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마당이라 제목과글자를 생각할 필요는없다. 이곳에 게제하고자 쓴 몇개의 글은그냥 죽여버린다.
역설적이지만 6.25전쟁 이후 지난 수십년간 남북관계는 지극히 안정적이다. 여기서 “안정적”이라는 의미가 “평화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Peaceful이 아니라 Stable이나 Persistence, 즉 고착화나 불변적에 가까운 “안정적”이다. 물론 청와대습격, 무장공비 침투, 아웅산테러, KAL기 폭파, 천안함 격침, 연평도 포격 같은 수많은 군사행동도 있었고, 74공동성명이나 615공동선언 같이 화해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남북관계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큰 전환점이 되지는 못했다.
이런 사건들이 일어났던 당시에는 남북관계에 심각한 변화가 초래될 것 같아 보였지만, 이제와서 되돌아보니 역사의 큰 물줄기에서 조약돌 하나 떨어진 것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남북은 서로를 주적으로 삼아 대립하면서 서로를 향해 막강한 화력을 배치하고 있지만, 이런 긴장관계가 전혀 변하지 않고 지속되므로 오히려 남북관계는 안정적이 되었다. 심지어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이 죽고, 핵실험을 해도 남북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는 발생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남북한 사이에 이상한 형태의 “안정적”인 상황이 6.25 이후 60여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사이 남한과 북한의 내부 변화는 극단적으로 다르게 진행되었다. 북한은 날이 갈수록 봉건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하면서 침체의 늪에 점점 깊게 빠져드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에, 남한은 정반대로 민주화와 개방화의 길을 택함으로써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남북한 간의 이런 차이점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따라 잡는 것이 불가능한 “격차”를 만들어냈다.
북한이 인정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이제 남한은 북한이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경제력이든, 국방력이든, 외교력이든, 남북한 간의 경쟁은 70년대 초에 이미 종지부를 찍었고, 그 이후 남북한간의 격차가 수십배~수백배 차이로 벌어졌다. 여기에 더해서 소위 제3의 물결이라는 “정보화 사회”의 척도에서는 남북한 간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똑같은 민족이 똑같은 전쟁을 겪었고, 전쟁 후에는 오히려 남한이 북한에 비해 산업 인프라도 훨씬 부족하고 국민소득도 훨씬 낮았는데, 어떻게 이런 대반전의 격차가 발생한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이자 거의 유일한 해답은, 바로 북한의 잘못된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즉 사회의 경제적 구조나 현실적 토대라는 하부구조의 발전을 바탕으로 정치적 및 이념적인 상부구조가 적응하고 변화해 나가야 하는데, 북한은 절대불변의 상부구조가 모든 하부구조를 제약하고 규정해 버림으로써 애시당초 변화의 싹조차 생겨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잘못된 상부구조의 핵심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이 뻔한 것이지만, 바로 김씨일가의 무한 권력독점과 이를 현실화한 세습체제다.
이런 세습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인류역사상 유래가 없는 집권자 가문에 대한 우상화와 신격화가 수십년간 계속 강화되어 왔고, 이런 우상화의 허구성을 은폐하기 위해 인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 외부세계로부터 단절시키는 봉쇄체제가 수십년간 지속되고 있으며,이런 봉쇄체제에 균열이 발생하지 않도록 언론, 집회, 결사, 이주, 여행, 통신의 자유를 박탈하고, 철저한 감시와 강압으로 인민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봉쇄와 고립은 외부세계로부터가 아니라, “세습체제 유지”라는 내부의 필요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외길이었으며, 아무리 “주체사상”이나 “선군정치” 같은 그럴듯한 슬로건으로 포장을 해도 그 본질은 기득권을 악착같이 지키기 위한 방어의식, 즉 “변화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북한의 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고착화시키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일촉즉발의 첨예한 군사적 대립 속에서도 전쟁의 발생을 방지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남북간의 “안정적인 상태”는 절대로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남북한간의 “격차”가 남북한간의 “안정상태”를 지속하도록 용인하지 않는다. 현재의 봉쇄와 고립이 지속되면 될수록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되고, 심각한 힘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석기시대에 머물면 청동기시대의 집단에 의해 지배당할 수 밖에 없고, 청동기 역시 철기에 맞설 수 없다. 수렵사회에 머물면 생산성에서 농경사회를 따라 잡을 수 없고, 농경사회는 산업화된 사회와 경쟁이 되지 않는다.
