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전교조 이렇게 살았다
1. 전교조 창립이전
70년대말과 80년대초 비공개 소그룹 운동
전교조는 4·19 직후 교원노조가 정권에 의해 활동하지 못했지만 이겨냈다고 판단한다. 1970년대 말부터 이 시기를 국민교육헌장, 반공국시, 학도호국단의 군사훈련, 유신체제와 새마을 운동을 개발독재라 하며 국민통치를 위한 교육으로 역할을 규정했다. 교육은 오로지 군부독재 지배의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 생산하는 역할로 보았다. 엄격한 시기라 주로 비공개 활동을 했다. 전교조도 자세한 규모와 활동은 알지 못한다. 78년 교수들이 국민교육헌장에 대응하기 위해 교묘히 ‘민주화, 인간화, 자주평화통일’을 교육지표로 삼으면서 주장한 것이 ‘우리의 교육지표’사건이다. 간첩단으로 발표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에는 다수의 교사들이 연루되었다. 80년대 초 이들은 야학, 연극 등 개별운동으로 유신체제를 타파하려 했지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공개적, 조직적인 운동을 하지 못하고 비공개 소모임으로 활동했다. 한편 다른 운동조직인 81년의 ‘아람회’와 ‘부림사건’, 82년의 ‘오송회’ 등으로 연루되었다.
80년대 초반 공개적 운동의 시작
1981년 공개 단체인 YMCA중등교육자협의회(Y교협), 흥사단 교육문화연구회, YMCA 사우회(여교사조직), YMCA초등교육자협의회 등이 결성, 활동했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YMCA 등으로 포장했지만 군사정권하에서는 활발하지 못했다. 교사들은 소모임 형태로 지역별 모임(지역모임이라 부름)을 가졌다. 학교 현장에서 실천을 매개로 결성되어 운동의 현장 토대를 넓혀가는 역할을 했다. 포장된 공개단체와 지역모임은 긴밀한 협력을 통해 발전시켰다.
교과서분석 사건, 민중교육지 사건, 민교투 사건 등에 연루되었다. 해직된 교사들은 오히려 운동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 민중교육지는 두 권으로 제작되었으며 1985년 브라질 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의 비판적 의식화교육과 피억압자들의 교육학 등 좌경교육이론을 소개하면서 교사들이 정부에 적발된 사건이다. 책 읽어보면 거짓 참교육의 발단이기도 하다. 해직교사는 민주교육실천협의회(민교협)를 만들고 현직교사가 할 수 없었던 선도적 투쟁과 이론화 작업을 수행하여 운동을 넓혔다. 학교 현장에서 민족(북한은 민족을 김일성민족으로 칭한다, 주사파도 다르지 않다.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은 민족이라는 명분으로 미군을 철수시켰다. 좌익세력의 민족은 미군을 철수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민주(인민민주, 공산민주, 민중민주)를 실천하고 새로운 문화(모듬활동, 학급문집, 놀이지도 등)를 만들어 확장했다. 가장 핵심 전략으로 민중, 민족, 민주를 교육론으로 포장했다. 교육권은 국민교육권, 교육의 3주체론을 만들고 교사관은 교육노동자관, 전문직 노동자관, 국민의 교사관에 논의를 통해 이념을 정립했다. 이때 가장 핵심적인 이론이 정립된 시기다. 지금도 전교조는 이때 만든 이론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2000년대부터 제2의 거짓 참교육으로 진화하여 발전적인 모습을 보인다.
민중교육지 사건
이와 같은 운동결과 정리된 이들의 교육이론,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것이 1985. 5월에 발간된 「민중교육 1」이고, 동 책자와 관련 윤재경, 김진경 등 두 교사와 실천문학 주간 송기원 등이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된 바 있습니다. 민중교육지 사건 관련으로 해직된 교사들은 그해 11월에 “교육출판 기획실”이란 단체를 창립하여 이른바 교육민주화운동을 추진하다가, 다음해 5.15 현직 교사들과 함께 “민주교육실천협의회”를 구성, 본격적인 교사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전교조는 왜 이적단체인가? - 고영주)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84431
교육민주화(민중민주화)선언과 교사교육노동운동의 발전
1986년 ‘5·10교육민주화선언’을 하게 된다. 독재정권에 대응하는 세력과 反대한민국 세력이 민주화라는 기만 구호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민족(반미로)민주(민중으로)운동이 발전했으며 많은 국민을 속이는 첫 단추를 끼웠다. 선언을 보면 언뜻 좋은 말로 가득 차 있으나 민주화라는 구호는 인민민주, 민중민주에 불과했다. 일반 교사는 물론 좌경적 교사들이 참여했다. 일반 교사는 거짓 민주라는 구호에 속았다. 정부는 불합리한 것으로 보았지만 국민은 속아서 지지했다. 이들은 집회와 대국민·대교사 선전, 연대 기구의 결성, 전체 운동과의 연대 강화 등을 통해 정권에 맞서면서 6월 항쟁을 맞는다.
