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시절의 나는 서부극을 아주 좋아했다.
휴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극장이 없었을 때, 동네 학교 운동장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서부극을 상영하면 어떻게 해서든 개구멍으로 숨어들어가 훔쳐 감상하기 일쑤였었다.
그 당시 제작되던 서부극은 권선징악勸善懲惡 구도로 되어있어서 어린 우리들에게 정의감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세인Shane’, ‘역마차Stagecoach’, ‘하이눈high-noon’, ‘OK목장의 결투Gunfight At The O.K. Corral’ 등, 올드팬이라면 쉽게 기억할 서부극 명화名畵들은 오히려 활극이면서도 서정적敍情的이었다는 느낌이다. 총, 말, 민요를 서부극의 3대 요소로 꼽는다던가.
그것이 마카로니웨스턴macaroni-western이 나오면서부터 잔혹한 폭력으로 변하더니 어느새 그런 영화에 물들었는지 전통서부극은 심심해진 것이 우습다.
50년대까지는 서부극 중에서도 인디언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인디언들은 포악한 야만족들이고 백인은 정의로운 영웅이라는 등식으로 그렸었다. 그런 서부극 역시 60년대부터 서서히 인디언과 백인 간의 시각에 균형을 잡아가더니 드디어 인디언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 본 수준 높은 영화가 나타났다.
영화배우 케빈 코스트너Kevin Costner가 딘 셈러Dean Semlerd의 소설을 각색, 스스로 자금을 모아 투자하고 감독, 주연까지 맡아 제작한 ‘늑대와 춤을’이다.
이 영화가 마음에 드는 건 예전의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 즉 인디언은 모조리 나쁘고 모든 백인이 정의롭다는 식의 도식圖式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인디언의 문화가 진정 인간들의 순수한 삶이라는 느낌을 183분간의 상영시간동안 강하게 받게 된다는 점이 매력이라고 할까.
역시 좋은 영화는 누구에게나 좋게 보이는가 보다.
‘늑대와 춤을’은 ‘91년 43회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촬영상, 음악상, 음향상, 편집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했고 48회 골든 글로브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3개 부문, 41회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으니 내가 좋은 영화라고 본 것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1863년. 남북전쟁 중 테네시 주의 데이비드 평원St. David's Field, Tennessee전투에서 존 던바 중위(케빈 코스트너Kevin Costner 분)는 무모할 만큼 용감하게 적진을 희롱하여 북군의 사기를 높여 승리를 이끈 공로로 전쟁 영웅이 되어 서부주둔 기병대로 자원한다.
던바 중위가 부임해간 세지윅 요새要塞는 집 한 채만 달랑 있을 뿐, 보급품마저 끊긴 병사들이 모두 탈영하여 요새를 떠난 다음이었다.
던바 중위를 요새까지 안내해준 마차꾼은 돌아오는 길에 포악한 인디언 포니족Pawnee族들에게 처참하게 살육 당한다. 던바 중위는 황량한 요새의 통나무집에서 혼자 기거하면서 오기로 되어있던 후속 부대를 기다지지만 연락이 없다. 그의 친구는 한 필의 말과 가끔씩 문 앞에 찾아와 경계의 눈빛으로 어슬렁거리는 늑대 한 마리 뿐.
어느 날 온순한 인디언 수우족들이 나타나 던바의 말을 도둑질해가지만 말은 다시 도망쳐 되돌아온다.
던바는 인디언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지만 불안할 수밖에 없다.
결국 던바는 인디언을 기다리기보다 직접 찾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우연히 부상당한 인디언 복장의 백인 여자 주먹 쥐고 일어서(매리 맥도넬Mary McDonnell분)를 발견하고 인디언 부락에 데려다준다.
던바를 경계하던 수우족들은 백인들의 이동이 많아지자 부족회의部族會議에서 그를 만나기로 결정하고 제사장 발로 차는 새(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 분)를 앞세워 요새를 방문한다.
이들은 비록 원활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있었으나 피차 선의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고 쉽게 친해지게 된다.
