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시대부터 21세기에 이르도록 인류는 종교를 믿어왔다.
그것이 미신이든, 현대종교든 내가 보는 시각으로는 혹세무민에 다름 아닌 망발이 많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종교의 참혹한 횡포橫暴를 그린 영화가 있다.
1986년 영국에서 제작한 ‘롤랑 조페Roland Joffe’ 감독의 ‘미션’이다.
이 영화는 1750년,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브라질 국경지역에서 일어난 실화를 소재로 만든 영화다.
당시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획득하는 과정에 어떻게 종교를 이용하였으며 종교는 어떻게 권력과 결탁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원주민 과라니족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벌이는 선교사와 교회의 대립을 통해 사랑과 정의가 무엇인가를 심오하게 그린 종교영화로서 1986년 제39회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제12회 LA 비평가 협회 촬영상(크리스 멘지스)을 수상하였고 제40회 영국아카데미 편집상(안소니 아스퀴스), 음악상(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 남우조연상(레이 맥아널리Ray McAnally), 제59회 미국 아카데미 촬영상 등을 수상하였다.
예수회의 두 신부,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분)’ 신부와 ‘로드리고(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분)’는 기독교적 사랑과 사회적 상황의 기로에 선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영토 분쟁 속에 있는 과라니 부족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사제들이다.
이들이 과라니 부족들과 함께 피땀 흘러 이룩한 지상낙원은 예수회와 포르투칼의 관계를 염려한 교회에 의해 존속자체가 위협받는다. 과라니 족의 보급자리가 포루트칼 왕의 식민지에 편입되자 원주민들에게서 떠나라는 명령이 하달된 것이다.
노예상인이었다가 ‘가브리엘’ 신부의 감화를 받아 가톨릭에 귀의 신부가 된 ‘로드리고’는 원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대항을 택한다.
평화주의자 ‘가브리엘’ 신부 역시, 무기를 쥐지는 않지만 마을을 떠나라는 교회의 명령을 거부하고 무기 없이 싸움에 나선다.
마침내 스페인 군대의 막강한 병력 앞에 속절없이 쓰러져가는 원주민과 사제들. 그리고 이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파라다이스Paradise는 불길로 휩싸이고 만다.
진정한 신앙信仰은 순교殉敎를 불사한다.
추기경이 교황에게 보네는 서신을 작성하는 장면이 지나면 과라니 부족이 가톨릭사제를 ‘쥴리안’을 십자가에 묶어 폭포에 떨어뜨려 죽이는 장면이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목숨 걸고 원시종족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사제들의 순교다.
순교한 ‘쥴리안’의 돌무덤을 만들어 준 사제들 중 ‘가브리엘’ 신부는 목숨 걸고 폭포를 거슬러 과라니족 마을로 찾아간다.
그는 경계하는 과라니 부족에게 오보에 연주를 들려준다. 그 유명한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의 주제곡 ‘On Earth As It Is Heaven’이다.
음악은 만국 공통의 영혼의 언어다. ‘쥴리안’에게는 적대적이던 과라니 부족들도 감미로운 음악에 매료되어 ‘가브리엘’ 신부를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예수교 신부들은 음악을 통해 선교를 했고 결국 과라니 부족은 하느님의 축복을 믿게 되었고 예수의 대속희생을 알게 된다.
동생을 죽인 죄의식으로 죽음을 생각하다가 ‘가브리엘’ 신부와 원주민들에게 감화를 받아 속죄한 용병이자 노예상인 ‘로드리고’까지 합류하여 원시적인 생활을 하던 원주민들과 함께 집을 짓고 악기 생산 공장을 만드는 등, 살기 좋은 마을을 건설하는 한편 교회를 짓는다.
“데려와 줘서 고맙소.”
“과라니 부족들에게 감사하시오.”
“어떻게요?”
“이걸 읽어보시오.”
‘로드리고’가 성서를 처음 접하는 순간이다.
진심으로 속죄한 다음의 영혼은 깨끗하다. 걱정스러워 하는 ‘가브리엘’ 신부를 굳이 설득하여 사제서품을 기어이 받게 된 것도 신앙의 진실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형제 ‘로드리고’를 위해 기도합시다. 주 그리스도여! 속세의 유혹誘惑을 끊고 노동과 겸손의 미덕을 익히도록 하소서. ‘로드리고’를 충심으로 맞아들이는 이때, 그를 축복하여 주소서. 관대하며, 노동의 대가를 바라지 않게 하시며, 보답 없이 봉사하게 하시고, 당신만을 위해 일하게 하소서.”