전교협과 교육노동운동의 대중운동화
6월 항쟁 후 민중민주 국면에 좌경적 교사들은 발 빠르게 지역모임과 공개단체모임의 논의를 토대로 전국적 모임을 가지며 자주적 교사단체를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실천했다. 9월에는 ‘민주교육실천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만들어 지고 지역모임과 공개단체가 단일한 전국조직으로 발전했다. 전교협은 거짓 민주화를 모토로 교육악법 개정이라는 투쟁을 펼치며 시도 단위 교협, 시군구 단위 교협, 단위학교 평교협 조직 건설 운동에 돌입하였다. 대중적 기반을 얻기 쉽지 않았지만 올림픽이 열린 88년 4월 총선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정당을 압도한 여소야대 국면 이후 전교협 조직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사립학교 민주화 투쟁이란 명분으로 대중운동으로 지향을 명확하게 만들었다. 이념적 운동으로 보였던 전교협은 사학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거듭나고 동시에 정체를 감추는 외피를 씌웠다, 광주, 대구 등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공립중등학교 중심으로 펼쳐졌던 운동과는 명확히 질적, 양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전개 되었다. 어두운 교사들의 이해와 요구에 기초한 대중으로 자리 잡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 운동은 전교협을 전교조로 가는 발전의 운동력이며 공립 교사들이 선뜻 나설 수 없었던 노조로 가는 사립 교사들의 대중투쟁이었다.
교육법 개정은 전교조의 가장 핵심적인 투쟁으로 89년 초 까기 전개했다. 내용은 “교육민주화는 교사, 학부모, 학생의 민주적 권리 확보를 기반으로 교육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학교를 민주화하여 교육내용을 쇄신하자”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자유민주와 공산민주의 차이다. 민주라는 거대 용어를 내세워 명분을 분명히 했다. 구체적이며 노골적이고 보이지 않게 활동영역과 세력을 확장하며 학생 세뇌와 더불어 의식화 작업에 진을 치고자 주장했다. 투쟁을 위한 교원의 노동 3권 보장, 사립강화를 위한 사립교원의 신분보장, 학생의식의 변화를 위한 국정제 폐지와 검인정제 개선, 학교의 민중민주화를 위한 교장 선출임기제 실시와 교무회의 의결기구화, 학생의 자치활동 보장 등이다. 노동3권을 아직도 주장하지만 공무원에게는 단결권이 없다. 지금까지 대규모 투쟁을 했다. 단결권이 없지만 실행했고 정권은 방관했다.
국정제 폐지는 이때부터 주장했다. 지금 국사 교과서 문제는 오랜 시간을 두고 계획된 것이다. 교장 선출제임기제 실시는 전교조 3대 계파인 교보선연대가 교장선출보직제로 거듭났다. 수장이었던 김대유는 전교조를 2009년 탈퇴했다. 학생의 자치 활동은 지금에서 학생인권을 들먹이며 나타났다.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온 일이다.
전교조 회원이었던 사람은 20년도 넘게 준비한 일이라고 말한다. 물론 인권을 말함으로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인권을 들먹이며 학생이 몇 개의 독소 조항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학교 내에서 집회의 자유를 만든 것이다. 전교조에 의하여 의식화된 학생이 교내에서 집회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심각한 문제의 전초전이 될 것은 뻔한 일이다. 학생이 인권과 자유를 핑계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것이다. 이런 속셈으로 교육법 개정 투쟁을 했으며 88년 전교협은 교직원노동조합 결성을 기본방침으로 결정하고 거짓 참교육을 지도 이념으로 확립했다.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교원노조법이 통과되었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여 무산시켰다. 그러나 전교조는 건설을 강행하고자 의지를 굳히게 된다.
2. 전교조 창립과 합법화 투쟁
전교협에서 전교조로 : 교원노조라는 조직 형태와 거짓 참교육 이념의 정립
그들은 법으로 명확히 규정되는 조직 형태인 노동조합만이 유일한 해결방안이라고 인식했다. 대중투쟁이라는 전교협이라는 임의조직은 한계가 분명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전면 투쟁을 대중의 힘으로 돌파하느냐 아니면 교원노조를 용인하는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기다리느냐의 기로에 선다. 전교협은 1989년 2월 교직원노조 건설 방침을 최종결정. 전교협에서 전교조로 전환하고 조직형태를 갖추었다. 동시에 연구해온 참교육이라는 거짓이념을 내세웠다.