수우족들은 ‘주먹 쥐고 일어서’의 통역으로 던바와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현명한 인디언 족장 열 마리 곰(프로이드 레드 크로우 웨스터먼Floyd Red Crow Westerman분), 인자하고 너그러운 ‘발로 차는 새’, 용감한 청년 머릿속의 바람(로드니 A. 그란트Rodney A. Grant분), 그리고 인디언이 된 백인 여자 ‘주먹 쥐고 일어서’들과 던바 중위는 서서히 신뢰를 더해가기 시작한다.
수많은 들소 떼를 발견한 던바는 들소 떼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는 수우족에게 알려주고 그들과 함께 들소 사냥에 나선다. 이 사건이 던바가 아닌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을 얻고 수우족들과 진정한 동지로 동화되기 시작한 계기契機였다.
겨울이 닥쳐오자 수우족의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포니족이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수우족 용사들이 출동한다.
함께 가려던 던바는 가족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노약자와 아이들, 부녀자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포니족이 침입해 위기에 빠진다. 던바는 오두막에서 많은 총을 가져와 수우족을 지휘하여 포니족을 물리친다. 이에 수우족들은 던바를 진심으로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던바와 ‘주먹 쥐고 일어서’의 사랑을 눈치 챈 ‘발로 차는 새’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다. 던바는 드디어 기병대 소대장이 아닌 수우족의 인디언 ‘늑대와 춤을’으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백인들의 침략이 끝없이 이어지자 족장 ‘열 마리 곰’은 부족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던바는 이들과 함께 떠날 결심으로 자신이 그동안 써왔던 소중한 일기장을 두고 온 오두막으로 향한다.
그러나 인디언 복장을 한 던바는 요새를 비워둔 사이에 충원된 기병대에 포로로 잡혀 배반자, 밀정이라는 낙인과 함께 온갖 폭행을 당하고 후방으로 후송되어간다.
던바가 며칠째 돌아오지 않자, 염탐 나온 수우족 용사들은 그들이 통과하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을 감행, 던바를 구출해낸다.
수우족들은 기병대를 피해 눈 덮인 산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던바는 자신 때문에 수우족이 해를 당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절망과 희망은 다르지 않다.
던바 중위는 데이비드 평원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무조건 다리를 자르겠다는 군의관들의 진단을 받자 병원을 탈출하여 말을 몰아 적진 앞까지 돌진한다. 불구자不具者가 될 바에는 차라리 전사하고 말겠다는 절망의 표현이었다.
던바의 용감한 돌진에 사기충천한 북군병사들은 일거에 남군진영南軍陣營을 휩쓸어버린다.
장군은 자신의 전속군의관에게 던바의 다리를 치료하라고 명령함과 동시에 던바의 요청대로 서부지역으로 전속轉屬시켜준다.
“삶이란 진정 신비로운 거다. 죽으려고 한 건데 뜻밖에 영웅이 되었다.”
던바의 독백이다. 절망이 오히려 그의 다리를 구해준 것이다.
병사들이 떠나버린 세지웍 요새에 던바를 홀로 남겨두고 돌아가던 농부를 호전적인 포니족이 죽여 버린다.
헤이츠와 세지웍 요새의 연락이 끊긴 것이다.
그러나 던바는 타고난 낙천주의자다.
“벌써 30일이나 되었는데 이곳 생활이 점점 마음에 든다. 특히 시스코(던바의 애마愛馬)와 함께하는 정찰활동이 즐겁다. 우린 점점 멀리 나가 새로운 걸 발견한다. 그리고 크던 작던 나의 기억에 각인된다. 내가 너무 긍정적인 것일까. 그러나 동쪽 지평선을 보고 있노라면 뭔지 모를 희망이 생긴다.”
던바의 긍정적인 일면이 나타나는 독백이다. 버려진 요새에 홀로 남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실 던바가 버려진 세지웍 요새에서 홀로 지키고 있는 동안은 절망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요새가 버려졌기에 던바는 수우족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통역을 해주던 ‘주먹 쥐고 일어서’와 사랑을 나누고 수우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던바가 버림받음으로써 얻어진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던바는 군대로부터 배신자가 되고 만다.
불행과 행운의 원인과 결과는 이처럼 확신할 수 없는 가변성可變性을 지니고 있다.
수우족의 운명도 이와 같다.
