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위에 세 살 위의 兄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50代 초반에
폐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그 때가 형이 군대간 시절이었다.
형은 마음이 유약(柔弱)해서 참을성이 좀 없었다.
군대생활이 힘 들다고 편지가 많이 왔다.
편한 補職으로 바꿔달라고 간청(懇請)을 했다.
어느 때는 많은 돈을 부쳐 달라고 요구도 했다.
어머니는 형 때문에 근심걱정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어머니 친정 쪽의 친척 중 高位 군지휘관이 있었다.
전방사단 연대장 대령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그 연대장을 찾아 갔다.
그 부대가 있는 강원도 어느 시골에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서 그곳을 갔다.
연대장 大領은 前方에서는 제법 높은 계급이다.
면회를 신청하자 전속부관 大尉가 안내하여 그를 만났다.
고향 얘기로 회포(懷抱)를 풀고 어머니는 긴한 용건을 말했다.
형을 편한 보직으로 바꿔 달라고.
그는 흔쾌히 노력을 해 보겠다며 부관에게 지시를 했다.
형이 있는 사단의 인사참모가 사관학교 同期라며
간단한 편지를 주면서 어머니와 함께
즉시 그곳으로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부관과 어머니 그리고 나는 연대장 1호차를 타고
강원도 산골에서 인천 소사에 있는 형 사단으로 출발했다.
그 시절 시골의 도로는 거의가 비포장이다.
문이 없는 찝차는 흙먼지에 無防備 상태다.
우리는 많은 흙먼지를 마셨고 온 몸에 그것을 묻혔다.
군인들은 1호차를 보고 거수경례를 깍듯이 붙혔다.
그렇게 해서 형 사단의 인사참모를 만나고
형은 송도 해안경비부대에서
사단 경리과에 非派로 근무를 했다.
그러나 형은 그곳에서도 安住를 못하고
끊임 없이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특히 돈 요구가 많았다.
나는 그 때 결심을 했다.
나도 얼마 안 있으면 군대를 가는데
나는 결코 형 같은 군대생활은 하지 않겠다고.
형은 제대를 하고도 어머니를 편하게 놓아 주지 않았다.
복학을 했으나 군대서 사귄 여자와
관계를 계속하며 學業을 등한시 했다.
어머니의 마음은 아마도 새카맣게 탔을 것이다.
형이 제대하고 내가 입대를 했다.
나는 무조건 前方근무를 원했다.
그것도 휴전선 철책 바로 밑 최전방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어머니를 편하게 해 주는 것으로 나는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가?
나는 양평에 있는 모 사단 포병대대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35개월 군생활을 마쳤다.
두 번의 정기휴가와 한 번의 위로휴가로 고향을 다녀갔다.
남들은 세 번의 정기휴가를 가지만 나는 두 번으로 줄였다.
어머니에게 돈 요구나 보직변경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병장 봉급 1,250원으로 나는 제대를 했고
그 돈에서 일부를 적금으로 들어 2만원 정도의 목돈도 마련했다.
나는 나를 단련하기 위하여
남들이 다 꺼리는 공수낙하훈련을 自願해서 받았다.
작전과 행정병을 하면서도 유격훈련 두 번을 다녀왔다.
그 힘의 源泉은 형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後記
형은 除隊를 하고서도 여자와의 관계를 淸算하지 못했습니다.
사단 경리과에 근무를 하면서 시내 은행 일을 보았습니다.
어찌어찌 하다가 여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돈의 씀씀이가 커진 형은 계속해서 돈의 요구가 많았습니다.
제대 후 그 여자와 同居를 하면서 형은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학교 등록금을 가지고 그 여자와 종적을 감췄습니다.
그 후의 일은 제 집의 은밀한 가정사이므로
더 이상의 公開를 마칩니다.
어머니는 형 때문에 한시도 근심걱정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홀로 된 20여년 후
올해 추석날 어머니를 따라 가셨습니다.
享年 95세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