전교조 창립과 사수투쟁의 승리
어떻든 이들에게 어려운 시기였다. 민주세력(자유민주와 공산민주세력이 혼합)이 전면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노태우 정권의 판단은 정확했고 그냥두지 않았다. 그러나 노 정권은 독재에 반대하는 자유민주세력과 反대한민국인 공산민주세력을 구분하지 못했다. 민민세력이라고 하지만 인민, 민중민주 세력이 본질이다. 조합원은 1,519명의 해직과 42명이 구속된다. 마침내 투쟁 장소를 명동성당과 대학교로 전환했다. 명동성당에는 12일간 단식투쟁을 했으며 약 600명이 집결했다. 전교조를 지키려는 운동이 크게 진행되었다. 전국 2천여 개 조직이 참여 했으며 서명운동에 약 20만 명이 동참했다.
전교조 결성은 교육민주화라는 거짓 구호에 중·고등학생의 참여가 늘어났다. 고등학생 김수경 양 투신 자살(1990), 김철수, 심광보 군이 분신자살한 사건(1990)이 일어났다. 모두 전교조를 위한다는 사건이다. 분신을 하려면 자신들이 하지, 순수한 학생을 선동하여 투신이나 자살을 하게 만든 전교조라는 판단이 앞선다. 열사라고 치켜세우는 것은 있어도 어느 문건에도 자살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 것은 없다. 거짓명분에 속아서 분실 자살한 것을 열사로 만들어 미화시키려는 의도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읽은 기억은 잔인했다. 한동안 이들 자료를 읽지 않으려고 한 이유 중에 하나다. 비인간화의 자료를 읽다보면 가슴은 타들어가고 심장은 썩는 감각이다.
여성민우회(한명숙 씨가 1990~94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아카데미크리스찬 사건<간첩사건>으로 연루되었고 남편 박성준<성공회대교수> 씨도 통혁당 사건<최대간첩사건>에 가담했다. 김대중 정권 시절 초대 여성부 장관이었으며 지금은 통합민주당 비례대표국회의원이다)는 소모임을 가지면서 활동무대를 학부모회로 옮겼다. 그래서 생긴 것으로 전교조의 학부모 2중대라고 할 수 있는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가 89년 9월 결성되었다. 지금은 ‘참교육학부모회’라고 한다. 전교조가 교육의 3주체론을 가져온 것으로 교육의 주체는 교사로 한정을 두기에는 전략적 문제가 있었다. 창립선언문에서 ‘학부모는 출세지향적인 교육으로 자기 자녀만 생각하는 편협한 가족이기주의를 강요받았다’고 말한다. 학생이 학업에 열중하면 학생을 세뇌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전교조가 촌지거부와 거짓 참교육을 명분으로 내세운 전략은 대단했다. 당시 교사들은 촌지를 많이 받았기에 학부모는 원했다. 실력 없는 교사, 체벌을 넘어 폭력으로 다스리는 교사들을 본 학생들은 동조했다. 일부 교장과 사학의 비합리와 방만은 순수한 교사들이 참여하기에 충분했다. 핵심은 자신을 감추고 속이면서 행동했다. 모택동의 공산화 전략·전술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거짓 민주화라는 구호에 많은 사람이 동조했고 참여했다. 학교 현장에서는 탈퇴 각서를 쓴 사람은 조합원이 아닌 것으로 간주했고 탈퇴각서를 쓰지 않으면 교단에 설수가 없었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분명히 존재하지만 서류상 학교에 전교조는 없었다. 감춘다고 없는 것이 아니었다. 현장에서는 3만 여명의 후원회를 만들어 해직교사에게 도움을 주었다. 도움을 받은 회원은 의리로 전교조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어찌되었건 순수한 존재도 있었지만 공산주의 전략·전술이 뒷바침 된 전교조의 힘이다.
전교조 합법화 투쟁의 과정 : 1기, 2기, 3기
1기(1989년~1992년) : 조직 사수에 해직된 교사가 본부·지부·지회를 담당하여 집행한다. 위기가 기회가 되는 활력소였다. 사수는 했지만 대중성을 상실했다. 공립중등에 비해 초등과 사립은 더했다. 4만 조직원은 조직력을 갖추는데 어려웠으며 공개 활동은 빈곤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하여 교육개혁을 내세우게 된다. 교육부, 교총, 전교조 등 3자 교육대개혁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 투쟁은 ‘해직교사 원상복직 추진위원회’구성과 서명으로 이어졌다. 서명은 한 달 만에 5만 여명이 넘는 교사들이 참여했다. 결성 3주년 교사대회로 이어지고 2만 여명이 참석했다.
마침내 정치에 직접 관여한다. 대통령 선거에 참여해 전국연합과 연대하고 민주대연합 방침을 가지고 김대중 후보를 지원한다. 이같은 방침에 따라 ‘전교조 합법화와 민주대개혁을 위한 투쟁본부’를 구성하고 10명 투표 참가시키기, 10명에게 옆서쓰기, 10장 이상 선전물 나눠주기 등 10-10-10운동과 부정선거 고발 등 ‘4꼭’ 운동을 결정했다. 합법, 비합법 투쟁에서 비합법을 선택했다. 모두 공무원으로 법을 고의적으로 어긴셈이다.
