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영화나 한 편 감상할까 싶어서 집에 소장된 수백편의 영화 비디오테이프와 CD를 찾아보았더니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Akira Kurosawa’감독이 연출한 ‘카게무샤影武者Kagemusha’가 눈에 띄었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런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시각으로는 역사의 무정무상無情無常한 교체현상을 극명하게 느꼈던 것이다.
16세기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배경으로 당시의 강력한 토호들이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유이 마사유키Masayuki Yui분)’와 ‘오다 노부나가(류 다이스케Daisuke Ryu분)’, ‘타케다 신겐(나카다이 타츠야Tatsuya Nakadai분)’ 등이 벌이는 전쟁이 소재로서 당시 각 영주들은 전장에 나갈 때 위장을 위해 이용했던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가짜무사(그림자 무사影武者Shadow Warrior)가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영화였다.
러닝타임running-time 179분의 이 영화는 1980년 당시로서는 일본 영화사상 최대의 제작비 600만 불을 투입한 대작으로, ‘제32회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영국 아카데미 감독, 의상상’, ‘프랑스 세자르 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베오그라드 국제 영화제 예술, 작품, 미술상’, ‘이탈리아 비평가 감독상’, ‘휴스톤 영화제 감독상’, ‘빅토리오 데시카상’, ‘마이니찌 영화 콩쿠르 일본 영화대상 감독, 남자연기, 미술, 음악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1년과 1975년 ‘라쇼몽’과 ‘데루스 우잘라’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아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카게무샤의 흥행성이 높지 않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제작비를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이십세기 폭스사와 접촉하여 토호 영화사 그리고 구로자와 프로덕션의 공동작업으로 9개월간에 걸쳐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제작된 지 오래되어 다시 감상하기 어려운 작품이므로 줄거리를 상세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덴쇼(天正) 원년 1573년.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노다성을 포위하고 있던 ‘타케다 신겐’은 적군의 저격을 당해 전사한다. ‘신겐’은 ‘내가 죽더라도 3년 동안 죽음을 비밀로 하고 영토를 굳건히 할 것이며 결코 가볍게 군사를 움직여선 안 된다.’는 유언을 남긴다.
신겐의 동생 ‘노부카도(야마자키 츠토무Tsutomu Yamazaki분)’는 ‘신겐’이 살아있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카게무샤(그림자무사)’를 이용한다. ‘신겐’의 카게무샤는 무식한 좀도둑이었지만 ’신겐‘의 소실들조차 그가 가짜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카게무샤는 ‘신겐’의 손자인 ‘카게마루(아부라이 코타Kota Aburai분)를 사랑해주는가 하면 인자한 영주답게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이런 카게무샤의 행동에 초조해 지는 사람이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하기와라 켄이치Kenichi Hagiwara분)’다. ‘신겐’의 아들임에도 좀도둑에 불과한 카게무샤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겐’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신겐’의 영토로 출정하지만 ‘가쓰요리’는 치열한 전투 상황에서도 가신들의 도움을 받아 동요되지 않는 의연한 모습으로 ‘신겐’이 살아있는 것으로 인식시킨다.
덴쇼 2년(1574)이 끝나갈 무렵, 카게무샤에게 뜻밖의 사고가 발생한다. ‘신겐’만이 다룰 수 있는 흑마에서 낙마하는가 하면 전투에서 칼에 입은 흉터가 없는 것이 소실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결국 ‘신겐’의 죽음이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가쓰요리’가 영주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카게무샤는 부랑자 신세로 되돌아간다.
덴쇼 3년(1575) 봄, ‘가쓰요리’는 군사 2만 5천명을 이끌고 ‘노부나가’, ‘이에야스’ 연합군 진영이 있는 나카시노로 진군한다.
그러나 연합군은 총을 사용하는 새로운 전술로 무적을 자랑하던 ‘타케다’ 기마대를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린다. 지옥과 같은 전쟁터에서 전멸해 가는 ‘타케다’ 군대의 뒤를 따라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깃발을 펄럭이며 돌격하는 한 남자는 타케다 군으로부터 내쳐진 카게무샤였다.
사람은 변화한다.
