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아예 TV를 보지 않아서 여전히 사극을 방영하는지 알 수 없지만 대중이 쉽게 접하는 영화와 방송드라마, 그 중에서도 사극에 작가 나름의 재해석이 문제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재해석이라는 것이 당시에 있었던 사건을 현대적 관점觀點으로 해석하여 등장인물登場人物들에게 옳고 그름의 낙인烙印을 찍어버리는 식인데, 혹시라도 이런 풍토가 만연蔓延하기 시작한 시점이 우리 사회에 이념적 갈등이 심화深化되면서 부터인 것은 아닌지, 씁쓸해지는 기분이다.
나 역시 순수한 의미에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해석이라면 꼭 나쁘다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수많은 이유 중 하나가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앎으로써 사회통합을 위한 최소한의 가치관價値觀을 지니기 위함이요, 보다 나은 오늘과 내일을 위해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데 있다면 결코 역사적 재해석이 나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재해석에 순수하지 못한 불순한 동기動機가 끼어들었을 경우다.
불순한 동기……, 그건 참으로 위험하다.
특히 역사적 사실을 재해석할 때 당시 풍습이나 모럴moral, 가치관, 등등을 재해석하는 자의 목적에 맞도록 조작造作했을 경우 우리의 역사 자체가 부정되고 부정된 만큼 우리의 정신이 오염汚染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가 오염된다함은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게 되고 그로 인하여 사회구성원 간의 갈등葛藤이 심화될 것이며 결국 우리 사회의 와해瓦解를 불러올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종북세력들이 그토록 그악스럽게 우리 역사를 왜곡歪曲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둔갑시키느라 광분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KBS에서 방영된 ‘용의 눈물’ 을 예로 들어 보자.
이 드라마를 예로 드는 것은 인기드라마였기에 많은 분들이 시청했으리라 믿기 때문일 뿐, 이 드라마의 연출자가 이념적 이유로 당시 상황을 재해석했으리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지금의 잣대로 어느 쪽을 유리하게 그렸기에 예를 든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용의 눈물’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던 편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러나 정도전은 신권주의臣權主義를 바탕으로 시대를 앞서간 개혁改革의 주인공이며 이를 방해하여 진일보할 수 있었던 우리의 역사를 왕권주의王權主義로 되돌린 자가 권력욕에 눈먼 이방원이었다……?
혹시라도 그런 느낌을 받은 시청자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였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기 위해 이 드라마를 거론한 것일 뿐임을 밝혀둔다.
나는 정도전이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세간世間의 평가에 이의異議가 없다.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와 함께 권력을 잡은 정도전은 토지제도를 개편했고 성종시대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초가 되는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을 만든 사람이니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학자며 정치가였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리라.
그러나 개혁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정도전도 당시의 가치관으로 보면 자신의 권력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순리를 저버린 파렴치한 자로 볼 수도 있다.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이 있는 방원 형제를 재껴두고 자신의 소생인 나이 어린 방번芳蕃과 방석芳碩을 세자世子의 위位로 올리고 방원을 척살할 음모를 꾸밀 때 이에 동조, 지휘했던 자가 정도전이 아니던가.
방원형제를 버리고 나이어린 방석을 세자로 책봉冊封할 것을 주장한 그의 무리수는 왕권강화王權强化를 목표로 삼은 방원형제 중 하나가 세자로 책봉될 경우 신권의 꿈이 날아갈 것을 우려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와 대립했던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에 의해 운영되는 중앙집권정치中央集權政治를 추구했다.
여전히 고려에 충성하는 유민들이 존재했던 조선朝鮮 초, 당시의 불안했던 정국을 감안한다면 강력한 왕권정치를 추구한 그의 정책을 비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비롯한 형제들을 척살할 음모를 알게 된 이상 정도전은 살려두어서는 안될 존재였으리라.
방원은 태종이 되고서도 자신의 처남들을 비롯한 외척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말았다.