2기(1993년~1995년) : 김대중 후보가 탈락하고 김영삼 정권 때 해직 교사의 복직이 가능해졌다. 노개위를 통한 전교조 합법화 논의 등도 이루어진다. 해직교사의 복직은 현장 중심을 가져왔고 활동력이 강화되었다. 사립해직교사가 공립으로 복직되는 바람에 사립활동가는 줄어들었다. 1,519명의 해직 교사 중에 1,200명의 교사들이 94년 교단으로 복귀했다. 탈퇴를 거부하거나 복직 방침에 반발해 복직 신청서를 내지 않는 교사, 지도부 등 200여명은 복직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김영삼 정권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만든다. 전교조와 반대 정책이었지만 어려운 시기를 넘기려 합법화를 선택했고 집중했다.
3기(1996년~1996년) : 김영삼 정권은 노개위를 구성하여 합법화 문제를 다루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노사정위로 전환되어 합법화가 논의된다. 정해숙 위원장을 본부장으로 「교원의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투쟁본부」를 구성하고 현직 교사 선언, 집회, 리본 달기, 농성, 시국선언 등을 벌일 것임을 기자회견하였다. 교원의 노동권을 보장을 촉구하는 선언은 광주, 전남지역 교사로 시작되 충남, 대구, 경북으로 이어져 전국 8,900여명의 교사들이 선언에 참여했다. 합법화는 연대 단체로 이어졌으나 김영삼 정부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전교조와 민주노총은 대중투쟁으로 노동법 개정을 강제해야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노동자 대회를 개최하며 단위 노조 대표자 구속 결단식,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 투쟁 등을 결의했다. 김영삼 정부는 전교조와 민주노총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새벽에 노동법을 통과시킨다. 이에 총파업을 한 달간 전개하면서 노동법 재개정 약속을 받아내었다.
3. 전교조의 합법화
전교조 합법화의 배경 : IMF 국면과 김대중 정권의 탄생
전교조가 합법화 된 것은 타이밍이 절묘했다. 북한은 전교조를 비호하는 성명서(2009)를 여러 번 냈다. 그런 관점에서 종북세력에게 합법화는 행복시작이지만 애국진영에서는 불행시작이었다. 김영삼 정권 말기에 IMF를 맞이하게 된다. 김대중 정권은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거래하면서 정권을 가져간다. IMF를 김대중 정권은 이어받게 된다. 노사정 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구조조정을 위한 노동법 개정문제가 논의 되었다. 노사정위는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합법화라는 당근과 정리해고와 변형근로시간제라는 채칙을 동시에 제안한다. 민주노총에게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강한 압력으로 작동되었지만 전교조 합법화를 미룰 이유가 없었다. 배석범 지도부는 합의한다. 지도부와 달리 속셈을 알리 없는 민주노총 일반 조합원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동상이몽하게 되었다. 김대중 정권은 사회적 합의라고 선언하고 전교조 합법화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강력한 대중투쟁을 제약하는 장치(쟁의권 부정, 단위학교교섭 불인정-사실상의 사립학교교섭 불가능, 교총과의 기존관계 유지)는 다행히 유지되었다.
김영삼 정권은 경제논리로 전교조는 공산논리로 출발하였다. 김대중 정권도 경제논리를 이어갔으며 전교조는 이를 두고 신자유주의이며 반쪽짜리 합법화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IMF와 김대중 정권이 아니면 합법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교조는 김대중 정권을 지지했고 불법선거운동도 했다. 김대중 당선자에게 해직교사 복원을 촉구하자 1999년 1월 새벽 날치기 통과로 전교조를 합법화 했다. 이해찬 교육부 장관은 교사 정년을 65세에서 62세로 낮추어 해직교사를 불러 들렸다. 동시에 전교조 최대 적인 교장, 교감을 쫓아냈다. 이때 핵심멤버는 지하조직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거짓 참교육에 현혹된 사람이 대다수였다.
전교조는 한국교육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법적 안전장치를 가지게 된다. 민주노총과 연대하며 더욱 힘을 얻게 된다. 책 『참교육 한길로』에서 비정규직이 양산된 것이 전교조 합법화와 맞교환 된 것이 아니라고 적혀있다. 사실이 아니다.
몇 년 전 전교조 고문을 만난 적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고문을 받았다는 그는 후유로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왔다. 상당히 높은 지위로 추정하건데 이수호 전 위원장을 회식자리에 욕을 하면서 부를 정도라고 직접 말했다. 그러면서 “전교조가 어떻게 생긴줄 아느냐?”고 물었다. 이미 비정규직과 바꾼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의도인지 몰라서 답을 하지 않았다. 고문이라는 그는 전교조가 합법화되면서 비정규직이 양산되었다고 말했다.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된다고 분명히 전했다. 전교조 활동가 자료에도 분명히 명시했지만 책(참교육 한길로)에서 비정규직 양산이 전교조 때문이 아니라는 거짓을 기록했다.