‘로드리고’가 수도사가 되는 의식을 할 때, ‘가브리엘’이 했던 이 기도가 진정한 신앙의 정신이 아닐까. 그러나 속세의 유혹을 끊기, 노동과 겸손의 미덕을 익히기, 보답 없이 봉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이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다.
‘가브리엘’과 ‘로드리고’, 그리고 신부들과 원주민들의 사랑과 노력으로 최상의 농장으로 변화된 과라니 부족 마을은 스페인과 포르투칼 총독들의 탐욕에 희생당할 위기에 처한다.
주교와 양국兩國 총독들이 과라니 부족 마을을 시찰했을 때, ‘로드리고’는 노예였던 한 원주민의 채찍질 당한 등의 상처를 그들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전하! 도망 온 노예입니다. 스페인의 노예상인에게서 샀습니다.”
“노예상인이라? 불법이잖소?”
주교의 반문에 스페인 총독이 말한다.
“수요와 공급만이 중요합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채찍질 좀 하면 어떻소? 고통이니 영혼이니 떠들지 말고 그걸 생각해보시오!”
각종 악기를 생산하는 원주민들과 훌륭한 성가를 부르는 원주민들의 인간적 면모가 이들 총독들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오직 피부색이 다르고 힘없는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노예오서의 가치 이상을 발견할 수 없는 힘 있는 자들의 멀어버린 영혼과 싸워야 하는 사람이 사랑을 아는 일선 신부들이다.
결국 양국의 총독들에게 굴복한 주교의 묵인 아래에 과라니 부족 마을은 스페인과 포르투칼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다.
비폭력 비무장 항거를 주장하는 ‘가브리엘’과 무장武裝하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 ‘로드리고’, 그리고 많은 신부들과 원주민들이 속절없이 순교를 당하고 만다.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원주민 아이들은 신부들이 심어준 자유의 정신을 지니고 다시금 폭포위로 돌아가지만 과연 진정한 신앙과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일까.
그 대답이 여기 있다.
주교가 교황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 이렇다.
“그리하여 신부들은 죽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진실로 죽은 자는 나요 살아남은 자는 그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죽은 자의 정신은 산자의 기억 속에 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일종의 정치집단政治集團이다.
교회는 일종의 조직이다. 그러나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교회를 설립하라 하였더라도 그 교회를 운영하는 것과 신앙심이 같을 수 없다는 거다.
성직자들도 마찬가지다. 하급성직자들일 수록 자신의 양심에 충실할 수 있다.
그러나 고위직 성직자들일 수록 정치적 이유로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교황님의 영토 끝에서 발생한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인디언들은 다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인의 노예가 될 겁니다. 시작이 맘에 안 드는군, 다시 고치게. 교황님, 1758년, 지금 저는 남미 대륙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긴 남미 라플라타의 앙상센이란 마을인데, 산 미겔선교회에서 도보로 2주 걸립니다. 이 선교회는 개척민들로부터 인디언을 보호하려 했으나, 오히려 반감을 사고 있습니다. 이곳 인디언들은 음악적 재능이 풍부하여, 로마에서 연주되는 바이올린도 그들이 만든 것이 많습니다. 이곳으로 파견된 예수교 신부들은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오히려 순교를 당하게 됐습니다.’
양심에 꺼리기는 표정의 주교가 교황에게 보네는 보고서를 쓰는 장면이 이 영화의 퍼스트 신first-scene이다. 정의가 교회의 추악한 정치적 술수에 희생되는 이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인 샘이다.
신부들이 만드는 지상천국이 쉽지 않다. 원주민들이 비협조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군주들은 피지배지被支配地 민족들이 낙원을 이루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선 신부들과 교회 권력자인 주교의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포르투칼의 영토 확장 야욕을 만족시켜 주고 스페인에게는 해가 없다는 것을 주지시키며 영국의 군주들이 교회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교황을 안심시키기 위해 예수교도와 협상하는 것이 식민지 지역 주교나 추기경이 해야 할 일이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일이다.
원주민 아이의 노래를 감상하던 현지조사를 나온 주교와 귀족과의 대화가 이렇다.