‘타케다 신겐’이 자신을 대신할 닮은 자를 접견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퍼스트 신first-scene이다. ‘타게다 신겐’을 닮은 자는 ‘신겐’의 동생 ‘노부카도’가 형을 대신할 그림자무사로 쓰기위해 처형 직전 구해낸 좀도둑에 불과한 자였다. ‘신겐’ 조차 감탄할 만큼 자신과 꼭 빼어 닮은 자가 하필이면 좀도둑이라는 말에 안타깝지만 내칠 수가 없다.
‘신겐’이 전사한 후 3년간 죽음을 비밀로 하라는 유언에 따라 카게무샤가 ‘신겐’의 일상을 대행한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워낙 ‘신겐’과 닮아 손자와 부인들, 시종들까지 카게무샤라는 것을 눈치체지 못한다.
그러나 카게무샤는 좀도둑일 뿐이다.
‘신겐’가에서 보물을 훔쳐 도망갈 생각밖에 못한다. ‘신겐’의 시신을 소중하게 모셔둔 장독 안에 보물이 들었으리라 생각하고 도둑질을 하다가 무사들에게 발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카게무샤에게도 나름대로의 할 말은 있다.
“때로는 ‘신겐’공의 그림자 무사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종일 할 수는 없어요. 그건 너무 힘들어요. 이미 주군은 돌아가셨습니다. 내게 이렇게 대할 수는 없습니다.”
본인이 싫다고 하는 한 그림자무사는 할 수 없다.
결국 ‘신겐’의 죽음을 발표하기로 하고 풀어주었으나 ‘신겐’의 장례식을 훔쳐보던 카게무샤는 ‘신겐’에게 얻은 구명의 은혜를 떠올리고 ‘신겐’가를 돕기로 작정한다.
카게무샤는 ‘신겐’의 역할을 잘해낸다.
그의 힘겨운 그림자무사 역할을 이해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신겐’의 그림자무사를 해왔던 동생 ‘노부카도’다.
“나도 주군의 그림자무사를 오랫동안 해왔네. 그건 고문이었어. 자기 자신을 억누르고 남이 되기는 쉽지 않아. 때대로 나 자신이고 싶어지고 자유로워지고 싶지. 그러나 지금 그 것은 나의 이기심이었다고 여겨진다네. 한 사람의 그림자는 결코 그 사람을 저버릴 수 없어.”
좀도둑이었던 카게무샤는 이렇듯 ‘신겐’의 그림자무사로써 사명감을 지니기 시작한다.
카게무샤가 가짜라는 걸 알고 우습게보던 시동들도 마치 ‘신겐’의 영혼이 빙의된 듯 생전의 주군과 다름없는 행동을 하는 카게무샤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는 마음이 불편하다. ‘신겐’이 죽기 전에 손자를 후계자로 정하고 자신을 아들의 후견인으로 세운 데다 좀도둑을 아버지라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카게무샤는 손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영주로써의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한다. 매사에 ‘신겐’의 실아생전 모을 교육받고 행동을 모방함으로써 카게무샤의 인품마저 바뀌기 시작한다.
‘이에야스’군軍의 침공을 받았을 때, ‘노부카도’가 카게무샤를 가르치는 장면이 이렇다.
“오늘 밤, ‘가쓰요리’공이 도착하는 대로 우리는 ‘다케다’ 가문 전체 군사회의를 열 것이다. 너는 위엄을 갖춰 앉아서 듣기만 하면 된다. 결론은 장수들이 내릴 것이다. 결론이 난 후 내가 자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논의가 끝났습니다.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라고. 너는 만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하라. 잘 되었다. 모두 수고했다.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서 나간다. ……뭘, 아는 채 하려고 하지마라. 돌아가신 주군은 산과 같은 분이셨다.”
카게무샤의 완벽한 연기에 인해 ‘신겐’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었던 ‘이에야스’는 그의 죽음여부를 확인하려고 ‘신겐’ 영지 중 3개 성城을 공격한다.
‘이에야스’에게 한 개의 성을 빼앗긴 ‘다케다’ 가문 전체 군사회의에서 ‘가쓰요리’는 분개한다.
“이에야스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를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대파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 가쓰요리가 그들을 우리의 영토에서 몰아내겠습니다.”