전교조 합법화의 의의 : 대중운동의 부활과 발전
노사정에서 합법화 논의(98년 2월 노사정 합의)가 일어나자 회원이 늘기 시작했다. 조합원은 8천이며 후원회원을 포함해도 3만을 넘지 못했다. 전국 40만 교원 중 (회비납부기준) 1999년 5만 5,666명으로 출발하여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3년 3월 93,860명을 정점으로 내리막을 걸었다. 마침내 2012년 4월에는 54,769으로 줄게 되었다. 합법화를 통하여 공개적 대중운동을 하게 된다.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에 지위가 높아져 단체교섭을 통한 처우개선은 물론 지나칠 정도다. 회원 중에는 보험에 들어둘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나오게 된다. 이런 노동자 계급의 지위향상은 조직 확대를 확장할 수 있게 된다. 전교조 합법화와 정체성은 분명하다. 참교육(공산세뇌) 실천 운동의 전개, 좌경세력과 연대를 통해 한국교육을 혁신이라는 용어로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변화 시키고 反분단(이를 해석하면, 통일은 자유평화통일이 아닌 적화통일세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그간 전교조 자료를 분석하면 종북세력으로 칭할 수도 있다.) 反독점자본세력 (이를 해석하면, 시장자유주의와 기업가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봄)과 함께 새로운 사회(시장자유주의 세상을 혁명을 일으켜 공산세상을 칭하는 것으로 해석)를 건설하고자 좌경적 교사 대중 조직이자 교육노동운동조직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고 거짓 참교육 이념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전교조의 지도 이념으로 재 정립했다. 조합원을 교육·훈련하여 다른 교원 조직과 차별성을 유지했다. 전교조 안에 제2의 참교육(제2의 참교육에 관한 내용을 읽었지만 분명한 것은 거짓 참교육의 진화에 불과하다)을 일으키지만 공산교육이 진화한 것에 불과했다.
연대를 강화하는 한편 교육노동운동의 위상을 강화하고 입지를 넓혀갔다. 노동자 운동을 확대하고 노동자 계급의 주도성을 강화시키는 것이 합법화의 정체성이다. 또 스스로 반쪽짜리 합법화란 생각으로 단체교섭에 적극 뛰어들었고 무리한 내용이나 억지가 섞였지만 교육청은 동조했다. 이들은 교육 관료와 정부를 압박하고 포위하면서 조직을 확대하고 일정한 시점에서 교원노조법 개정운동을 펼쳐 법적 지위를 재 정립하고 노동 3권을 쟁취하려 계획하였다.
4. 2014년 지금까지
전교조는 합법화 이후 계획대로 진행한다. 교육계의 파장은 당연한 결과였다. 김대중 정권 시절 합법화는 전교조에게 황금 날개를 달아주었다. 수많은 대규모 시위에도 법적 제약을 받지 않았다. 전교조의 좌편향 세뇌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문제 삼지 말라고 했다. 학교 현장에서는 ‘교장은 밥, 교감은 반찬’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벌떡교사’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회의 시간에 교사가 벌떡 일어나 교장의 문제점을 거론했다.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평상시 교장의 잘못을 수첩으로 메모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전략·전술을 학습하고 훈련받은 전교조 조합원에게 교장, 교감은 대응하지 못했다. 여 교사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고 대대적으로 공격받은 고 서상목 교장은 자살을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해도 전교조에게 대응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긍정적인 효과는 일부 사학과 관리자의 비합리와 부정부패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효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욱 많다고 보는 것이 교육계의 견해다. 막강 전교조는 노골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욱 많았다. 어떤 교장은 부정부패가 없이 합리적 운영과 강한 의지로 전교조 조합원이 많아도 학교를 지켜냈다. 합법화 후 전교조는 활동가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분회장 이상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분회장은 학교로 돌아가면 5명으로 구성된 분회원을 다시 교육하는 방법으로 나아갔다. 이는 전교조 회원이 아니더라도 일반교사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그나마 호전되었다. 최소한 지지를 하지 않았다. 다만 충돌을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차츰 전교조에 대응하는 개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6년도 하더라도 다음 ‘아고라’는 전교조를 비판하는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2008년 광우난동 사태는 전교조의 위험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은 전교조를 이적단체로 고발(2009)한다. 이에 북한은 전교조를 비호하는 성명서를 여러 번 낸다. 죽은 김정일이 전교조를 이뻐하지 않았으면 가능했을까?