“어떻게 이 아이를 짐승이라 할 수 있소?”
“앵무새도 가르치면 노래는 합니다.”
“저렇게 멜로디가지 구사할 순 없소.”
“이 아이는 정글에서 데려왔습니다. 목소리만 인간을 닮았죠. 인간이라고 한다면 짐승들도 웃을 겁니다. 이들은 위험하고 충동적입니다. 칼로 다스리고 채찍으로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스페인과 포르투칼 총독들의 이런 생각과 타협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주교나 추기경이라는 거다.
폭포위의 땅은 하느님과 과라니 부족의 땅이라는 ‘가브리엘’ 신부의 주장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스페인과 포르투칼 총독들의 주장 사이에서 교회의 이익을 찾는 주교의 역할도 고단한 건 틀림없다.
주교에게도 일선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양심은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궁전은 정글처럼 무섭다는 걸 기억하시오.”
주교가 ‘가브리엘’에게 해준 말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일선 신부들도 이해해주기 바라는 마음이다.
공개석상에서 원주민들에게 퍼부어지는 양국 총독들의 파렴치한 매도에 ‘로드리고’가 거짓말이라고 반발한다.
정치적으로 난감해진 주교는 공개적으로 ‘로드리고’가 사과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욕심은 ‘가브리엘’과 ‘로드리고’ 등, 선교회에서 개화시키고 있는 지역을 노예공급지역奴隸供給地域으로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원주민들의 마을을 시찰한 주교 역시 신부들의 열정에 감동을 느낀다. 그러나 교황청에는 스페인과 포르투칼 총독들의 압력에 이길 힘이 없다.
강대국들이 가톨릭을 적대시 하게 되면 교황청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교황청의 존속을 위해 양심을 팔수밖에 없는 주교다.
사람은 변화變化한다.
인간들이 모두 ‘가브리엘’ 신부처럼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원주민들을 짐승과 다름없는 노예로만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노예상인 ‘로드리고’가 그렇다.
그의 노예사냥은 ‘가브리엘’ 신부가 천신만고 끝에 선교에 성공한 과라니 부족 지역까지 진출한다.
“이젠 폭포 위까지 와서 사냥을 하는군요. 멘도사 대장! 선교회를 세워 원주민을 기독교인으로 만들려고 하오.”
“쉽게는 안 될걸?”
‘가브리엘’의 간곡한 만류도 소용없는 ‘로드리고’다. 원주민을 노예 이상으로 보지 못하는 ‘로드리고’에게도 나름대로의 사랑은 있다. 사랑하는 여인 ‘알라타’와 하나뿐인 동생 ‘펠리프(에이단 퀸Aidan Quinn분)’다. 동생에게는 승마까지 직접 훈련시켜줄 만큼 끔찍하게 여긴다.
그러나 여자는 동생 ‘펠리프’를 더 사랑한다.
‘알라타’는 ‘펠리프’를 건들지 말라고 청하지만 두 사람에 대한 질투감정을 갈무리할 수 없는 ‘로드리고’다.
축제 날, ‘알라타’와 ‘펠리프’의 사랑하는 현장을 발견하고 분노를 머금은 얼굴로 돌아가는 ‘로드리고’를 이해시키려던 ‘펠리프’는 감정이 폭발하여 뺨을 대린 것이 칼싸움이 되어버린다.
굳이 죽이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순간적으로 동생 ‘펠리프’를 죽이게 된 ‘로드리고’는 스스로 성당에 구금시키고 아무와도 상대하려하지 않는다.
“동생을 죽였다고요? 결투였으니 무죄잖소. 후회 때문입니까?”
“나가시오. 신부님.”
“내가 사형집행인이었으면 좋겠죠? 그게 간단하죠.”
“내버려 둬요. 내가 누군지 아시죠?”
“알아요. 용병에다 노예상인이며……. 동생을 사랑했죠?”
“날 지금 비웃고 있소?”
“웃고 있소. 도망만 가려는 겁쟁이를 보고 있으니까 말이오.”
결국 ‘가브리엘’의 권고를 받아들인 ‘로드리고’는 무거운 자신이 투구와 갑옷, 검劍 등, 용병장비를 끌고 폭포를 기어 올라가는 고행을 시작한다. 동생을 죽인 죄책감에 끊임없이 고행을 거듭하는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동료 신부가 ‘가브리엘’에게 묻는다.