남한은 산업사회를 뛰어넘어 정보화와 지식화 사회로 전환하고 있는데, 북한은 오히려 산업화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역주행하고 있다. 이로 인해 남북한 간에 생산성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이제는 북한은 변변한 최신전투기 한 대조차 제대로 살 수 없는 경제력 깡통 국가가 되어 버렸다.
격차를 해소할 방법이 없으니 고립과 봉쇄를 더욱 강화하고, 이로 인해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악순환의 외통수에 갇혀 버린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종착점은 필연적으로 “소멸”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남북한 간에 “안정상태”가 지속되면 “격차”가 더욱 벌어질 수 밖에 없고, 지나친 “격차”로 인해 한쪽이 “소멸”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오로지 농업이라는 극히 원시적인 먹거리 해결에 매달려야 하고, 그나마 가뭄이나 홍수가 오면 국민 태반이 굶주릴 수 밖에 없고, 원유를 살 돈이 없어서 오토바이 운행도 중지시켜야 하고, 중국이라는 한 국가에 대외무역의 90% 이상을 의존해야 하고, 국가 신용도가 제로여서 어느 국가나 기업으로부터도 단 1달러의 차관도 구할 수 없고, 그나마 경제특구라고 발표했는데 외국 기업들은 입질조차 하지 않고, 화염방사기를 이용한 즉결처형이 횡행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부패와 마약이 만연하고…이런 지경이라면 이미 북한은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이미 진즉에 국가 소멸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그러니 이런 남북한 간 “안정상태”에 대해서 우리 입장에서는 굳이 초조해 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누구편일까? 때로는 “기다림과 인내”가 최선일 수 있다.
이에 반해 북한은 진지하게 “소멸”을 걱정해야 한다. 그리고 “소멸”을 막으려면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것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시간은 절대로 북한집단의 편이 아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첫걸음은 주체사상이나 인민낙원 같은 몽환에서 깨어나서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는 것”이며, 행동의 방향은 굳어질대로 굳어진 모순 투성이의 “상부구조”를 혁파하는 것이다.
이런 혁파의 주도세력은 현실적으로 북한의 당정군을 이끄는 “엘리트 계층”이 되어야 한다. “엘리트 계층”이 께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백두혈통”이나 “최고존엄”이라는 염불만 외고 있는다면 소멸의 운명은 피할 수 없다.
변화해라. 우리는 기뻐하면서도 두려워 할 것이다. 변화하지 마라. 우리는 안심하면서 기다릴 것이다. 단 위의 모든것은 우리의 분열이없는 경우에 한한다는것이다.
-----------------------------------------------------
독립군!
우리의 자랑스런 이름이다.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한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을 재 조명해 보는데 오로지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모든것을 알수없는 필자의 짧은 지식에 의존한다는것을 밝힌다.
혹자는 우리의 일제 강점기때의 독립군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후세의 얼치기들이 죽고사는 문제를 그저 낭만적으로 묘사한것에 불과하다.이로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는 훗날의 이야기로 접어둔다.
일제와 우리 조선의 관계는 특별하다. 이웃하는 나라로서 삼국시대의 임나일본부와 임진왜란으로 살펴볼때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 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교차점이었다.잠잠해지던시기 급작스런 서구의 문물은 해양에 위치한 일본에 먼저 상륙했으며 일본은 굴욕적인 19세기 초중반 서구 열강들에게 일본열도를 개항할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은 수십년에 걸쳐서 외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자국의 기술수준으로 삼았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비로소 자주국이라고 대외적으로 표방한다.그 결과가 바로 세계1차대전에서의 침략적 활약이다.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인지 불과 두세대만에 일본은 동아시아는물론 서구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할수있는 경제군사 강국이 되었다.이로서 동아시아에서의 힘을잡은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란 바탕으로 다시한번 중일전쟁에서도 승리한다.
