을 타고난다고 생각했었다. 하느님에게 복을 빌 수밖에 없는 그런 근성을…….
「발바리와 진돗개, 그리고 늑대를 보라. 발바리는 영리하기 이를 데 없는 아부 솜씨로 주인에게 먹이를 얻는다. 진돗개의 경우는 그나마 떳떳해서 주인에게 목숨 바쳐 충성하는 대가로 먹이를 얻는다. 발바리보다는 당당한 삶이라 할 것인가. 그러나 늑대에게는 먹이를 주는 주인이 따로 없다. 스스로 눈 덮인 산야를 누비며 먹이를 취할 뿐이다. 늑대는 그래서 자유롭고,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된다.」
기왕에 살아남아야 할 것이라면 차라리 늑대가 되자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절대자의 섭리 안에서 가능하므로 발바리처럼 주인을 섬긴 대가로 먹이를 빌지는 않겠다며 평생을 사서 고생해오지 않았던가.
하느님이 내게 가난과 불구의 저주를 내렸다 하더라도, 설혹, 그분께 아부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에게 먹이를 비는 발바리는 되지 않겠노라고. 그리하여 노예 아닌 당당한 존재로 서겠노라고.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나의 자존심이라 생각했었기에…….
그러나 그 역시도 오늘의 나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살림마을의 장길섭 목사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참으로 나를 일깨워준 말씀이었다.
‘삶은 풀어야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할 신비다.’
이 말 한 마디가 그동안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아두었던 논리를 허물어 버리는 계기가 되었었다.
그런데 나는 숙제하듯, 시험 보듯 살았었나 보다. 그래서 그 오랜 세월을 매사에 전투하듯 도전해왔던가.
남들 눈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예의범절과 신중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으로 보였을지라도 나이 오십에 이르기까지 전쟁터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나를 발견하게 되더라는 거다. 죽을병이라는 암에 걸리고서야(별로 암 때문에 신경 쓰이는 건 아니지만) ‘인생이라는 게 그런대로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거구나.’ 비로소 그렇게 느껴지다니…….
세상을, 때로는 하느님을 향했던 원망과 원한들을 원한으로 갚을 수 없음을 알아차린 것도……, 그 모든 것들을 원한이라 생각했을 뿐, 차라리 원한이라 생각했던 그 것들을 나를 단련시켜주는 스승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나 홀로 고군분투했던 전쟁터의 병사처럼 경직된 내 생각으로부터 해방되고서야 얻을 수 있었던 알아차림이었다.
‘이렇듯 괴벽하기 이를 대 없는 남편을 따라왔을 집사람이 참으로 힘겨웠겠구나. 정말이지 고맙구나.’
‘모든 일을 전투하듯 처리하는 이상한 상사上司를 모시느라 직원들이 마음고생 많았겠구나. 불평 없이 열심히 일해 줘서 고맙구나.’
‘괴벽한 나를 내치지 않고 그 오랜 세월 함께 해준 친구들이 고맙구나.’
이렇듯 반성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걸 보면 내가 변화한 건 분명하다.
‘추억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더니 그리도 고통스러웠다 여겼던 청소년시절과 불구된 아픔들이, 전쟁하듯 살았던 치열했던 세월들이 이렇게나 아름답게 느껴지다니……. 역시 삶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요,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하느님은 사랑이심이 분명한가 보다. 격렬했다 되돌아보는 나의 과거 또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었음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