수없이 몰려오는 백인들 틈바구니에서 수우족은 이리 저리 도망 다니다가 결국 네브라스카 로빈슨 요새Fort Robinson, Nebraska에서 백인에게 항복했다.
“그들의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그들의 들소 떼도 사라졌다. 이로써 평원의 위대한 기마민족騎馬民族의 문화The Great Horse Culture는 사라지고 서부개척은 역사 속으로 소리 없이 묻혀갔다.”
이 영화의 내레이션처럼 과연 인디언의 문화는 사라진 것일까. 또 한, 백인들에게 항복한 인디언들은 불행하기만 한 것일까.
그러나 비록 군대에서는 반역자로 몰렸을지언정 수우족과 함께 대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었던 던바의 인생은 차라리 행복했던 것이 아닐까.
어느 종족에게나 선善과 악惡은 공존共存한다.
농부의 안내를 받아 보급품을 마차에 잔득 싣고 발령지 세지웍 요새로 가던 던바는 도중에 포니족에게 희생당한 이주민마차를 발견한다. 동부東部의 남북전쟁을 피해 서부를 동경하여 지원한 던바의 기대와는 달리 서부에도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은 있었다.
우리는 선과 악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백인의 입장으로 보면 인디언이 악이다. 인디언의 입장으로는 삶의 터전을 침범한 백인이 악일 것이다.
그러나 인디언에게도 선과 악은 공존하고 백인 역시 선악은 공존한다.
인디언 중의 악은 아마도 다른 종족을 공격하여 약탈을 일삼는 포니족일 것이다.
“빌어먹을 인디언! 죽은 놈 말고는 만나지 말아요!”
농부의 인디언에 대한 인식이다.
백인 농부의 눈에 비친 인디언들은 모조리 살인자거나 거지, 좀도둑들일 뿐이다.
그러나 인디언들도 여러 종족이 있다. 포니족처럼 폭력적인 종족이 있는가 하면 수우족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 있는 것이다.
수우족 ‘발로 차는 새’에게는 요새에 홀로 와있는 던바라는 존재가 심상치 않다. 이런 일들이 인디언들에게는 상서롭지 않은 징조徵兆로 보인다.
“한 사나이를 봤어요. 벌거벗은 백인이었어요.”
“사람이 확실했나?”
“그의 성기性器를 봤어요.”
“그에게 말을 걸었나?”
“아니요.”
‘발로 차는 새’와 수우족 추장 ‘열 마리 곰’의 대화에서 던바를 만난 의미를 폭력이 아닌 순리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우족의 평화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수우족 중에서도 호전적인 자는 있게 마련이다. 던바를 만나 대화를 해봐야 한다는 ‘발로 차는 새’의 의견에 백인은 무서울 것 없다는 ‘머릿속의 바람’이 의견 차이를 보인다.
던바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는 어른들의 모임을 엿본 수우족 꼬마들이 던바의 말을 훔치려 한다. 던바를 죽이겠다고 호언하는 ‘머릿속의 바람’과는 다른 장난기일 뿐이다.
그러나 던바의 애마 시스코는 끌고 가던 꼬마를 힘으로 말에서 떨어뜨리고 주인에게 돌아온다. 꼬마가 부상을 당하자 ‘머릿속의 바람’이 전사들을 이끌고 시스코를 탈취한다.
“너 같은 건 겁 안나!”
‘머릿속의 바람’이 던바에게 이처럼 도전했으나 둘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다. ‘머릿속의 바람’의 단순한 자존심일 뿐이다.
그러나 시스코는 또다시 자신을 포획한 인디언에게 부상을 입히고 던바에게 돌아온다.
그 사이 미 기병대와 조우한 수우족 전사들이 희생된다.
이 전투에서 ‘주먹 쥐고 일어서’의 남편도 전사한다.
이들 수우족에게는 던바의 말을 훔치려하다가 부상당한 동료와 기병대에게 당한 동료들의 불행이 백인신白人神의 대리자일지도 모를 던바를 괴롭힌 대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과연 인간의 사악邪惡함은 무엇으로 가려야 할까.
던바의 제보로 들소 떼를 찾아 나선 수우족들은 백인들이 무차별 사냥하여 돈이 되는 가죽만 가져가고 고기를 방치한 현장을 발견한다.