이미 그 전에 우리는 일제에의해서 야금야금 국권의 침탈으로 침략을 당하는데,일본으로서는 가장 만만한것이 두번의 실패를한 조선 반도점령이었을 것이다.외교적으로 미국과의 밀약등을 체결하기 이전부터 일본은 우호적인 자세로 조선반도에대한 침략을 일본 정부차원에서 기획한것이 바로 壬午軍亂과 甲申政變이었다.
이제 우리의 독립운동인 본로으로 가 보자.이미 우리의 독립운동은 1905년전에 동학농민 운동으로서 맹열한 불꽃이 타 올랐었다.그것은 민초들에의한 외세배격운동으로서 지금의 수구꼴통 집단인 북한과도 다르다.아직 한일 병합이 체결되지도 않았는데 우리의 상투머리 선비들은 들녁과 선산을팔아 조선의 독립을위해 두만강을 넘었다.
초창기 그들의 생활은 궁핖하지 않았다 가져간 재산을 가지고 황무지와같은 만주땅에 임대로 경작지를 늘릴수 있었으니.그러나 1910년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제일먼저 남부여대란 삼북의 주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이유는 조선 반도에서는 일제의 탄압이 너무 심하니 조금이라도 살기편한 가까운 곳으로 가 보자하는 것이었다.
이제 1920~30년시기 김일성은 어디서 뭐 했을까?
필자의 지식으로는 김일성은 평양의 만수대 구역에서 애비 김형직과 애미 강반석의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현대사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행적은 들쭉날쭉인데 그 이유는 김일성의 초반기 인생이 초라했기에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목하는것 아닌가의 짐작이다.
이후 김일성의 행적은 만주에서 잠깐 드러나는데 중학교 2학년때까지 사고뭉치로서 결국 15세인가 16세에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사라졌는데 3~4년이후 마적단의 졸개가되어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는 압잡이가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그리고 이후 김일성은 팔로군으로 들어가서 모택동을위한 전사가 됨으로서 조선의 독립군을 때려잡고 중공군이란 모택동의 최전선 전위병으로서 활동한다.
1943년 모택동의 붉은 군대와 소련의 동방정책이 일본이란 주적에의해 맞아떨어질당시 모택동의 하급전사 김일성은 소련의 동방정책 최고 책임자인 로마넹코에 의해서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난다.물론 이시기 소련의 간부들은 2차대전 이후의 동방정책을 대비해서 조선인 고려인에의한 조선반도의 부동항을 꿈꾸는데 그중에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허가이도 뽑혔다.그 역시 모스크바로 단기유학의 혜택을 받았고.
2차대전직후 모스크바는 김일성과 허가이의 43그루빠를 북한에 파견할때 허가이에게 믿음을 가졌었다.이유는 허가이가 머리도 똑똑했고 공산주의 이론에서는 김일성 따위는 비교 불가였기에.그러나 모스크바가 실수한것은 공부잘하는 학생이 꼭 출세하는것이 아니란 것이다.
북한에 파견된 43그루빠의리더 허가이와 김일성의 행적은 너무나 달랐다.이를테면 허가이는 정통 공산주의자로서 원칙을 지키려한 반면 김일성은 걸리적거리는 것에대한 무자비한 살육을 주장함으로서 둘의 마찰은 심해갔다.이후 김일성에의한 6.25가 발발하고 결국 허가이는 6.25중 미제의 간첩으로몰려 숙청당한 남로당의 거물인 박헌영의 뒤를 이어서 전쟁의 책임을물어 연안파의거두 무정과함께 숙청당한다. 참고로 소련파의 핵심인 허가이의 이름이 왜 허가이일까? 허가요 김가요 박가요 강가요에서 비롯되었다고도하는 설이있다.
