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 !
옛날 유교사상의 정치를 하던 조선왕조[朝鮮王朝]시절에는 첩실[妾室]의 자식은 아버지를 보고서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호부[呼父]도 하지 못하게 했고, 과거시험[科擧試驗]도 보지 못하고 평생 첩의 자식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도 있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족보[族譜]를 오래도록 연구하고, 집필하면서 보아온 내용을 잠시 여기에 적어 볼가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서, 아들딸 놓고 오순도순 참깨 같은 고소한 사랑을 이어 가다가 운명의 장난인지 남자가 본처와 상처[喪妻]를 하고
장가를 다시 들은 것은 재혼[再婚l이라고 하고, 그 부인을 첩이라고는 부르지 않고, 후처[後妻]라고 부르고 그 여자 분에서 태어난 자식들 또한 첩의 자식이라고는 부르지 않고, 정실 자손같이 대우를 해 주는 것이 그 당시 시대의 흐름이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은 호부[呼父]를 할수가 있고 과거[科擧]를 볼 수도 있고, 집안에 양자도 갈수가 있다. 그러나 첩이란 것은 본처가 엄연히 살아 있음에도 남자가 바람을 피우거나, 자기의 재력과 권력을 보이기 위해서 호강[虎强]으로 다른 여자를, 지금으로 말하면 내연[內緣]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식을 놓는다면, 그 자식들은 정실[正實]의 자식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첩의 자식으로 평생 동안 그 꼬리표가 딸아 다닌다. 그리고 유교사상의 논쟁이 가장 심하던 조선 왕조 당시에는 첩의 자식들은 문중의 제례의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도록 되어있고, 재산 상속권도 사실 전무했다. 그래서 그들은 부모에게 버림 받고 사회에 냉대 받은 자기들의 원한을 가지고, 집안과 사회와 가정에 패악을 끼친 예가 허다하다. 안동 촌노 김 성복이가 무엇 때문에,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쓰지 못할 골동품[骨董品]의 역사를
새삼스레 끄집어내어서 왈가왈부[曰可曰否]하는지, 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망국[亡國]의 길로 가게 앞장 선, 정치인 들 중에는 거의 태반이 가정적으로 소외를 받고 사회에서, 어린 시절 첩의 자식이란 소릴 들으면서, 한 맺힌 삶을 살아온 사람들 중에 정치 지도자급의 사람들이 바로 첩의 소생들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동안 자기들 집안에서, 이웃에서 냉대를 받고 살아온 그 한풀이를 하고 있다고 바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인권도 중요하기 때문에 실명은 밝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관계[因果 關係]는 가정의 울타리가 든든해야 하고, 가정교육[家庭敎育]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고, 정실의 부모님들에게 정상적인 훈육[訓育]을 받은 사람들이 정치지도자나, 어떤 집단이나 단체를 이끌어 가는 것에 적합 할 것으로 봅니다. 물론 첩[妾]의 자식이라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문제를 야기[惹起]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조사를 해 보면, 거의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소생들이 꼭 사고를 친다는 것입니다. 특히 본처[本妻]가 있는데,
남의 소실로 들어간 여자들은 거의 이성적[理性的]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고, 대다수 물질만능[物質萬能]주의자들이고, 협잡질[挾雜質]에 능하다고 바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오직 일대일만이 가장 좋은 배필[配匹]이란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주름잡는 자들 중에는, 특히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의 가정적인 면면을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최 순실이는 최 태민의 다섯 번째 첩의 소생이라면, 그의 처세술을 잘 알 것입니다.
-- 안동 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