황당한 사건 하나는 2008년 9월 30일 광우난동이 한참일 때 전교조 부 위원장에게 “민중 생존권 사수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감사패를 준 사람이 있다. 바로 대표 종북으로 알려진 오종렬(2004년 민중연대 상임대표)이다. 그는 광우난동에 맨 앞에 서 있었으며 수배 중이었다. 전교조 창립에 기여했고 광주광역시 초대 지부장을 지냈다. (부친은 여운형, 박헌영 등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나주인민위원회 농민위원회 위원장 등 공산당으로 활동했다. (위키백과)
부정으로 철창 신세를 진 공정택은 서울 교육감 선거에서 “전교조에 휘둘리면 교육이 무너집니다”란 프래카드를 걸었다. 전교조를 반대하는 사람은 환호했다. 공 후보가 전교조는 광우난동에서 학생을 선동하여 거리로 내몬다고 하자. 고발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후 증거를 내놓자 고발이라는 말이 없어졌다. 조전혁 의원은 전교조, 교총 명단을 공개했다. 서울 교육감 선거에서 좌측은 전교조 아바타 곽노현 후보로 단일화 시켰지만, 우익은 분열로 난립하여 전교조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런 결과의 첫째 문제는 자신만 잘났다는 교육 후보자들이며, 둘째는 교육자의 특성을 모르고 개입한 정권의 문제며, 셋째는 대다수 애국우익이 지지하는 후보를 팽개치고 일부 우익들이 정권이 지지하는 후보로 편을 갈랐다. 전체를 바라보지 못했으며 명분은 단일화지만 욕심은 중구난방이었다. 자신이 옳다는 망상을 가진 옹고집으로 교육을 망쳤다. 오만과 독선으로 빗어진 잘못이지만 침묵으로 일관했다. 간발의 차이로 곽노현은 교육감 자리를 차지한다. 우익의 분열로 인한 어부지리였다. 아바타 곽노현은 전교조에서 주장한 혁신학교, 인권조례 등을 그대로 운영했다.
곽노현은 선거법위반으로 철창 밥을 먹게 된다. 공정택이나 곽노현 모두 선거에서 보상받은 자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빈 교육감 자리로 인하여 전교조 이수호와 우익 문용린 후보가 붙었다. 문 후보는 많은 표 차이를 두고 승리했다. 밖에서 보면 단결된 모습이지만 안에서 보면 분열과 독단은 답습되었다. 당선된 문 후보는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약 8년 전에 장혜옥(전 전교조 위원장, 정의당 비례대표 5번으로 나옴)은 학생 의식화에 대하여 ‘시간이 지나면 잘한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4년 교육감 선거 인터뷰에서 종북에 저항하는 전교조의 힘은 강력하다고 토로했다. 종북이라는 소리에 겁을 먹고 온갖 고발을 하는 전교조가 아니었던가. 고발을 많이 하는 집단 중에 하나가 바로 전교조다. “거짓 많은 나무에 고발 잦을 날 없다”는 속담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웃기는 것은 2014년 서울교육감 선거에서 좌측 후보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기사(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인터넷신문-자주민보)에서 양심수(일심회, 왕재산 간첩사건과 "김일성 만세"를 외친 인물들에 대해 석방)를 석방하라고 했다. 양심수라는 것이 알고 보면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다. 이들에게 종북은 양심이다. 우습지만 역겹게도 좌측 후보는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왜 죄다 이 모양인지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방송 코너는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괴 집단은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를, ‘애국가’ 대신 ‘임을 향한 행진곡’을,(1980년대 독재에 대응하기 위하여 많은 대학생들이 애창곡으로 불리웠으나 지금은 애국가 대신 부르는 등 반정부 노래로 변함) 태극기 대신 적화통일의 상징인 한반도기를 든다. 전교조 활동가 교육에서 민중의례를 한다. 국민의례를 한 것은 보지 못했고 태극기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도 못했다. 전교조 출신 장학사는 국민의례가 ‘꼴사납다’며 생략했다. 정치인은 입으로 하는 것을 보지 말고 발로 하는 것을 봐야 된다는 소리가 있는데 과연 전교조가 현충일에 한번이라도 현충사에 가서 참배를 한 적이 있는가?
애국심을 없애기 위해, 3·1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한 안익태(종북세력은 안익태 선생을 친일인명사전<주로 민중사관을 가진 인물들이 작성한 사전. 좌편향 교과서에도 연루됨>에 넣었다)를 일제앞잡이로 매도한다. 애국가 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애국가는 1936년에 만들어져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가로 불리게 됐다. 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국가로 제정되거나 채택된 것이 아니지만 관습적으로 국가로 불리다가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고 적혀 있다. 애국가는 외국에서 일제시대인 1936년에 만들어졌다. 그런 애국가를 독재정권에서 만든 것이고 국가가 아리랑이라는 이석기(통진당 의원)가 국회에서 애국가를 부를 때 화면은 크게 클로즈업되었다. 의식을 했는지 입모양만 중얼거렸다. 화면에서 바로 뒤 옆에 있던 정진후(전교조 전 위원장) 의원도 중얼거렸다. 둘 다 부르고 있다는 판단이 들지 않았다.
