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기간을 정해놓고 축제를 벌이며 고양이고기를 먹는 페루의 한 도시가 동물학대 논쟁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논란의 핵심이라는 게 이렇다.
‘21세기에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 논란은 페루는 물론 미국과 아르헨티나 등 외국에서까지 동물보호단체들이 들고일어나면서 확대되었는데, 우리도 보신탕 문화 때문에 가끔 비난을 받는 처지니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몬도가네 적인 식성을 지녀서인지 왜 먹는 걸 가지고 이건 먹을 수 있고 저건 먹으면 안 되고를 가리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긴 종교에서도 먹어야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할 음식을 가리기는 한다.
성서 구약에 보면 짐승은 되새김질을 하고 발굽이 갈라진 녀석만 먹으라고 가르쳐서 유대교는 물론이요, 모세오경까지는 인정하는 이슬람에서도 발굽은 갈라졌으나 되새김을 하지 않는 돼지를 먹지 않는가 하면 물고기는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만 먹으라고 해서 오징어, 문어 같은 해물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예수님께서는 가리지 말고 먹어도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불교에서도 음식을 가린다.
살생이라 하여 스님들로 하여금 고기 섭취를 금하는데 이는 북방불교에서의 금기사항일 뿐, 남방불교에서는 금기로 삼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성서를 처음 읽었던 중학교 때, 그 맛있는 오징어와 낙지, 특히나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문어의 맛을 금지시킨 하느님 심술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언젠가 제7일안식일교회 신자라는 이상구 박사께서 구약에서 금지한 식품들 대부분이 사람 몸에 좋지 않은 산성식품이었다고 말씀하셔서 그런가보다 했었지만 사람 몸은 산성식품을 섭취했어도 알칼리성으로 바꾸는 기능이 있으니 예수님 말씀이 더 마음에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 스님들에게 육식을 금지한 가르침이었다.
살생을 삼가느라 초식을 한다는데 스님들이 먹는 곡물이나 나물, 식물성 식품들은 생명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거다. 식물을 먹는 것도 어차피 살생인 바에야 육류든 초식이든 외부에서 에너지를 보충해야 한다는 명제에서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어차피 도道를 닦거나 선禪을 하거나 육신이 건강해야 그 짓도 할 수 있을 것이기에 잘 먹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어차피 에너지를 공급받기로는 식물도 마찬가지, 땅에서 미생물을 취하거나 태양의 기능으로 광합성을 이루거나, 보기에 따라서는 식물 역시 살생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다.
그래도 이 역시 어느 학자의 육식을 주로 하는 민족은 난폭하고 공격적이며 초식을 주로 하는 민족은 수동적이고 착하다는 주장을 듣고 ‘그래서 스님들은 초식을 하나?’ 싶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내 나이 칠십 줄에 들어선 지금에 이르러서도 먹는 건 그다지 가리지 않는 편이다.
내가 얼마나 잡식성이냐 하면 예전에 1-2개월 해외출장을 가서 현지 음식만 먹었어도 그다지 고생한 기억 없고 남들 일주일만 못 먹어도 미칠 것 같다는 김치조차 한두 달 구경도 못하고 넘겨도 좀 아쉽다는 느낌일 뿐, 먹고 싶다는 열망까지는 생기지 않으니 좀 특이한 체질이라고 해야 할까.
뭐, 군대에서 생존훈련을 받을 때는 없어서 못 먹었을 뿐 뱀은 고급음식이요, 산개구리, 들쥐는 간식거리로 그만이었고 어쩌다가 들개라도 잡으면 그야말로 천당 가는 날이었으니 아마도 나는 비위까지 개차반이었던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뭐, 도마뱀 같은 녀석들은 그대로 입에 넣으면 씹는 수고도 할 필요 없이 저들이 알아서 목구멍을 넘어가 주었으니까.
아직 먹어볼 기회는 없었지만 프랑스에서 고급 요리로 친다는 원숭이 골인들 못 먹겠냐만, 원래 체질이 이런데다가 못 먹어본 녀석들이 별로 없어서인지 고양이나 개를 먹는다고 난리치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한 생각이 올라올 수밖에 없다.
‘고마운 줄 알고 먹으면 되지 무슨…….’
아프리카 어느 부족에게는 굼벵이가 최고의 음식이고 에스키모 어느 부족은 손님에게 대접하는 최고의 음식이 꿈틀거리는 구더기라는 건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긴 추운지방에서 구더기를 배양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니 구더기의 희소가치라 할까.
그에 더하여 에스키모들이 물개를 사냥했을 때, 사냥한 사람들이 제일먼저 나눠 먹는 것이 생간이라고 한다. 초식을 구경하기 어려운 그들에게 물개 생간은 아주 훌륭한 비타민 공급원이기에 그렇다던가. 피를 뚝뚝 흘리며 먹는 생간을 보며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그야말로 생각일 뿐이다. 먹는 에스키모에게는 생존일 터인 즉.
우리 어렸을 때, 많이 굶주리던 농촌 아이들의 영양원이 되어준 것이 개구리요, 뱀이었고 가을이면 논 메뚜기가 최고의 간식가리가 아니던가. 어쩌다가 개라도 한 마리 잡는 날에는 동네 어른들의 얼굴이 활짝 펴지는 날이었었다.
정말 고마운 줄 알고 먹으면 될 일.
도대체 뱀이 징그럽다던가, 개구리를 어떻게 먹느냐고 머리를 흔든다든가, 번데기를 징그러워서 어떻게 먹느냐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배부른 타령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페루에서 정해진 축제기간에 고양이고기를 먹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 고양이고기도 먹는 곳이 있구나.’ 그러려니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21세기에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분노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이들 모두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느냐의 문제일 뿐,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비난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나도 물론, 먹고살만해지면서부터 뱀이라든가 개구리 따위를 먹지는 않는다. 글쎄, 정력에 좋다며 이런 동물들을 즐겨먹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군대에서 생존훈련을 받는 것도 아닐진대 굳이 찾아다니며 먹을 이유가 무엇일까 싶어서다.
하지만 어떤 음식이든 먹는 사람을 흉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여전하다.
이처럼 내 식성은 개차반인데, 사는 방식은 다소 까다로워서 탈이다.
물론 내 나이 70이 넘도록 양심적으로만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청소년 시절에는 싸움질도 제법 했었고 군대생활 할 때에는 전쟁터에 가서 보통사람이라면 경험하지 않아도 좋았을 참혹한 경험도 했었다. 다만 그 참혹한 경험이었다는 짓을 행한 것이 전투 중이었다는, 내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 뿐.
아무리 스스로 반성하며 살았더라도 하느님 시각으로는 온통 죄악덩어리가 나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은 쉽게 잊고 남의 잘못을 길게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인지 문재인이 5·18을 인정하는 정책을 내놓았을 때,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행위라 여겨져서 대단한 분노를 느꼈고 이 나라를 상식 밖의 음모로 개판 만드는 것에 울화통이 터졌다.
글쎄, 아무 음식이나 닥치는 대로 먹는 잡식성인 내가 빨갱이들만큼은 도무지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했는데, 문득 그 이유가 생각났다.
빨갱이들은 그 어던 음식보다 더 치명적인 독이기 때문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