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주책이라 하겠지만 은퇴한 이후 평창 산골자기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한 가지 취미가 생겼다. 설거지하는 재미다.
집사람은 설거지를 제일 싫어한다. 어린 시절부터 친정어머니 가사家事를 도운이래, 나이 육십 넘기까지 쉴 새 없이 설거지를 하다 보니 이젠 지긋지긋하다던가.
그건 갈수록 개수대에 밀린 설거지감이 늘기만 하는 것을 봐도 집사람 기분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어찌 설거지뿐이랴. 살림살이 자체가 지겨울 수도 있겠지.
“그렇기도 하겠네. 그래도 그, 뭐냐? 설거지를 귀찮은 일이라 생각하니까 싫은 거 아닌가?”
“그렇게 좋아 보이면 당신이 해 보구려.”
그래서 설거지라는 게 내 담당擔當이 되었는데 너무나 즐겁게 설거지를 하는 내 모양이 집사람에게는 불가사의였던가 보다.
“흥! 한 때, 잘나간다던 당신도 농사일을 하더니 별 수 없는가 보네. 그렇게 그릇 하나하나를 정성 드려 닦을 양이면 시간 잡아먹긴 좋겠수.”
백발이 성성한 중늙은이가 설거지 하는 꼴이 한심해보였는지 비꼬기를 잊지 않는다.
집사람이 그렇게 비꼬는 것으로 보아 평생을 설거지를 하며 늙어왔지만 스스로 하는 일에 철학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게 마련이다. 철학이 없는 일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의미 없는 일을 하려면 손쉽게 지겨워질 수밖에 없을 거다.
설거지 하는 사람이 위생이 어떻고 저렇고 하는 의미를 붙이는 것도 중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설거지하는 내 마음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
접시 하나, 공기 하나, 냄비 하나, 그 모든 식기들이 내게는 우주宇宙로 보이고, 자연현상自然現象으로 보이고, 대한민국으로 보이고, 우리 마을로 보인다.
세상사 모든 더러움들이 내 손에 의해 정갈하게 씻겨나가는 환상이나마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설거지 할 때라는 걸 집사람은 모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깨끗해지는 접시와 더불어 세파世派에 오염汚染된 내 마음도 닦여진다는 것이다. 그건 아주 간단한 원리다. 오염된 식기처럼 내 마음을 보면 되는 일이다.
그건 결국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분이 있을 거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은 생각에서 시작된다. 일이란 다시 말해 창조創造다. 하느님의 천지창조天地創造만 창조가 아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만들어 내는 모든 일들이 창조라는 거다.
모든 생각은 말로 옮겨간다. 성서에서도 말했다.
‘구하라. 받을 것이요, 말하라. 이루어질 것이다.’(마태 7:7)
모든 창조는 행동에서 나타난다. 결국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주했다.’(요한 1:14)라는 말씀과 다름 아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은 생각은 자기만의, 즉 한 차원에서만 창조된다.
생각하고 말한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창조를 이룬다. 이웃의 마음을 움직이는 창조. 생각과 말을 행동으로 실천實踐하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성실하게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일도 성실하게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작다고 생각하는 일이 곧 우주의 이치를 실현하는 일이요, 작은 일을 모르는 자가 큰일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73년간의 세월을 살다 산골에 파묻히는 경험을 하고서야 알아차린 섭리인 셈이다.
아울러 내가 무엇을 원하든 그 일을 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하여 생각만 하는 건 치졸한 한 차원의 위로만 얻을 뿐이다.
설거지를 시작한 이상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주어지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에서도 늘 깨어있으라(데살 첫째 5;6)고 말씀하신다. 즉 설거지를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성실하게 설거지를 하는 한, 세상 사람들이 나를 뭐라 평하든 흔들릴 이유가 없다. 그런 마음을 잃지 있는 한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하든, 내 삶은 감사感謝로 가득할 것이다.
최근 위장에 암을 달고 투병하면서도 설거지만큼은 여전히 내 담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