“언제까지 저럴 거요?”
“하느님만이 아실 거요.”
“이제 속죄는 충분하오.”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린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교회의 신부들입니다.”
로드리고가 얼마나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지 느껴지는 대화다.
보다 못해 신부가 투구 등이 담긴 밧줄을 끊어버리지만 다시금 폭포 밑에가지 내려가 끌고 오르기를 거듭하는 ‘로드리고’다.
그런 ‘로드리고’를 무너지게 만든 것은 자신이 사냥하여 노예로 팔아먹던 원주민이었다.
원주민들의 용서를 받는 순간, ‘로드리고’는 통한의 통곡을 터뜨리고야 만다. 변화하는 것이다.
변화되는 이 순간이야말로 감동이다.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On Earth As It Is Heaven의 감미로운 선율과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우는 ‘로드리고’, 그를 완전하게 용서한 원주민들의 꾸밈없는 미소들이 어우러지는 감동이다.
원주민들과 마을을 건설하면서 ‘로드리고’는 깊이 있게 변화한다.
사냥한 돼지를 죽이라는 원주민들의 권고조차 거절할 만큼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친 것이다.
그러나 기본 품성은 변화하기 어려운 것일까.
수도사가 되었음에도 ‘로드리고’의 강한 성품은 쉽게 변치 않는다. 원주민을 짐승으로 비하하며 ‘자신들에게는 노예가 없다’며 거짓증언을 하는 스페인 총독에게 ‘거짓말’이라고 항의하는 ‘로드리고’다.
로드리고의 도발적인 발언으로 정치적 난관에 처한 주교가 ‘로드리고’에게 스페인 총독 ‘카베사척 로우Chuck Low’에게 사과할 것을 명령했을 때, ‘로드리고’가 쉽게 받아들일 리 없다.
교주의 사과명령을 자신의 명령으로 바꾸어 전달하는 ‘가브리엘’과의 대화가 치열하다.
“왜 사과해야 합니까?”
“내 명령이니까요.”
“카베사는 예수교도와 인디언을 싫어합니다. 잔인해요. 포르투칼인도 마찬가지에요.”
“물론 알고 있소.”
“그럼 왜 사과해야 하는 겁니까?!”
“그럼 어쩌면 좋겠소? 풋내기 수도사가 공공연히 그들을 모욕할 수 있소? 예수교를 그만 두겠소?”
결국 수도사를 그만둘 수 없는 ‘로드리고’는 공개적으로 스페인 총독 ‘카베사’에게 사과하고 만다.
그러나 ‘드리고’는 변화는 했으되 그 근성가지는 버리지 못한 것일까.
스페인과 포르투칼 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철저한 비폭력항거를 주장하는 ‘가브리엘’과 자위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려는 ‘로드리고’가 갈등을 일으킨다.
과연 어느 쪽이 정의인가.
자신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과라니 부족들과 이들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신부들, 무장 항거를 주장하던 ‘로드리고’와 비무장 저항을 주장하던 ‘가브리엘’ 신부의 정신, 이익을 위해서라면 짐승처럼 변할 수 있는 총독들의 만행이 현대의 국제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기에 절망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라고나 할까.
이 영화에서는 인간이 지닌 갈등을 강렬한 느낌으로 만나게 된다.
선교회 신부들과 교황청의 갈등도 그렇지만 ‘로드리고’와 ‘가브리엘’ 두 사제의 갈등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가톨릭이 가난한 자와 억압받고 있는 자를 구원하고 해방시키는 일에 앞장서야한다는 인식에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방법론에서는 두 성직자가 각각 다른 의미로 순교의 길을 걷는다.
복음의 진리와 정치적 참여 사이에서의 선택은 ‘로드리고’와 ‘가브리엘’ 신부의 비극적인 순교가 있고 2 1세기가 도래한 오늘 날에도 여전히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영화에서만큼은 음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가 음악을 맡아 그의 예리한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데, "On Earth As It Is Heaven"은 이 영화의 주제음악으로 ‘Baruet School합창단’과 남미민속음악을 주로 연주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는 Incantation이 토속적이면서도 경건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넘치는 곡을 연주해 냈다.
나는 지금도 ‘미션’의 주제곡을 자주 들을 만큼 감동을 느끼는데 특히 오보에의 감미로운 연주와 폭발적으로 치솟아 오르는 합창의 파워는 음악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