그러나 가신들의 의견은 ‘신겐’의 유지를 받들고자하는 원칙뿐이다.
“단지 성 하나를 빼앗겼을 뿐입니다. 가쓰요리 공이 직접 출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야스의 목적을 알기위해 그의 움직임을 살펴야 합니다.”
“도꾸가와 군이 오까베성을 불 태웠습니다. 이제 그들은 후타마타성을 포위했습니다. 우리는 즉시 반격해야 합니다.”
“그 성은 아나야마가 지키고 있습니다. 난공불락입니다.”
“이에야스는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공격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는 젊지만 사려 깊고 교활합니다.”
작전회의 내용이 ‘이에야스군’을 당장 공격하자는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진행되자 ‘가쓰요리’는 카게무샤에게 묻는다.
“주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게무샤가 가짜임을 아는 ‘가쓰요리’의 감정적인 태도가 나타나는 순간이다. 역시 산처럼 무거웠던 아버지 ‘신겐’과 인품의 무게가 다른 것이다. 대답을 강요받은 카게무샤의 판단에 따라 전황戰況이 변화하는 순간이다.
“움직이지 마라.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귀 따갑게 들었던 ‘신겐’이 산이라는 말이 카게무샤로 하여금 그런 판단을 하도록 만든 것일까.
그러나 카게무샤 주제에 ‘가쓰요리’를 모욕했다는 의견이 나온다. 새로운 갈등의 시작인 셈이다. 이처럼 환경에 다라 변화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시대마다 철학이 있다.
좀도둑이라고 무시하는 ‘노부카도’와 ‘신겐’, 그리고 좀도둑 카게무샤의 대화가 이렇다.
“닮았지만, 노부카도. 그는 너무 사악하여 책형에 처할 녀석이야. 어찌 악인이 나의 카게무샤가 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신겐’에게 카게무샤가 대든다. 이미 형벌이 결정된 자가 아니던가.
“하하하하! 저는 동전 몇 푼 훔친 좀도둑일 뿐입니다. 그러나 영주님은 한 나라를 강탈하십니다. 누가 더 나쁜 사람인가요?”
그의 항변에 ‘신겐’이 웃으며 답한다.
“네가 말했듯이 나는 사악한 악인이다. 나는 이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전쟁은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다. 누군가 일본을 통일해서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한 우리는 더 많은 피의 강과 더 높은 시체의 산을 보게 될 거야.”
비록 영주에게 대든 카게무샤지만 ‘신겐’은 그의 당돌함을 인정하여 자신의 그림자무사로 수용한다. 전국시대의 영주들에게는 전쟁에 임하는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쉽게 움직이지 않아서 산이라 불리는 ‘신겐’도 교토로 진군한다. 교토를 점령한 영주가 전 일본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겐’군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을 격파한 후, ‘이에야스’의 ‘노다’성을 포위하고 성으로 공급되는 물길을 끊는다. 그러나 ‘노다’성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들으러 전방에 나갔던 ‘신겐’이 ‘이에야스’ 측 병사의 저격을 받아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다.
‘신겐’의 부상을 놓고 자신을 괴롭힌 ‘신겐’이 죽어야 한다는 ‘노부나가’와 비록 적이지만 일본의 큰 손실로 여기는 ‘이에야스’에게 성품상의 차이가 있다. 당시에는 ‘노부나가’의 힘이 ‘이에야스’를 크게 앞서있었지만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봉건사회를 확립시킨 ‘이에야스’의 그릇이 나타나는 장면이다.
부상당한 후, 자신의 영지로 철수한 ‘신겐’은 자식들과 막료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도쿄를 점령하여 내 깃발을 세우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지만 내가 죽는다면 잊어야 한다. 명심해라. 내 죽음이 알려져서는 안 된다. 최소한 3년 간 비밀로 해라. 움직이지 마라. 이곳을 지켜라. 네가 공격에 나선다면 우리 ‘다케타’ 가문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자식들의 능력을 알기에 지키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전국을 통일할 그릇은 타고나는 것일까.
‘신겐’의 대역을 하는 카게무샤는 밤마다 ‘신겐’에게 쫒기는 꿈을 꿀만큼 심한 중압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적으로나마 영주로서의 철학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신겐’의 손자와 정원에서 놀고 있는 카게무샤를 감시하지 않는다며 다그치는 ‘노부카도’에게 시종들이 하는 말이다.
