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오해하는지도 모를 일이기에 굳이 이 글을 써 본다(사실 좀 삐졌다)
필자인 지중해는 지금 충청남도 아산시에 산다.
태생은 서울이란 도시의 을지로5가 중부시장의 건어물 거리이다. 유치원은 안다녔고 국민학교는 을지로3가 영희초등학교를 다녔는데 20여년 선배들이 일제 강점기 정신대로 끌려가기도했다.
문제는 내가 왜 지금 깡촌이라고 생각하는 이 아산에 사는가? 서울에서 태어나 결혼을하고 한때는 행복하기도 했는데 , 살다보니 안양 오산 평택을거쳐 자꾸 내려와 지금은 충남도민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돈이없기 때문이다.
아주 어린시절 들은 이야기는 내 조상이 이성계와 이방원의 함흥차사 전쟁 이야기가 나올때 이성계의 부하로서 이성계를따라 한양에 들어왔단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곳은 오징어냄새가 진동하는 을지로 5가의 중부시장 언저리다.
김일성과 동갑인 아버지는 일본의 무슨 전문학교 출신으로 해방당시 적산가옥 한채를 불하받아 본래의 기와집과 더불어 집이 두채가되는 비교적 넉넉한 생활이었다. 1950년대당시 어머니와 그 친구들의 대화에는 대문안 대문밖이란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서울의 중심부에 사는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영희국민학교시절 서울의 중심부(전통의 양반마을이라고 해야하나?)는 효자동 통의동 팔판동 수송동 지금의 북촌마을인 가회동과 배동 매동 교동 청운동 통인동 안국동 사직동을 꼽았고 서울대가 있었던 혜화동만 하더라도 일제시기 지방의 촌놈 그러니까 양조장이나 방았간을 가진 지방의 친일 토호 부자들이 친출해서 자리잡은 동네라고 대문안 사람들이 조금 낮게보았다.
뭐 그렇다고 을지로 바닥의 오징어냄새풍기는 우리집안도 내세울것 하나도 없었지만...
철이들무렵 덕성여고와 풍문여고근처 그리고 종로의 피맛길 명동의 코리아극장 송창식이 나오는 쉘부르는 내가 즐겨놀던 장소이다. 충무로의 쌔시봉은 기억에 없다. 노는 당소가 달라서인지?
그런데 왜 늙어가는 지금의 나는 이 깡촌에 살까? 이유는 돈이 없어서이다. 서울의 집값은 너무나 비싸서 고향을 한번떠나니 다시는 돌아갈 방법이없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때만해도 강남에는 영등포구 하나였으며 천호대교도 없었고 테해란로는 서울시의 계획에만 있었다.이후 제3한강교라는 노래가 나왔고,잠수교위에 다리하나가 더 올라선것은 기억에없다. 왜? 그당시 필자는 군대를같다오고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기에.
여름에 뚝섬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던기억은 20대중반이며, 아버지따라 지금의 구리시인 교문리로 낚시를 자주 갔는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것은 장자늪이라는 연못이었다. 돌아오는길에는 광나루에서 배를뛰운다음 어린 기생에게 노래시키고 아버지는 막걸리 마시고...당시 어린나는 그것이 정말 싫었다.
아마도 아차산아래 신격호의 워커힐이 생기기 전인것같다. 어린 기생누나가 짬이나면 귀엽다고 네게 박하 사탕을 주기도 했는데 사공은 배를젓고 어린기생은 노래를 부르고 그때가 박정희의 혁명직후인지...아무튼 기억은, 당시 광나루는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배를 띄우는 뱃사공과 장구치며 노래부르는 기생 그리고 먹거리와 숙박를 제공하는 곳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주 오래된 기억. "한많은 강가에 늘어진 버들가지는"하던 그 노래는 세월지나 들어보니 1950년대에 발표된 심연옥의 한강이라는 노래제목. 그리고 노래하자 하르삔 청춘하르삔은 일제시기의 노래인데 해방후 노래하자 꽃서울로 바뀌었고.....50대는 이런 사연을 모를것이고 60대는 알까?
살아오면서 회사원(금성사)생활도 해 보았고 늦은 나이에 속칭 노가다에 메달려 힘들게 살기도한다. 조립식 건축이란 참으로 힘들고 고달프다. 결론을 말한다. 아주가끔 국내든 국외던 여행을 다니는데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가? 1년에 한번도 안되는 그 여행, 국내는 찜질방에서자면 2~30만원이면되고 외국도 100만원 내외일 뿐이다. 누구는 여권에 도장찍을 공간이 부족해서 여권을 다시 만들었다는데... 삐진마음을 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