역시 강력한 왕권정치 추구의 한 맥이었겠지만 이것이 조선 최대의 명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을 탄생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었음을 부정하는 사가史家들은 거의 없다.
지금의 잣대로 당시 정도전과 이방원의 정책을 재단裁斷해 본다면 좋은 의미에서 정도전의 신권주의는 지금의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권력구조일 수도 있다.
왕자王子라 해서 누구나 성군聖君이 된다는 보장이 없고 보면 객관적으로 능력이 인정된 재상宰相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백성을 위해 보다 안전할 수 있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공화정共和政이 일반적인 정서가 되어 있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왕권을 강화한 이방원보다 정도전에게 더 큰 점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정서와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결론이 가능해진다.
왕의 통치가 일반적이던 그 시대에 군주君主가 무능하여 재상에게 권력이 집중됐을 때 정변政變이 일어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발호跋扈했으며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졌던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들이 아니던가.
개혁 또한 만능이 아닌 것이, 많은 충신忠臣들이 있었음에도 공민왕의 신임을 얻었던 신돈辛旽의 개혁정책 실패로 조정의 갈등이 깊어져 고려의 멸망을 앞당긴 셈이라면 이를 익히 보았을 이방원이 백성을 위해서라도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터.
공화정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思考에 과연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 판단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잣대로도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 중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터에, 어찌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에 옳고 그름을 판별하겠는가.
만일, 지금의 잣대로 정도전은 위대한 개혁주의자요, 이방원은 우리 민족의 정치적 발전을 가로막은 포악한 군주였다고 평가한다면 분명하게 말해서 그것은 옳지 못한 판단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考慮하지 않은 채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더라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중국을 능가하는 강국일터, 따라서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민족 반역자라고 평가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제대로 된 고증考證도 없이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흥미위주로 역사적인 인물들을 모욕侮辱하는 것도 문제지만 진정 우리가 걱정해야할 큰 문제는 종북세력들의 역사왜곡에 예술가들이 동참했을 때다.
예술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떤 논리든 반대논리가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술은 논리와 다르다. 예술작품을 대하는 독자, 혹은 관객들은 감동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가의 의도에 세뇌洗腦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드라마‘용의 눈물’작가가 정도전을 종북세력의 대표적 인물로, 이방원을 보수주의자로 설정하고 역사적인 상황을 정도전에게 동정同情이 가도록 풀어나갔더라면 그 드라마를 보는 많은 이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북세력이 옳다는 식으로 세뇌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논리로 설득하는 것 보다 감동으로 이끌어가는 예술작품이 훨씬 폭발력을 지닌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김일성 일당이 문화예술을 체제선전의 도구로 유효적절하게 이용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전문가들 모두가 고개를 흔든 북한에서 제작한 무슨 공연물을 보고는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흥분했던 골빈 정치인들이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도 이념의 도구로 문화예술을 이용하는 세력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설마 종북세력들에게 세뇌 당해서 그런 작품을 만들기야 했겠느냐만, 사극史劇은 아니지만 ‘비무장지대’와 ‘괴물’류의 영화들이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일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예술활동文化藝術活動을 공권력으로 다스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간의 드높은 정신세계를 다루는 예술활동을 권력으로 좌지우지하는 일은 세습정권世襲政權을 유지해온 김일성 부자나 할 일이지 민주정부에서 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예술가의 허울을 쓰고 암약하는 순수하지 못한 자들의 활동을 단속하는데 한계가 있다.
예술가의 허울을 쓴 자들 중 어떤 자들이 오염됐는지는 나도 모른다. 또 오염의 척도를 어떻게 가려야 할지 역시 모른다. 과연 우리가 문화예술을 악용하는 종북세력들에게 오염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되는 것일까.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만큼 얻어먹고서도 여전히 적개심을 버리지 못하는 김일성 일당이 없었더라면 아무 상관도 없었을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모든 국민이 비평가로 나설 수도 없고,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지는 오늘의 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