“그 자는 이 집에서의 삶에 익숙해졌습니다. 다까덴진 전투 이후 자신에 대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잘 하고 있다. 마치 돌아가신 주군이 그 자 속에 들어간 듯 느껴져. 다께마루님(손자)도 사로잡았고……. 언젠가 그도 알게 될 것이다. 머지않았다. 이 비밀을 지킨 지 3년이 되어간다. 그 날이 되면 슬퍼하는 것은 다께마루님 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림자무사는 어찌될까? 그림자란 진짜가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 진짜가 죽어버리면 그림자는 어찌되는가.”
어느 사이에 손자는 물론, ‘노부카도’를 비롯하여 시종들까지 카게무샤와의 생활에 익숙해진 것인지, 카게무샤의 앞날을 걱정하는 ‘노부카도’의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 와중에 ‘카스요리’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기만 한다.
아들인 자기 대신 손자를 후계자로 책봉한 아버지에 대한 감정과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가신들에 대한 감정이 복합되어 일방적으로 타카덴진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가쓰요리’지만 여전히 감정을 죽이기 어렵다.
덴진성을 빼앗은 건 분명하지만 적을 놀라게 하여 후퇴하게 만든 ‘신겐’의 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신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가쓰요리’는 전국시대의 무장이라기보다 자연인에 가까운 성품을 지닌 것일까. ‘가쓰요리’는 전국시대 무장으로서의 철학보다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이다. ‘신겐’만이 다룰 수 있다는 흑마를 타다가 낙마한 카게무샤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카게무샤는 다시금 부랑자로 내쳐진다.
그렇기로 손자와 ‘노부카토’ 등 함께하면서 쌓인 정情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건 아니다. 손자와 이별을 나누고 싶지만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는다. 차마 떠나지 못한 카게무샤는 숨어서 ‘타케다’ 가문을 맴 돈다.
역사는 무정무상하다.
고전적인 작전으로 답보상태에 빠져있는 ‘다케다’ 군과 달리 ‘노부나가’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서양종교를 받아들이는가 하면 창과 칼 대신 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키운다.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다.
‘신겐’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진군한 ‘이에야스’ 군은 ‘다케다’ 영지의 세 개의 성을 점령한다.
이에 대응하여 작전회의도 없이 ‘가쓰요리’가 자체병력만으로 ‘이에야스’의 영지에 있는 타카덴진성으로 출진해 버린다. 결국 ‘가쓰요리’를 보호하기 위해 ‘다케다’군이 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겐’의 군기를 앞세우고 출정한다면 ‘이에야스’도 ‘신겐’이 실아 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장에 나선 카게무샤는 시체들이 즐비한 환경에 주눅이 든다. 그러나 ‘신겐’의 대역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카게무샤가 있는 본진병사들마저 ‘이에야스’군 저격병에 의해 쓰러지고 기마대의 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다. 적의 기습은 ‘신겐’의 행동으로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
이 기습으로 시종들이 카게무샤 대신 저격을 당해 죽는다.
“보시오. 이들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죽었다. 이미 책형을 받았다고 생각하시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움직이지 마시오.”
그러나 카게무샤로서는 참혹한 전장에서 얻을 것이 없었다.
카게무샤의 정체가 밝혀지고 ‘신겐’의 장례를 치른 후 ‘가쓰요리’가 영주에 오른 후 ‘다케다’ 전군 2만 5천을 거느리고 나가시노로 진군한다. 이 첩보를 들은 ‘노부나가’의 반응이 이렇다.
“산이 움직였다! 만세!”
‘가쓰요리’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노부나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영지를 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휘하 장수들은 하나 같이 진군을 반대하지만 아버지 ‘신겐’을 뛰어넘고 싶은 감정이 앞서는 ‘가쓰요리’가 받아들일 리가 없다.
“영지를 지키라는 것이 선대 군주님의 유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누구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해친다고? 그럴 수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 ‘다케다’ 가문의 시조 ‘신라사부로’ 이래 단 한 번의 전투도 패한 적이 없다! 우리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책을 쌓아놓고 총으로 대응하는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게 ‘다케다’ 가문의 용맹한 기마대가 힘을 쓸 리 없다.
