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의 16대손
나는 양친으로부터 서울 남대문 밖 도동에 있는
우리 선친의 가묘(家廟)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옛날 그 가묘는 산턱에 어 있는
큰 노가주나무(향나무의 일종) 뒤에 있었는데,
그것은 그 산 밑에서 사는 어떤 집안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 집안은 아주 가난해서 끼니를 거르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 아침에 어느 스님이
그 집에 밥을 달라고 동냥을 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집에서는 우리는 하도 가난해 밥 지을 장작이 없어
밥도 지어먹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동냥을 주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중은 주변을 두루 살피더니
저기 있는 저 나무를 잘라서 장작을 마련하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 그 집에서는 그 겨울에 장작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가묘가 서 있는 산골짝의 건너편 언덕에는
거창한 관제묘가 서 있었는데,
노가주나무를 잘라버린 얼마 후에 임금이
그 관제묘에 참배를 하러 행차하게 되었다.
이 행차는 매년 한 번씩 있는 일인데
때마침 임금이 관제묘를 나오다가
건너편에 전에 보지 못하던 조그만 가묘가 있는 것을 보고
그 가묘의 유래를 물으니 신하가 양녕대군의 묘라고 아뢰었다.
양녕대군이라면 줄은 다르지만 임금의 선조임이 틀림이 없었다.
만일 양녕대군이 자기의 상속권을 포기하지 않았던들
지금 자기가 임금 자리에 오르지를 못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임금은 그 낡고 쓰러져 가는 묘에 가보고
그것을 헐도록 하고 새 묘를 짓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 양녕대군이 누구였느냐 하면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의 장남으로서 세자가 될 분이었다.
그런데 태조는 양녕대군보다도
그의 둘째 아들인 정종을 더 총애하였다.
이 일을 안 양녕대군은 미친 척하여
상속권을 동생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그 동생은 나중에 정종으로 즉위하였는데
자기를 위해서 형이 희생해준 것을 감사하고
그를 퍽 사랑하였다.
나는 이 양년대군의 16대 후손이다.
(역주 : 이승만 박사가 양녕대군의 후손임은 사실이나
이 박사가 서술한 양녕대군에 관한 서술은 사실과 어긋난다.
양녕대군은 태조의 장남이 아니라
태조의 5남인 태종의 장남이었는데
태종 4년(1404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고 하여 폐위되고
그의 동생인 충녕대군이 대신 세자로 책봉되어
후에 세종으로 즉위하였던 것이다.
양녕대군과 세종은 우애가 지극했다고 한다.)
나의 선친은 내가 24권의 족보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을 알고
나를 위해서 고려시대 초기부터 집안의 직계선조들에 대한
자세한 글을 친필로 써서 자그마한 책자를 만들어주신 바 있다.
나는 이 책자를 오래 전에 하와이에서
나의 집안 유물이 몇가지 들어 있는 상자를 열었다가 발견하였는데,
나는 이 책자를 들추어 보면서 옛날에 선친이 나에게 하신
몇 가지 말씀이 생각나서 되새긴 일이 있다.
선친은 나에게 "너는 6대 독자인 줄을 알라"고 되풀이하곤 하셨다.
나는 그런 탓으로 주위에 가까운 친척이 없다.
그런데 만일 16대 전의 나의 선조가 그렇게 관대하게
상속권을 그의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고종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선은 고종 치하에서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나와 이씨 왕족과의 먼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불명예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
내가 1875년에 태어났을 때 조선은
은자의 나라로 알려져 있었던 대로 문을 꽉 닫고 있었다.
일본 중국 만주족들이 가져온 전쟁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사람들이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들을
무슨 괴상한 짐승들인 것 같이 얘기하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 나라의 큰 종교로는 유교와 불교가 있다.
유교는 지배계급을 위한 것이고
불교는 일반대중을 위한 것이었다.
한때 높은 지위에 있는 유교학자(또는 유생)들은
불교를 가리켜
“미신적이고 무지막지한 백성을 속이는
터무니 없는 교리“하고 규탄하였지만
이 두 종교는 별로 갈등이 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불교는 현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유교는 내세에 대해서 신격(神格)을 쓰지 않는 터이니
이 두 종교는 연합하여
인간의 두 가지 욕구를 모두 충족해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모친으로부터 불교의 기초원리를 배웠다.
어머니는 매년 내 생일에
나를 절간에 보내서 불공을 드리게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북한산에 자리잡은
그 아름다운 절의 첫 인상은 어찌나 좋았던지
나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적이 분위기와 금욕적인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이
어찌나 속세와 다르던지 나는 꿈나라에 간 기분이었다.
각종 옷과 모자를 쓴 5백의 나한들이
거창한 불당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극락과 지옥의 그림들이 찬란하게 벽에 그려져 있었다.
또 어머니는 나더러 천자문을 외우게 하셨다.
천자문 독본에는 그야말로 천 자의 글이 실려 있다.
나는 여섯 살 때에 천자문을 모두 외웠는데,
그것을 축복하기 위해 우리집에서는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다가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때 나의 부모님들의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는지 모른다.
나의 첫 시상(詩想)도 어머니가 가르쳐주셨다.
내가 어릴 때 지은 한 귀절의 아동시(兒童詩)가
나의 마음 속에 얼마나 깊이 새겨졌던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그런 시를 지으려고 애를 쓰곤 했다.
風無手 搖樹木
月無足 橫蒼空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건너간다) *

< 오늘도 그리운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
나는 이승만의 이 두 가지에 注目한다.
그의 族譜에 대한 무관심과 漢文에 대한 관심이다.
조선의 양반문화는 절대적이었다.
족보는 양반계급의 증명서이다.
나중에는 부패가 성행하여 그것을 사고 팔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양반문화의 폐해를 몸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그가 서양인이 운영하는 배재학당에 들어가게 된 연유(緣由)도
양반문화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과거시험을 몇 차례 보았으나 낙방을 하였다.
그러다가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
과거시험은 漢學에만 몰두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한문에는 능통했을 것이다.
한문은 배우기는 어렵지만 그것을 알면 學文의 길은 쉽다.
그가 美國으로 유학을 가서
국제정치학 박사를 취득할 수 있던 능력을
나는 한문에서 찾는다.
한글과 영어를 平面이라고 하면 한문은 立體라고 할 수 있다.
한문은 그만큼 학문의 경지가 넓고 깊다.
미국인들도 12년 이상이 걸리는 박사학위 취득을
이승만은 5년만에 이룩하는 快擧를 올렸다.
그 능력이 한문으로부터 왔다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그는 하늘이 내린 天才이고 그 福을 대한민국이 누렸다. *
성령 최 성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