허가이의 이력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함북 출생.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소련으로 이사하여 모스크바의 로모노소프대학을 졸업하였고, 우즈베크공화국 타슈켄트주당(州黨) 비서를 지냈으며 8·15광복 후 귀국한 소련파의 거물이다. 1946년 북로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이 되었고, 북한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1949년 박헌영과 함께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1951년에는 부수상에 올랐으나, 평소 김일성의 독재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1953년 3월 박헌영계(系)와 종파를 조성한다는 이유로 숙청당하게 되자 자살하였다.
이상으로 살펴본바와같이 해방직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정권을 잡은것은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불행이다. 조만식이 정권을 잡는것을 진주한 소비에트가 극구 싫어했는데 차라리 허가이가 북한을 통치하게 되었다면.....
만주에서 마적단 소두목으로 조선인을 때려잡다가 운좋게 소련으로 유학을떠난 세계역사상 희대의 살인마 김일성 그리고 애비닮아 살인놀음벌리다 죽어버린 새끼 정일이...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세계의 3대 악당가문은 계속되는데 저 악한 가문의 악행을 누가 멈출것인가?
참고로, 1937년 스탈린에의한 고려인들이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될때 일제의 만주사변이 있었고 당시 독립군인 우리의 임시정부는 중국내륙의 충칭으로 옮겨갔기에 이후 만주에서 우리의 독립군 활약은 맥이 끊어졌다.
1937년 소위 보천보 사건을 북한은 김일성의 우상화에 두고두고 써 먹는데 필자가 보기엔 당시 만주에서 활약하던 독립군이 사라진 시기의 사건을 동아일보가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일개마을의 파출소가 습격당했지만 사상자는 당시 일본인 요리사와 한살난 그의 딸이었고 습격한 무리는 철수했다.
이것을 북한에서는 두고두고 우려먹는데 이 사건이 진짜 김일성인지 아니면 마적다 소두목의 김성주인지는 지금도 역사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중요한 문제는 1937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우리의 독립군은 사라졌으며 1942년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와 독립군과의 부딧칠은 절대로 없을것이며 박정희중위가 소탕한것은 마지막 명줄인 마적단이었다고본다. 만주에는 장자량 장학림이란 마적단 두목이 중국 정부를 상대할만큼의 세력이 있었다.
결론: 마적단에 들어가서 그의 악날함으로 수십명을 거느리는 소두목이었던 그가 바로 북한정권의 김일성이다.
-------------------------------------------------------------------
재미없는 주제지만 우리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일본의 경제상황, 그 중에서도 일본의 심각한 재정 적자 상황을 간단하게 적어본다. 아베의 자민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했다지만 이미 아베노믹스는 무너진 상태다.
얼마 전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가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Aa3에서 A1으로 한 단계 강등했다. 이제 한국의 신용등급이 일본보다 한 단계 높아졌는데, 참고로 또 다른 국제 신용평가사인 피치는 이미 2012년 5월 이후 우리나라 신용등급(AA-)을 일본(A+)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다.
무디스는 강등 이유로 “일본 정부가 재정적자 감축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더욱 불확실해졌다”는 점을 꼽았고, 이로 인해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경기부양 조치가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하면서, “중기적으로 부채를 감당할 능력이 감소했다”고 분석하고, 대대적인 재정 구조조정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막연하게 일본의 재정 적자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어떤 지경이기에 국가신용등급까지 강등 당하는 것일까?
1. 일본 재정 현황
일본의 국가부채는 국내총생산 대비 200%를 훌쩍 넘는 1038조엔,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경원에 가까운 액수인데. “경”이라는 단위는 별로 접해보지를 못해서 얼마나 큰 숫자인지 와닿지가 않는다.
일본의 재정 적자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세입보다 세출이 비정상적으로 많기 때문이라고 본다.
