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손녀 외손녀 합쳐 손녀만 넷이라 며칠 전 고추달린 손자가 부럽다며 썰을 풀었지만, 오늘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자식 아니 무손자도 상팔자 같다. 자식이라고 낳아서 고이 길렀더니 아비 망신을 시킨다면 그 자식 뒀다 무엇에 쓰리오.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윤 일병 사건이 마무리도 지어지기전, 군대와는 전혀 무관한 도백이 병영내의 구타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뭐 진부한 소리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는데 자식 한 놈 때문에 치국을 하여 평천하 시킬 인물 반열에 올랐던 이가 승승장구하던 정치 생명마저 급전직하로 위협을 받게 되었으니 이를 두고 어찌 인생무상이니 무자식 상팔자를 아니 읊조릴 수 있을까.
딴에는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자식 잘못 가르친 부모로서 사죄한다며'아들 놈을 올바르게 처벌하라'며 용을 써보지만, 그러지 않아도 죄 지은 아들 놈이야 국법이 다스릴 것이지만 오밤 중 홍두깨 맞은 격으로 이게 무슨 날벼락인란 말인가.
하긴 자식 잘못(?) 둔 죄로 펄펄 날던 사람이 날개쭉지 부러지는 경우가 한두 사람이던가? 이회창이 그렇고, 정몽준이 그렇고, 경우가 좀 다르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렇고, 어떤 총리 지명 후보자가 자식을 군대에 안 보냈다고 된 통 당한 사례도 있다.
그나저나 우리 사회는 어째서 유독 고위층 인사들에게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 일어나는 것일까? 군대를 보내도 또 안 보내도 자식 때문에 일을 그러친다면 이건 자식이 아니라 웬수다 웬수. 앞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 큰 일(특히 대통령)하겠다는 사람은 자식 없는 고자를 내세우던가 아예 나라와 국민과 결혼을 했다는 현임 박근혜 대통령 같은 여성 분들로 뽑아야 겠다.
이번 사건의 향배가 어떻게 될지는 지켜보기로 하고, 재미난 얘기 한 토막으로 오늘 썰을 대신하며....
세종 9년(1427) 6월 17일, 세종은 당시 죄의정이었든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을 의금부에 하옥하라는 명을 내린다. 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서선의 아들이자 황희의 사위인 서달이 신창을 지날 때에 고을 아전 한 명이 자신을 보고도 아는 체를 하지 않고 그냥 갔던 것이다. 이에 서달은 현직 형조판서의 외아들이자 좌의정의 사위인 자신을 못 알아본다고 하인들에게 그 아전을 잡아오게 하면서 정작 당사자가 아닌 다른 아전인 표운평에게 몰매를 가하여 죽게 만든다.
그러한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표운평의 처는 감사 조계생에게 고하지만 그는 서달이 황희의 사위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황희에게 그 사실을 고한다. 자신의 사위가 살인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것을 고민하던 황희는 오랜 동료이고 마침 사건현장 신창이 고향인 맹사성과 의논한다. 맹사성은 신창현감에게 압력을 넣고, 서달의 아버지 형조판서 서선과 모의하여 사건의 수사를 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노복들의 과실이라고 마무리 짓고 범행을 사주하고 실행시킨 주범 서달을 방면시켜버린다.
이리하여 서달의 살인사건은 무사히 넘어가는 듯했으나 보고서를 받은 세종은 석연치 않았는지 재수사를 지시하고 마침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다. 그래서 황희와 맹사성, 서선을 포함한 관련자 전원을 의금부에 하옥시킨다. 그렇지만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선 황희와 맹사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세종은 얼마 후 그들을 복직시킨다. 어쨌든 이 정도(?)는 사위를 아끼는 장인의 마음이라고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그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그럴 여지가 상당히 어려운 것들이다.
서달의 사건이 일어 난지 바로 다음 해인 세종 10년(1428)의 황희는 뇌물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오늘날 청백리의 표상인 황희가 뇌물 스캔들에 휩싸인다는 자체가 놀랍다.) 1월에 첨절제사 박유가 청각(靑角, 바다 녹조식물 중 하나인데, 녹용처럼 생겼음) 두어 말을 황희에게 건네다 걸려 파직되었고, 6월 어느 날, 역리였던 박용이 인수부 판관 조연과 시비가 붙어 박용이 조연을 두들겨 팼고, 이에 조연은 박용을 고을 현감에게 넘기자 박용은 처에게 시켜 말 한 필의 뇌물과 함께 선처를 부탁하자 황희는 그 말을 받고 현감에게 청탁성 편지를 써준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사헌부에서 들고 일어났지만 세종의 적극적인 비호와 황희가 억울하다며 사직을 청했기에 그냥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렇지만 세종 12년 11월 24일, 사헌부에서는 태석균이 제주감목관으로 있었을 때, 말 천 마리가 떼죽음을 당하여 그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한 태석균이 중신들에게 뇌물을 썼는데, 그 중에 황희도 있다고 고발할 때에는 세종도 어쩌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황희가 태석균의 죄상을 논하는 자리에서 그를 변론하는 간언을 했고 그 자리에 세종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종은 황희를 파직하게 되지만 아마도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방금 잘라낸 황희를 금방 복귀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기서 세종은 묘안을 생각해낸다. 조정의 사안이 있을 때마다 전(前) 좌의정 황희와 상의해서 처리를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를 따지는 중신들에게는 그러한 국법은 없다며 웬만한 대소사는 무조건 '전 좌의정 황희'를 언급하며, 그의 자문을 구하게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황희를 쫓아낸 사헌부 관헌들은 속이 뒤틀리게 된다.
그리고 세종이 이듬해에 다시 황희를 부르려 하자 전 내섬주부 박도가 교하 현감으로 있을 적에 둔전을 황희에게 상납하고 그의 아들에게 벼슬을 제수한 일 등을 비롯해 각종 비리를 고하게 되지만 황희에 대한 세종의 총애를 꺾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좌의정이던 그의 벼슬을 영의정으로 승차시켜 세종 13년 9월에 다시 정계에 복귀시킨다. 사헌부 관헌들은 경악하여 황희의 영의정 제수에 관한 부당성을 주장하였지만, 세종의 자세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마도 세종은 황희의 공직자로서의 의혹과 결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모든 백성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진 눈으로 바라봤던 그에게 조정 중신이라고 예외가 있을 리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감찰기관인 사헌부에서 연일 떠드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는 군왕의 입장이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웬만한 것들은 대충 눈감아 주려 했고, 그것이 그가 24년간이나 재상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원동력인 것이다.
덧붙임,
자식 군대 안 보내겠다고 요리 삔질 조리 뺀질 했던 놈들 보다야 그래도 자식 군대 보내고 최전방에서 복무케한 뜻이 가상치 않은가? 우리 한 번만 봐주면 어떨까?