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때 노래하듯 읊조렸던 말 이어하기가 있었다. 너무나 어렸을 때 기억이라 정확한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 내용이 대충 이랬을 것이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러,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아마도 그 당시에는 바나나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 그 당시에도 제주도에서는 생산이 되었는데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내 기억으로는 바나나라곤 그림으로만 보았을 뿐, 실물을 보았거나 먹어본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바나나를 거론한 이런 말들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내가 베트남에서 바나나를 처음 만나게 된다.
글쎄, 바나나를 보면서 결코 기차가 연상되지 않아서 피식 실소를 흘리기도 했지만 베트남에서의 바나나에 대한 기억은 대단히 훌륭한 식사대용품이라는 것이었다.
파월 초창기에 베트남에 도착한 한국군들은 숙성시키려고 처마에 걸어두거나 독에 넣어 파묻은 바나나와 파인에플 밭에 접근하다가 부비트랩에 희생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내가 도착했을 즈음에는 작전을 나갈 때마다 분대별로 갈고리를 매단 로프를 가져갔었다.
물론 작전 중 수상한 곳에 갈고리를 던져 부비트랩 설치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지만 바나나나 파인애플을 발견했을 때에도 부비트랩 유무를 확인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었다.
바나나가 한국군에게도 유용한 식량이 되어준 것은 작전이나 전투정찰 중에는 실탄, 수류탄 등의 중량이 너무 무거워서 가능한 한 음식지참을 줄이기 때문이다.
평소에 C-레이션 덕분에 기름기 있는 음식을 섭취한 덕에 몸에 지방질축적이 충분해서인지 작전 시에는 끼니 당 깡통 하나로 해결해도 공복을 느끼지 않지만 아무래도 깍두기나마 배터지게 먹어야 직성이 풀리던 그 당시 우리들의 위장이 섭섭할밖에.
그 때 공복감을 개선시켜주는 음식이 바나나다.
우리 병사들은 그저 무거운 음식물 운반을 대신해주는 고마운 현지 식품정도로 먹었지만 바나나에는 몸에 좋은 여러 가지 효능이 있다고 한다.
바나나의 식이섬유는 부드러운 대변을 유도하여, 설사와 변비를 동시에 예방하는 효과가 있는가 하면 다량의 탄수화물이 있어서 격렬한 운동량이 많은 병사들에게 필수적 영양소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콜레스테롤과 지방감소에 큰 효과가 있다고 하니 아무 것도 모르고 작전지역에서 먹었던 바나나가 우리들의 전투역량에 크게 도움을 준 고마운 식품이었던 셈이다.
오늘따라 고교동창이자 해병대 동기이며 베트남 전우기도 한 친구 녀석이 바나나를 잔뜩 사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공직자로 평생을 보내고 지금은 손자 봐주는 재미로 세월을 보내는 친구인데 아들 내외가 연휴를 맞아 집에 있기에 손자들로부터 해방되어 찾아왔다고 했다.
"오래 간만에 소주 안주로 바나나를 먹으며 시간 보내고 싶어서 왔다. 넌 그 때에는 술을 마시지 못했지만 나야 맥주안주로 바나나를 많이도 먹었었지. 우리 작전 중에 만났던 기억나니?"
그러고 보니 베트남에서 작전 중에 녀석의 중대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맥주 한 캔을 바나나로 안주삼아 마시고 부랴부랴 헤어졌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오랜만에 만남이야 반갑기 그지없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도 옛 추억을 되새기며 바나나를 가끔이나마 먹는 편이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내 입맛이 고급이 된 탓일까. 한국에서 만나는 바나나는 베트남에서 먹던 그 맛이 되살아나는 것 같지 않아서 그 이유가 궁금해지게 된다.
어렸을 때 맛있게 먹었던 올챙이국수를 시장에서 사 먹었더니 대체 이처럼 맛없는 음식이 어찌하여 옛날에는 그리도 맛있었는지 어리둥절해지기도 하는데, 바나나 맛 역시 내 입맛이 간사해서 그리 느껴지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하긴 CCP(The Cultural Center of The Philippines) 초청으로 필리핀 문화예술실태조사차 출장 갔을 때,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바나나를 먹었는데, 안내직원이 사람은 작은 걸 먹고 큰 것은 동물사료용이라고 말해서라기보다 특별히 맛이 기억될만하다 하면서도 베트남에서 먹던 맛을 느끼지 못한 걸 보면 간사한 입맛 탓을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