2008년 광우난동에서 선동으로 학생을 세뇌하여 거리로 내몰았던 집단이 북한이 천안함을 침몰시키고 연평도를 폭격했지만 계기교육(광의, 협의- 계기교육자료와 일상에서 교육하는 것으로 구분)으로 북한의 위협에 대한 것을 교육시키다는 소리는 역시 전혀 들리지 않았다. 김일성을 장군으로, 북한미화찬양, 미군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적화통일론에 동조하는 집단에게는 당연한 모습이다. 지금이라도 교육청, 교육부는 반성하고 위험세력과 현장을 조사해야 한다. 교육 관료를 믿을 수 없기에 학부모는 자료를 수집하여 가능하다면 교피아를 직무유기로 고발이라도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함양, 덕목, 직업윤리는 교과서에만 존재했다. 현실은 의지로 인내하고 희망으로 낙관하기에는 어렵다.
전교조는 강력한 투쟁력을 가지고 스텔스로 무장하여 주로 하늘에서 작전을 수행했지만 이제는 물속에서 핵 잠수함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모습이다. 우익 진영은 전교조 법외노조라는 잠수함 잡는 초계기가 있었지만 핵 잠수함을 맞추지는 못했다. 마치 이보전진 위한 일보후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 듯 예전에 비하여 잠잠하다. 예전에 비해 상대적인 비유지 만만치 않는 행동을 하고 있다. 힘이 적다고 생각하면 공론의 장(프레임 안)에 올리 가지 않는다. 이것은 고도의 전략·전술이다.
그들이 펼친 프레임(상대방의 언론이나 이미 상황으로 편을 드는 인터넷)에서는 불편하고 불리한 글은 철저히 차단되는 모습이었다. 관심이 없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언론의 자유는 보이지 않게 많은 제약이 있었다. 2014년 아고라는 비판하는 글이 약간 여유가 있다. 그만큼 어려웠고 한편 갈수록 국민이 진실의 길을 걷고 있다는 작은 풍경화다.
많은 것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전교조 약사를 간략하게 나름대로 그렸다, 다음은 전교조가 문제를 일으킨 대표적 사건들이다.
5. 합법화 후 전교조 활동 중에서
→ 초등학생용 적화통일교재 발간
적화통일을 위한 초등학생용 세뇌자료로 분석. 다수의 종류가 있음.
→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않을 나라로 표현
전교조 교사의 시. ”너무나 재수 없는 나라 대한민국, 어린 소녀 죽인 미군이 표창장 주는 미친나라”로 표현.
→ 반미로 효선 미순을 이용
효선미순 사건을 반미로 몸. 학교에서 사건을 이용하여 학생들이 행사하게 만듦.
→ 서상목 교장 자살
여 조합원에게 커피 심부름 시켰다고 집단 투쟁 결과 자살을 선택.
→ 빨치산 추모행사에 학생을 참여시킴
2005년에는 전북 임실군 관촌중학교의 전교조 소속 교사 김모 씨가 학생들을 데리고 빨치산 추모 행사에 참여.
→ 주한미군철수 주장
전교조 통일(적화통일)교재에 있는 내용.
→ 맥아더 동상 철거시위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도했던 민중연대 등의 단체에 보면 민주노동당 전 간부나 민경우 전 통일연대 사무처장 등이 간첩혐의를 받은 적이 있다. 전교조도 참여.
→ 교실에서 환경미화자료로 선군정치 자료 게시함
서울지부 통일(적화통일)위원회가 환경미화게시물로 권장한 북한의 선군정치 포스터가 교실에 게시.
→ 국가보안법 철폐 광고를 한겨레 신문에 게재
인원수와 명단을 속임, 본부 홈페이지에 가짜 명단 개제.
→ 북한방문 시 김일성 주체사상탑에 참배 권유 (?강요)
북한은 김일성 주체사상탑에 전교조와 교총에게 참배를 권유했다. 교총 대표 이원희는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전교조는 참배했다고 전한다. 북한은 교총에게 모든 일정을 취소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정도면 권유가 아니라 강요수준이다.
→ 현대조선력사 사건
전교조 부산지부 통일(적화통일)위원회가 2005년 통일학교에서 교사들에게 강연한 자료는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교재를 그대로 베낀 것을 사용.
→ 합법화 후 불법 연가 조퇴 투쟁 12회 (1999~2007년)
학생을 가르치지 않고 연가를 단체로 내면서 불법 투쟁을 함.
→ 사진 위조사건
반미를 하기 위해 이라크 사진을 미군사진으로 위조해서 반미, 거짓 통일교재로 사용.
→ 막가파 단체교섭
무리한 단체교섭으로 초안을 보면 막장드라마.
→ 학교 현장 엉망
여주상고, 동일학원, 염광학원, 인권학원, 상문고, 인천외고, 정의여중, 홍명고, 한광중고 등에서 문제를 일으킴. 학생들도 같이 투쟁하게 만듦. 혈서를 쓴 학생도 발생. 수업을 장기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도덕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발생.