카게무샤는 여전히 ‘다케다’ 군의 뒤를 밟아 따라온다. 이미 자신이 ‘신겐’화 되었었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적진의 방어 형태를 바라보며 ‘다케다’ 군의 장수들은 자신들의 최후를 감지한다.
“이것이 다케다 가문의 최후인가 보군요.”
“안녕히 계십시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우리 신겐공께서 계시는 곳에서 만납시다.”
알면서도 주군의 명령이 목숨보다 중한 것이 이들 구시대舊時代 장수들의 철학이다.
“저격수들에게 ‘타게다’군 기마대의 말을 먼저 쏘라고 전하라. 기마대는 말없이 싸울 수 없다.”
‘노부나가’의 지시다.
‘가쓰요리’의 명령으로 질풍처럼 달려 나간 ‘다케다’ 기마대는 ‘노부나가’ 총포대의 집중사격에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지금까지 본적도 없고 있어본 적도 없는 전쟁이다.
기마대의 전멸을 바라보는 ‘가쓰요리’조차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쓰러져 가는 말과 병사들이다. 그럼에도 ‘가쓰요리’는 2진, 3진, 보병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투입한다.
차라리 카게무샤가 그대로 있었더라면 ‘다케다’군의 전멸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속절없이 무너지는 ‘다케다’군을 바라보는 카게무샤의 마음이 찢어지듯 아프다.
전투가 끝난 후, 단 한명의 피해도 없는 ‘노부나가’ ‘이에야스’ 연합군 앞에 쓰러져 뒹구는 ‘다케다’군의 병사와 말……. 장수들이 서로 통성명을 하고 칼을 휘두르며 싸우던 낭만작인 전쟁에서 총을 앞세워 오직 승리만을 쟁취하는 학살수준의 전쟁으로 변화된 현장이다.
이 참혹한 상황에 분노를 터뜨린 카게무샤는 창을 집어 들고 적진을 향해 달려든다. 그러나 적군의 총은 그런 카게무샤마저 사살해 버린다.
16세기 중엽의 일본은 그들의 상징적 존재였던 천황이 있고, 그 밑에 영주들의 실질적 정부인 막부가 있던 시기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요시아끼는’ 힘을 상실한 상태였고, 전국의 각 지방의 영주들은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했다.
전국시대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권을 차지하여 3대 ‘토쿠가와’ 막부시대를 열면서 봉건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이 영화는 당시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던 ‘타케다’ 가문의 전투를 소재로 하였지만 좀도둑질을 하던 한 남자가 당대 최고의 무사였던 ‘신겐’의 카게무샤로 3년간 전쟁을 통해 살아나가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서 산적과 농민간의 공방전을, ‘요짐보’에서는 야쿠자의 대전을, ‘카게무샤’에서는 거대한 전쟁 스펙터클을 재현해 냈다.
영화 카게무샤에는 주목할 만한 메시지와 장면이 있다.
일자무식의 도적을 당대의 대영주인 ‘신겐’의 '카게무샤'로 등장시킴으로써 용맹이나 지략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영주의 힘이라는 인식을 보여줬고, 옛 관습대로 기마대의 용맹을 앞세운 ‘신겐’ 군이 새로운 전술을 앞세워 총을 사용하는 ‘노부나가’, ‘이에야스’ 연합군에 전멸당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시대적 변화의 무상한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영화 카게무샤는 지금까지도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매력이 모두 결집되어 있는 일본 영화의 정수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영화에 대한 외신을 읽고 감상하고 싶었지만 일본영화가 수입되지 않던 시대였기에 기회를 얻지 못하던 내가 일본출장 시 영문자막이 있는 비디오를 구입해서 감상할 수 있었던 건 참으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같이 일방적으로 매도하기 좋아하는 세상에 이렇게 말한다고 나를 친일파로 몰아세우지나 않을까 싶지만 지금 감각으로는 다소 지루한 감이 있을 수 있으나 지금은 일본영화도 수입되는 세상이니 시중 비디오점에서 빌릴 수 있다면 한 번쯤 감상해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