던바의 독백이 이렇다.
“영혼이 없는 자들의 소행이었다. 치가 떨린다. 가죽이 벗겨진 들소들이 썩어가는 걸 보는 인디언들에게는 즐거운 목소리는 간곳없고 무거운 침묵만 감돌았다. 나는 백인들의 추악한 행위에 부끄러워 잠을 이룰 수 없다.”
이 처참한 광경에 수우족들은 망연자실한다.
그들은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고 사냥할 때마다 들소들의 희생제를 올리는 자연친화적인 문화를 지녔을 뿐, 백인 같은 잔혹함은 없었다.
‘발로 차는 새’와 던바 일행이 들소 떼를 확인하는 사이에 젊은 수우족들은 백인 사냥꾼들을 공격하고 밤늦게까지 축제를 벌인다.
“무슨 일이 자행되었는지 명백해졌다. 내 마음은 그만큼 무거워졌다. 그들이 죽인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머릿속의 바람’과 ‘발로 차는 새’는 백인 사냥꾼을 죽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경우 인디언들과 백인 사냥꾼,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 던바의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처럼 옳고 그름은 선후를 가리기 어렵다.
던바는 어느 날 갑자기 요새에 들이닥친 군대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후방으로 압송된다. 이를 수우족들이 병사들을 사살하고 던바를 구한다.
이유야 어디에 있든 백인병사들로써는 인디언 복장을 하고 있는 던바 중위가 배신자로 보였을 터. 이를 구하기 위해 백인병사들을 사살한 수우족의 행위 역시 친구를 구해낸 정의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가림에 있어 가장 저급한 것이 이분법적 기준이다.
이분법에는 정상참작이 없다.
이래야 하는 것과 이러지 말아야 하는 절대적인 원칙만 있을 뿐이다.
인디언들은 백인병사 던바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백인병사들은 인디언들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던 던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분법적 판단으로 본다면 단연 백인 쪽이 아니겠는가.
가장 큰 적은 외로움이다. 신뢰와 사랑은 외로움을 이긴다.
벽지근무에 지친 헤이츠 요새의 대령은 던바를 버려진 세지웍 요새로 발령 내고 자살을 해버린다. 헤이츠 요새만 하더라도 제법 사람이 많은 곳이지만 외로움에 지친 것이다.
오랜 세월, 보급품마저 끊긴 채 포니족과 전투를 벌여온 세지웍 요새의 ‘카킬 대위’는 외로움에 정신이상이 생길 만큼 지친 전 대원에게 탈영脫營을 명하고 자신도 떠나버린다.
그 역시 버려진 외로움에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던바가 세지웍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아무도 없는 빈 요새였다.
던바 역시 홀로 요새를 지키며 외로움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던바 앞에 나타난 첫 번째 생명체가 떠돌이 늑대 한 마리.
던바 앞에 나타난 늑대, 본능적으로 소총을 조준하던 던바는 늑대에서 적개심이 보이지 않자 굳이 사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외로운 사람에게는 어떤 생명체든 소중할 수밖에 없다.
늑대는 멀찌감치 떨어져 던바의 주위를 맴돈다. 짝을 잃은 늑대 역시 외로웠던 거다.
던바 또한 늑대가 싫지 않다. 가끔 먹이를 던져주기도 하는 던바다. 늑대 역시 던바의 막사 앞에 자신이 사냥한 새를 놓아두기도 한다.
그에게는 늑대나 애마 시스코가 더불어 장난까지 칠 수 있는 친구다. 늑대와의 우정이다.
이럴 때 요새에 나타난 사람이 ‘발로 차는 새’다.
마침 웅덩이에서 목욕 중이던 던바는 발로 차는 새를 발견하고 숨어 살핀다. ‘발로 차는 새’가 시스코를 끌고 가려 하자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온 던바에게 놀라 정신없이 도망가는 ‘발로 차는 새’다. 낮선 백인과 인디언의 조우에 서로 놀란 것이다.
수우족 ‘발로 차는 새’가 착하다는 증거인 셈이다.