→ 거짓 통일OX퀴즈 만듦
북한 알기라는 미명하에 종북인사를 소개하고 북한과 김정일 미화, 찬양하는 내용.
→ 적화 통일 책 『이겨레 살리는 통일』 발간
이수호, 전교조 발간함. 내용은 북한을 친하게 만듦, 분석하면 적화통일을 위한 수순을 가지 위한 학생 세뇌서적.
→ 교원평가 반대 시위, 성과급 반납투쟁
성과급을 받아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반납투쟁. 이자까지 준다는 말에 약 970억 원을 거두었으나 투 2차에는 투쟁기금으로 사용한다는 말에 약 40억 원만 모금. 이기심이 잘 드러난 일.
→ 민노총 간부가 전교조 여 조합원 성폭행 사건
수배중인 민노총 간부를 전교조 여조합원의 집에 피신했으나 성폭력 사테 불거짐. 같은 세력에서 여성들이 모여서 이정희 통진당 대표에게 항의 시도 함. 그러나 수면 아래로 문제가 사라짐.
→ 학업성취도 평가 반대
학업성취도를 일제고사라 칭하여 나쁜 인식을 주면서 시험을 보지 않도록 만듦. 정작 참여한 인원은 체험학습이라는 미명아래 소수지만 전교조 자녀들은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분석.
→ 인권조례안
학생인권을 핑계로 학교 내에서 학생이 행동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하는 일. 전교조는 근본적으로 자신에 맞는 일꾼으로 학생을 세뇌하는 집단으로 행동권을 부여하는 일을 조례안으로 만듦.
→ 2차례에 걸쳐 反시국선언 발표
인원과 명단을 속임. 속인 것이 드러나자 얍삽하게 동영상으로 만들어 확인 불가능하게 만듦.
→ 민노당(인민노동당)에 가입하여 당비와 후원금 납부
정진후 전 위원장이 항소했지만 대법원서 패소함, 전교조 비밀자료에는 정치세력화를 명시했고 민노당로 거듭났다. 자료에 민노당으로 명시했고 민노당은 정의당과 통진당으로 나누어짐.
→ 북한이 전교조를 비호하는 성명서를 냄
전교조를 이적단체로 고발하자 여러 번의 성명서를 발표.
→ 광우난동에서 학생을 선동하여 거리로 내몰음
전교조는 처음에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이 증명됨.
→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 국회의원 됨
통진당 비례대표로 나왔으나 정의당 비례대표로 옮겨 당선됨. 전교조 비밀자료는 정치세력화를 명시함.
→ 북한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 전교조 교사 가입
지난 4월 국제 해킹단체 어나이먼스가 공개한 북한의 대남선전사이트 ‘우리민족끼리’ 가입회원 명단과 관련해 15명 가량의 신원과 불법성이 확인됐고 여기에는 통합진보당 당원과 전교조 교사도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외에도 많은 사건이 있다.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잊고 싶지만 굴직한 것만 억지로 기억에서 꺼내고 자료를 참조했다,
대형 사고는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징후와 위기가 사전에 나타난다. 미국의 보험회사 관리자 하인리히는 수천 건의 재해 사고를 분석한 끝에 모든 사고가 일정한 과정을 거쳐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인리히의 법칙) 전교조가 일으킨 사건이 더욱 큰 사건으로 발전할 것은 분명하다. 방관하는 자체는 죄다. 특히 “성과가 드러나지 않고, 보람이 없더라도 맡은 바 직분을 다하는 것이 공직자의 자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김종수 논설위원) 세월호 사건도 다르지 않다. 경고이자 간절한 외침이다.
전교조 힘에 대부분 교장은 함흥차사며 교육관료는 묵묵부답이다. 학부모는 아이들이 인질이라 ‘님의 침묵’이다. 판사도 선생님 앞에서는 을일뿐이다. 상황이 이래도 거짓 참교육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죽은 ‘찰리 채프린’이 살아 돌아와 코메디를 하여도 지금의 상황과는 상대가 안 된다.
좌익과 전교조 자료, 의심되는 사람과 집단의 글과 말은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용어를 재 정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인식의 눈이 밝아져 숨은 뜻을 알 수 있다. 속지 않아야 된다는 말은 특별 보너스다. 좌익 언어는 외국어 보다 어렵다. 쉽게 읽혀도 인식은 따로 논다. 외국어는 사전이 필요하지만 거짓 언어는 사전으로 바르게 인식 할 수 없다. 특별한 사전으로 재 정의해서만 알 수 있다.
둘째, 목적을 알고 있어야 한다. 목적을 모르면 의도를 알 수 없다.
셋째, 전교조는 우리와 같은 편이 아니라 점이다. 교육을 위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참교육을 앞세워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넷째,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중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용어를 논리와 상식에 맞게 재 정립하였다. 또한 아군이 아닌 시각에서 민중의식을 가지고 인민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바로 이점을 인식하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