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 우리의 역사가 비록 고난과 수모의 연속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분명한 오늘이 있고,
또 더 밝은 내일이 있음을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랴?
분명 거기에는 고난과 수모를 이겨내는 힘으로써 썩어 가는 세상에
스스로 소금이 되었던 ‘인물’이 있었던 까닭이다.
예컨대 나라의 어지러움과 백성의 피곤함이 극에 달했던 구한말과
쓰라린 일제 암흑기를 눈물겨운 웃음과 폐부를 찌를는 해학으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이끌어 주던 등불이 있었으니
일찍이 홍일식 전 고려대학교 총장은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를 통해
단연 월남 이상재 선생을 바로 그런 분으로 지목했었다.
그에 의하면 나라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되자
뜻있는 분들이 모두 국외로 망명길을 떠날 때,
월남 선생은 분연히 “이 불쌍하고 죄없는 백성을 버리고 어디를 가?”하며
스스로 식민지 치하에서 국민들과 함께 그 모진 수난을 겪으면서 끈질기게 버티다
끝내 광복되는 조국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고 한다.
월남 선생이 참찬(參贊)벼슬자리에 있을 때의 일화 한 토막이다.
당대 제일 가는 세도 대신 집에서
요샛말로 하면 조찬회(朝餐會)같은 것을 한다고 모이라는 전갈이 왔다.
월남을 비롯한 고급 관료 10여 명이 아침 일찍 극 집 사랑에 모여들었다.
주인 대감은 그제서야 사랑 마루에 세숫대야를 놓고 막 세수를 하고 있던 참이였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희귀한 수입품인 서양 비누로 얼굴을 씻는데,
그 주인 얼굴에서 허옇게 일어나는 거품을 모두 신기한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월남이 주인을 향해 물었다.
“대감님, 사향 냄새가 나는 이 물건이 대체 무엇입니까?”
“응..., ‘석감(石鹼)’이라고도 하고 ‘사분’이라고도 하는 물건인데,
이것을 물에 풀어서 이렇게 문지르면 얼굴의 때가 말끔히 씻긴다네.”
그러자 월남은 대뜸 그 비누를 집어들고는 좌중을 향해
“이것 참 신기한 물건이외다. 우리 모두들 와서 이것을 한입씩만 떼어 먹읍시다.”했다.
주인 대감은 기겁을 하며
“이 사람아! 그것은 얼굴이나 몸의 때를 씻어 내는 것이지 먹는 것이 아니야!”했다.
마치 촌 놈 타이르듯이..
그래도 월남은 태연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그 비누를
한입 뚝 떼어 먹으면서 말한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생(侍生)은 지금 우리 고관들이
얼굴의 때보다 뱃속, 마음 속에 하도 많은 때가 끼어서
이 시커먼 속때부터 씻어 내야만 나라가 바로 될 것 같아 그러는 겁니다.”
그 촌철살인의 기계 있는 한마디에
그날 주인 대감을 비롯한 여러 좌중은 차마 웃지도 못하였다는 일화다.
현실은 언제나 썩기 쉬운것, 병든 세상이라 더럽다 꾸짖다가도
이따금 이런 시원한 한 줄기 소낙비 같은 풍자와 해학이 있어
예나 지금이나 민초들은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은 법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스스로 소금이 되었던 ‘인물’이 그리운 까닭은 무엇일까?
비정상이 정상 처럼 가는 요즘 같아 보면
썩고 병든 현실을 탓하기보다
차라리 이런 인물(人物), 이런 기인(奇人),
스스로 세상의 소금이 되는 그런 사람이 나오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 지성(知性)의 풍토(風土)를 부끄러워 해야 할 듯 싶다.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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