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사람 풍몽룡(馮夢龍)이 엮은 단편소설집 유세명언(唯世明言)에 나오는 얘기다. 범거경이라는 젊은이가 과거에 응시하러 가다가 도중에 동상에 걸려 얼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마침 곁을 지나던 또 다른 과거 응시생 장려라는 사람이 범거경의 딱한 사정을 알고 초면이지만 정성껏 돌보아 범거경을 구해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똑같이 시험날짜를 놓쳤지만 대신 의형제를 맺었다.
그들은 다음해 9월9일 중양절 날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눈물로 헤어졌다. 이듬해 장려는 집을 깨끗이 치우고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고 범거경을 기다렸다. 시간이 다가오지만 범거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고 주위에서 지난 약속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 말라고 충고를 주었다. 그러자 장려는"거경은 신의를 아는 선비입니다. 틀림없이 약속을 지킬 것이다."라고 했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누군가 바람을 타고 장려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는데 바로 거경이었다. 거경의 몰골은 초췌했고 수심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리고 범거경은 장려에게 지난 얘기를 털어 놓기를, 장려와 헤어진 거경은 생활고에 시달렸고 우선 목구멍에 풀칠을 하다 보니 중양절 약속 날짜를 깜빡 잊어버렸다. 중양절이 되어 주위 사람들이 부산떠는 것을 보고서야 장려와의 약속이 생각났으나 그렇다고 하루 만에 천리 길을 갈 수도 없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차 문득 옛사람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은 하루 만에 천리 길을 갈 수 없지만 귀신은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 거경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귀신이 되어 장려와의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범거경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 있지만, 한 번 약속은 죽음으로도 지키겠다는 즉, 신의만은 지키겠다는 감동적인 얘기다.
이와 비슷한 얘로 미생지신(尾生之信)의 고사를 들수 있을 것이다. 무릇 신의(信義)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믿음과 의리인 것이다. 우리는 최근 잘못된 믿음과 빗나간 의리가 어떤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지 경험 하고 있다. 구원파와 유병언 사태 같은 것이다. 그것은 믿음도 의리도 아님을 익히 알고 있다.
이아침 신문을 뒤적이는데 또 열불 나는 기사가 있다. “세월호법엔 격론 벌이더니 방탄국회엔 일사불란한 野”한마디로 빗나간 믿음이고 의리다. 나는 어제 이곳 토론마당에 누구라 할 것 없이 국회의원이라면 여야를 막론하고 “병/신 같은 것들, 다 나가 죽어”라고 외쳤다. 그 외침은 아직도 유효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