“나는 인디언들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나는 그들에게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고 싶다. 내가 만난 인디언은 근사한 친구였다.”
던바가 자신의 일기에 적어놓은 ‘발로 차는 새’에 대한 인상이다.
던바 역시 순리로 인디언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끼리, 그것이 동물과의 관계라 할지라도 사랑으로 접근한다면 순리다. 오히려 경계하고 적개심으로 말살하려 함은 역행逆行이다. 무조건의 적개심은 늑대에게도 없다.
두 번에 걸친 수우족의 애교스러운 기습을 받은 던바는 차라리 자신이 수우족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수우족을 찾아가던 던바는 백인부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몸을 자해하며 울고 있는 ‘주먹 쥐고 일어서’를 발견하고 그녀를 구해 수우족 마을로 들어간다.
수우족들로써는 뜻하지 않게 나타난 던바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동족을 죽인 기병대인 것이다. ‘머릿속의 바람’의 냉정한 축객령에 쓸쓸히 돌아서는 던바에게 수우족 꼬마들이 덤벼든다.
“안 돼! 싸우러 온 게 아냐.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둬!”
이를 가로막는 ‘발로 차는 새’의 말이다. 철학과 문화가 있는 것이다. 적과 친구를 가릴 수 있는 철학이다.
인종으로 피아彼我를 가리는 건 문화가 없음이다. 인식과 행동으로 가리는 건 문화적인 걸 의미한다.
결국 수우족은 부족회의에서 던바를 만나보기로 결정한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으나 몸짓 발짓으로 호의적인 이미지를 교환하는데 성공한다. 던바의 외로움과 수우족의 불안감이 상쇄되는 순간이다.
수우족은 던바에게 받은 코피와 설탕 선물의 답례로 들소 가죽을 전달한다.
서투르나마 ‘주먹 쥐고 일어서’의 통역으로 이들의 이해가 깊어지더니 던바가 들소 떼를 발견하여 수우족에게 정보를 전달한 것이 결정적으로 신뢰를 쌓는 계기가 되었다.
던바가 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된 데에는 들소사냥 때 수우족 꼬마를 구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수우족 전사들이 마을을 비웠을 때 공격해온 포니족을 남은 사람들을 지휘하여 던바가 물리친 것이다.
신뢰하는 마음에는 종족이 다름은 아무 제약이 되지 않는다.
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올라왔다. 현대문명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의문이었다.
내 취향이 그래서일까. 마치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가차 없이 자연을 파괴하는 듯 보이는 서양문명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흠모하며 더불어 살고자 하는 수우족들의 심성에 더 애정이 기울어지는 걸까. 이는 백인과 수우족의 문화적 차이라기보다는 동서양문화의 차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여하간 수우족들이 들소 떼를 사냥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스펙터클spectacle의 백미였다. 이런 장면 때문에 내가 서부극을 좋아하는가보다 싶을 만큼.
결과적으로 우수작으로 평가되었고 흥행에도 크게 성공한 이 영화는 너무 길다는 이유로 모든 메이저 영화사들이 제작을 거절했었다고 한다. 결국 코스트너 자신이 직접 자금을 마련해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원래 주인공 존 던바 역은 ‘비고 모텐슨Viggo Mortensen’이 캐스팅되었으나 케빈 코스트너가 스스로 주연을 맡았다는데 감독상을 받았으면서도 연기상을 받지 못한 걸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연기가 본업인 그는 오히려 감독으로써의 소질이 더 많았던 가 보다.
이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들소 떼와 말들이 질주疾走하는 장쾌한 장면은 남 다코다주 피에르 시티 근처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이미 멸종단계滅種段階에 들어선 들소 떼는 개인 소유의 목장에서 3,500마리를 빌려 5만 5천 에이커에 달하는 광활한 목장에서 촬영하였다던가.
그러나 이 영화에도 이상한 장면은 있었던 것 같다.
던바가 인디언들과 만날 때 들고 간 성조기는 그 시대에 사용하던 도안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화톳불 옆에 앉아있던 한 인디언 연장자의 인디언 복장 안쪽으로 요즘 디자인의 옷이 엿보이는 실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인간 역사의 부침을 깊이 있게 성찰하게 해준 수준 높은 작품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