2014년도 일본 일반회계 예산의 경우, 세출예산 총액은 95.9조엔인데, 세금을 통한 정상적인 세입은 50조엔에 불과해서 부족한 세입을 국채 발행(41.2조엔)으로 메꾸고 있어서 일본 전체 세입에서 신규 국채 발행이 차지하는 비율이 43%에 달하고 있다. 이렇듯 해마다 예산 부족분을 빚으로 메꾸다보니 국가부채 규모가 해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이제는 국가부채가 세출예산 총액의 11배, 국내총생산의 2배에 달하고 있으며, 해가 갈수록 그 규모는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나라빚의 규모가 크다보니 이자를 갚기 위한 재정부담도 심각한데, 일본 전체 세출 예산 95.9조엔 중에서 국채이자로 지출되는 금액이 23.3조엔으로 전체 세출 예산의 약 25%가 원금도 아닌 이자를 갚는데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의 1년 방위비 예산 4.9조엔의 약 다섯배에 달하는 금액을 이자를 갚는데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고.
2. 일본 재정적자 감축 방안은?
재정적자를 감축하기 위해서는 세출을 줄이고 국세 수입을 늘려야 하는데,
세출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줄이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복지예산이 30조엔, 전체 예산 대비 31.8%에 달하고 있으며, 국채 이자가 전체 예산의 25%에 달하는 등 감축이 불가능한 경직성 예산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경제 활성화와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한 재정 지출 수요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어서 세출을 줄이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세입을 늘리기 위해 아베정부는 소비세율을 종래 5%에서 8%로 올렸는데, 이로 인한 소비 위축으로 지난 2/4분기와 3/4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바람에 심각한 역풍을 맞고 있습니다. 마이너스 성장은 국세 수입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소비세 인상을 통한 재정건실화에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겠지요. 이번 마이너스 성장의 충격으로 일본 정부는 당초 내년 10월로 예정된 2차 소비세 인상(10%)을 2017년 4월로 18개월 연기했다.
일본정부는 2020년까지 “기초” 재정수지 흑자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애시당초 목표 자체를 달성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이번 소비세 인상 연기로 이 계획은 달성이 더욱 불가능해졌다.
3.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국가부채는 올해 527조원으로 절대 액수는 일본의 약 20분의 1 수준이다. 내년 예산에서 신규 국채발행이 차지하는 규모는 27.7조원이며, 전체 세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7% 정도이고, 이자로 지출하는 금액은 13.3조원으로서 전체 세출예산의 약 4% 수준이다. 아직 일본에 비해서는 한참 낮은 수준이지만, 일본 재정적자의 주범인 복지예산이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어서 일본의 상황이 남의 일 같지는 않다고 보인다.
우리나라 전체 예산 중 복지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30%로서 일본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늘어났으며, GDP 대비 복지예산이 차지하는 비율로 따지면 한국이 7.6%로서 일본 6.1%보다 오히려 높은 수준이 되었다.
얼마전 3∼5세 누리과정 무상보육 예산 증액분 5064억원이 정부 예산에 반영되었는데, 일본은 자민당 공약사항으로 내년부터 시행하려던 3∼5세 무상보육을 최근 전면 보류했다. 일본에는 없는 초·중·고 무상급식 예산도 올해 2조6239억원으로 4년 만에 5배나 늘었는데, 이런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복지예산들은 결국 언젠가는 독화살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돈 많은 부자들은 자기 자녀들 보육비나 급식비를 자신들이 부담하고, 사회적 약자나 빈곤층들은 국가가 무상으로 지원해줘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전 세계의 무상 급식 사례를 찾아봤더니, 어느 나라도 초중고 전체 학생들을 무상으로 급식을 지원하는 나라는 없더라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영국조차도 최근 들어 시범적으로 몇 개 학군을 선정해서 무상 급식을 실시해 보려는 단계더라는것이다.
참으로 치열하게 이 논장에서 쓰본 글중의 하나이며 대표논객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폄훼할이유도없다.
재미있었던 2년이고 여러사람을 알기도 했었다. 따로 보관하던 블로그도 폐쇄한다. 나는 이제 블로그 하나만 운영하며
이사이트에서 인연이 되었든 모든분들을 사랑하고 존경한다.아마도 그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